1_ 역사상 가장 거대한 부의 집중, 하지만…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아테네의 전성기, 노동자 계급과 상류계급 사이에 2.5배 소득 차이가 났다고 전한다. 갤리선을 젓거나 건설공사에 참여하는 전문기술자가 아닌 노동자 계급의 연간 수입은 280부셸, 자기 재산으로 무장을 갖추고 시민병으로 복무 가능한 오늘날 중산층에 해당하는 계급은 280~420부셸, 상류층은 700부셸 수입이 기준선이었다. 시민 사이에 드러나는 재산 유무는 금은 식기나 망토 정도에 불과했다.동유럽 붕괴 후 빈곤과 무능의 상징처럼 치부됐지만, 전성기의 소련은 미국의 절
1. 전염병의 광풍이 끝나고 나면 다가올 것들코로나19가 전 세계를 흔들고 있는 시절이지만, 사실 인간의 역사는 수시로 거대한 ‘역병’과 함께해 온 역사이기도 하다. 페스트, 콜레라, 스페인 독감, 에볼라, 에이즈, 신종플루, 메르스…. 세균과 바이러스 등 발병원은 다양하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이 다른 동물들을 사육하거나 인간이 접근하기 쉽잖은 자연계를 개척 혹은 파괴하면서 일어난 현상들이다. 먹거나 이용하기 위해 가축화하는 과정에서 해당 동물 특유의 전염성 질병에 노출되거나, 인간이 예전에는 쉽게 접근하기 힘든 환경에 굳이 진출하면
“재난은 밑에서부터 차오른다.”한때 즐겨 듣던 팟캐스트에서 재난 관련 이야기를 하던 출연자가 했던 말이다. 재난은 대체로 그 사회 내에서 힘없는 계층이 가장 먼저 그리고 더 큰 고통을 경험한다. 1348년, 흑사병의 공포 역시 종교적 광기와 함께 혐오와 배제로 나타났다. 이는 유대인과 같은 이민자나 빈민들처럼 사회적 소수자나 약자들을 향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이런 혐오를 조장하고 이용했다. 유대인 혐오, 인종적 차원과 경제적 차원탈무드에서는 신을 만나는 행위는 신성한 것이기에 평소에 자주 손을 씻는 등 청결한 생활 습관을 강조한
중세 유럽에서는 고대 그리스와 이슬람 의학에 근간하여 모든 질병의 근원을 ‘체액의 불균형’으로 보았다. 그래서 치료는 이 균형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었다. 때문에 의대 교육은 대부분 내과에 치중되었고, 의사 중에서도 이론의라고도 불리는 내과의(fisici)가 가장 소수의 상위 집단이었다.이 외에 도제식으로 양성된 외과의(chirurghi)와 독학과 개인 경험으로 의학을 습득한 임상의(empirici)도 있었다. 임상의는 무면허 의사 취급도 당했지만 골절이나 탈장, 외상 등 특정 분야에 상당한 전문성을 보유한 사람도 있었다. 1348년
1347년 10월,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시작된 흑사병은 1348년 3월에 피렌체를 덮쳤다. 흑사병은 순식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사회 전 분야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는 르네상스 촉발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관련 기사: 흑사병이 종교 권력에 몰고온 파국 ). 오스트리아의 역사학자이자 작가인 에곤 파리델(Egon Friedell, 1878-1938)는 저서 에서 흑사병이 터진 1348년을 ‘근대 인간을 수태한 해’로 평가했다.사실 피렌체에서만 해도 흑사병은 1348년부터 1495년까지 여러 번 크
1_ 길에서 “들꽃”을 만나다2014년 가을, 19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던 현장에서 영화 “들꽃”을 만났다. 영화제의 주 상영 공간인 영화의 전당 관객 라운지 앞 인도에서 일인 시위처럼 영화 피켓을 들고 앉아있는 이들. 그해 부산국제영화제는 상영작 과 등으로 부산시의 탄압에 시달렸고, 굵직한 해외 거장들과 국내외 주목받는 감독들의 신작들이 늘 넘쳐나던 시절이었다. 인파가 넘쳐나는 길거리 한구석에 외롭게 앉은 이들의 피켓에 붙은 영화 “들꽃”의 이미지는 낯설었다. 매년 300편이 넘는 부산국제영화제의 수
르네상스의 발상지이자 중심지였던 피렌체를 얘기할 때 메디치 가문을 빼놓을 수 없다. 막대한 부로 많은 예술가와 철학자를 후원하며 피렌체 르네상스 탄생에 기여했다. 하지만 그림자 뒤에 숨어 공직선거까지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며 공화주의를 훼손한 독재자이기도 했다.시민의 왕이거나 왕 같은 시민, 로렌초 데 메디치메디치 가문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1449-1492)일 것이다. 1469년 아버지 피에로 데 메디치의 사망 이후 갓 20살이 된 로렌초는 가문의 부와 정치 권력을 물려받았다.
"불멸의 신이시여, 이제부터 제가 이야기하려는 이 도시, 피렌체의 영광에 필적할 만한 웅변력을 제게 주소서. (중략) 어느 누구도 이 도시보다 더욱 빛나고 영광스러운 곳을, 이 세상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을 겁니다. 피렌체는 이처럼 위대하고 장엄한 도시입니다." (레오나르도 브루니 지음, , 임병철 옮김, 책세상, 13쪽) 피렌체는 아름다운 도시다. 레오나르도 브루니(Leonardo Bruni, 1370-1444)는 자연환경과 건축물 뿐 아니라 정치제도와 시민 정신에 이르기까지 피렌체를 완벽한 도시로 칭송했다.후대에
2014년 6월, 처음으로 피렌체를 방문했다. 두오모 성당 꼭대기에서 말로만 듣던 피렌체의 아름다움에 빠져 있던 나에게 한 커플이 사진을 찍어 달라며 핸드폰을 내밀었다.흔쾌히 받아든 다음 순간, 조금 놀랐다. 여느 연인과 다름없이 사랑스러운 포즈를 취한 그 커플은 둘 다 여성이었다. 동성 커플을 실제로 가까이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동성애에 대한 비이성적 혐오를 혐오하던 나였지만, 익숙하지 않은 모습을 처음 접했을 때 순간적으로 드는 낯선 느낌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그 뒤로 피렌체를 방문할 때마다 한국과 달리 자연스러운 동
피렌체는 13세기에 이미 상당한 부를 축적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 증가했다. 피렌체 뿐 아니라 이탈리아 북부의 밀라노 역시 크게 성장한다. 피렌체와 밀라노를 비롯한 이탈리아 북부(North Italy 혹은 Central-Northern Italy)는 전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곳 중 하나였다.그렇다면 피렌체의 부는 얼마나 되었을까? 피렌체 정부는 정기적인 세무조사를 벌였는데, 이를 살펴보면 당시 피렌체의 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1427년에 시행한 세무조사 결과인 카타스토 보고서(Catasto report)를 보면 600명 정도가
“그녀들은 재산으로 간주되던 물품이나 항목이었다. 다시 말해 보호받고 또 일정 정도의 보살핌을 받을 가치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녀들은 다른 무엇보다 유용성, 편의성, 가용성에 의해 가치가 매겨졌던 대상이었다. 그녀들의 성은 보호되고 따라서 사용될 수 있는 어떤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의 사용 기간과 조건은 소녀들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니콜라스 터프스트라 지음, 르네상스 뒷골목을 가다, 임병철 옮김, 글항아리, 325쪽) 피렌체 여행 시 꼭 들러야 할 곳 중 하나로 꼽히는 곳이 우피치 미술관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전략) 메디치가의 피렌체는 페리클레스의 아테네가 아니라 오히려 스파르타 같은 도시였으며, 자유롭고 열린 도시가 아니라 반대로 자신의 생활방식에만 집착하는 닫힌 도시였다는 점이다. (안토니오 타부키 지음, 집시와 르네상스, 김운찬 옮김, 문학동네, 26쪽) 르네상스 시절 피렌체는 인문주의를 바탕으로 다양성이 존중되고 여러 문화가 섞이면서 창조의 에너지가 넘치는 도시였다. 그리고 유럽 최초로 공공 고아원과 병원을 설립할 정도로 시민의식이 앞서 있었다.현대에도 많은 학자들과 여행자들이 피렌체의 아름다움을 칭송한다. 하지만 어떤 시대의
이탈리아 피렌체에는 그 긴 역사 만큼이나 많은 이야기가 있다. 유명한 메디치 가문과 훌륭한 예술가들을 만날 수도 있지만, 서민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만날 수도 있다.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에서 북서쪽 골목으로 조금 올라가면, ‘ㄷ’자 모양의 광장을 만날 수 있다. 광장 정면에는 페르디난도 데 메디치의 청동 기마상이 버티고 서있다. 코시모 1세를 비롯한 메디치 군주들의 동상은 시뇨리아 광장 등 여러 곳에서 마주칠 수 있다. 과거 메디치 가문의 선조들은 표면적으로나마 피렌체의 공화정을 지지하며 시민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길 극도로 꺼
르네상스의 시작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 철학1414년, 독일의 작은 마을 콘스탄츠에 전 세계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공의회를 연다. 세 명의 교황이 난립하던 시기였기에 가장 중요한 의제는 누가 진짜 교황인가를 가리는 것이었다. 로마 교황 요하네스 23세는 공의회 소집을 계속 반대했으나 결국 승인하고 직접 참석한다. 여기에서 세 명의 교황을 모두 폐위시키고 새로운 통합 교황을 세우자는 의견이 힘을 얻었다. 요하네스 23세는 최선을 다해 대항했지만, 점점 수세에 몰렸다. 결국 1415년 3월 20일 오후 1시경, 그는 변장을 한 채
르네상스의 시작 종교 권력의 약화피렌체는 안에서 보는 모습도 아름답지만, 어느 정도 떨어져서 바라보면 색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여행자들이 피렌체 남쪽에 있는 미켈란젤로 언덕에 오른다.이와는 반대로 북쪽에서 피렌체의 경관을 바라볼 수 있는 곳도 있다. 바로 피에솔레(Fiesole)라는 작은 마을이다. 거리도 꽤 떨어져 있어서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바라보는 것과는 또 다른 감흥을 느낄 수 있다. 버스로 약 20분 정도 가야 하지만 피렌체 시내와는 달리 매우 조용하고 한적하다. 그래서 일정에 크게 쫓기지 않는 여행자
르네상스의 시작 중세의 작은 틈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철학과 문화에 대한 재발견이자 근대로 가는 인류의 큰 발걸음이었다. 이런 르네상스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여기에는 미술, 종교, 철학, 경제, 정치, 역사 등 그 분야만큼이나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그만큼 르네상스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발생했다. 그 요인들 중에서도 우리가 잘 인식하지 못했던 몇 가지를 살펴보자.르네상스 최초의 천재, 단테단테(Durante degli Alighieri, 1265-1321)는 르네상스 최초의 천재라고
오래전부터 아내와 나는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두 영화를 좋아했다. 과 을 지금까지 각각 열 번은 넘게 본 것 같다. 전망 좋은 방은 헬레나 본햄 카터가 머리가 큰 가분수 분장이나 원숭이 분장 등을 하기 전 젊은 시절에 주연한 영화인데, 잔잔한 듯 하지만 시종일관 깔깔대며 보게 되는 영화이다.젊은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바보 같은 모습도 재미있고 두 주인공의 열정에 감동받게 된다. 남아있는 나날은 안소니 홉킨스와 엠마 톰슨의 절제되었지만 강한 연기를 보는 맛이 일품이다. 이렇게 조용한 이야기로 사람을 끝까지 끌고 갈수 있구나 싶었고, 마지막엔 펑펑 울게 된다. 오래전에 우리는 제임스 아이보리의 영화이야기로 많이 친해졌다.너무 사랑한 나머지, 책까지 사서 읽어본 우
피렌체 정치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시뇨리아 광장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붐빈다. 거기에는 르네상스 시대 탑상주택의 전형을 보여주는 베키오 궁전이 웅장한 위용을 뽐내며 자리하고 있다.(사실 ‘베키오’라는 단어는 ‘오랜 된’이라는 뜻이다. 정식 명칭은 팔라초 델라 시뇨리아이다.) 광장 한 쪽에 줄지어 있는 레스토랑의 야외 테이블에서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멋진 식사와 함께 베키오 궁전을 바라보며 여유를 즐기는 것도 좋다. 시뇨리아 광장에 들어서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베키오 궁전, 그리고 그 앞에 4미터가 넘는 다비드상이 있다. 미켈란젤로의 걸작 중 하나이며, 실제로 보면 사진보다 훨씬 더 거대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다비드상은 복제품이다. 진품은 부식과 훼손을
이탈리아 피렌체에는 거짓말 조금 보태 한국의 편의점이나 교회 수만큼이나 카페가 많다. 아침 일찍 성 조반니 세례당 근처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한잔 마시며 느긋하게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일명 두오모 성당)을 바라보는 여유를 가져보는 것도 좋다. 한 잔에 2유로(약 2800원)가 채 되지 않는 저렴한 가격으로 유러피안이 될 수 있다. 많은 현지인들은 가게 안에 있는 바 앞에서 주문을 하고 바리스타가 바로 내려주는 커피를 받아 그 자리에서 선 채로 후루룩 마시고 나간다. 아마 출근시간에 쫓기나 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지 않은가. 야외에 마련된 테라스에 앉아 웨이트리스의 서빙을 받으며 이른 아침 피렌체의 향기를 느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