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이 지났다. 다양한 이름 적힌 긴 종이에 인자를 찍는 총선이 돌아온다. 하루에 열두 번씩 오는 선거 유세 전화와 문자, 서로 공격하는 자극적인 헤드라인. 매번 반복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얼른 끝났으면 하는 마음이 앞선다. 그래도 국민에게서 나온 힘을 국민에게 쓰는 사람이 있길 바라는 마음과 우리의 목소리를 듣길 바라는 아주 실낱같은 희망으로 후보들이 읽었으면 하는 책을 골라보았다.인권, 기후위기라는 의제 그리고 안보달팽은 ‘코다’(청각장애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녀)의 정체성으로 바라본 다양한 인권 이슈를 길지 않은 글로 엮은
한 해의 시작은 시간의 흐름을 분절하는 새 마디다. 이번 호에서는 기자들이 각자 변화한 상황이나 위치에 따라 새로운 해를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며 살아가고 싶은지 나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동행하기바다거북 해가 바뀌면서 저는 사회적으로도 어른이 되어야 하는 나이에 가까워졌고, 그것이 최근의 생각들에 영향을 주고 있어요. 박연준 시인의 『쓰는 기분』(현암사)에 이런 글귀가 있었어요. “무언가를 다른 이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산할 수 없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그것과 동행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어
동지 일 년 중 가장 춥다는, 혹은 가장 길다는그것도, 게다가, 밤이 제일 길다는그것도, 캄캄한 밤이 그토록 길다는冬至대구에서 죽어간 노숙자 무연고자가 286명이라는데이 한파에, 깜깜한 밤에, 더 이상 추위를 견딜 수 없어별도 달도 죄다 도망가 버려더더욱 새까매진동짓날팥죽 먹는다 하여 액운이 날아가는 것도 아니고별도 달도 나타나아무도 모르는 어두운 죽음, 죽음의 어둠 비추어줄 것도 아닌데이미 별도 달도 없는 하늘나라로 떠나갔지새들도, 집 지을 지푸라기 같은 생을 물고 다니다 온몸 부르르 떨고 남으로, 남쪽으로일찌감치 떠나갔는데고양이
“한 의사가 매일 아침 출근 전 자기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준다. 그런데 의사는 아이의 아버지가 아니다. 그러나 아이는 그 의사의 아들이 맞다. 어떻게 된 일일까?”내가 만난 이백여 명 남짓의 열세 살 아이들은 이 수수께끼에 금세 ‘아이가 입양아다,’ ‘의사가 새아빠다’와 같은 답을 내놓았다. 놀랍게도 의도된 정답이었던 “그 의사는 아이의 엄마이다”를 아이들이 상상해 내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의사’를 생각할 때 우리 머릿속에는 가운 입은 남성의 이미지가 디폴트 값으로 번뜩 떠오른다. 비슷하게, ‘미국인’을 생각할 때 흑인-장애
올해 늦은 봄, 지인들과 경주에 놀러 간 적 있었다. 모두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어서 최근에 읽은 좋은 책들에 대해 대화하던 중, 나는 포항에 아주 괜찮은 동네서점이 있다며 달팽이책방을 소개했다. 포항에는 철강회사와 과메기 말고도 멋진 것이 있다며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타 지역 지인 몇몇이 이미 달팽이책방을 알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 단순히 지역 책방이 아니라 전국구 책방이었는데 나만 모르고 있었나 보다. 그렇게 달팽이책방에 관해 이야기 나누다 지인 한 분이 김초엽 작가님이 포항과 인연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나
내년 초면 아이가 만 6세가 된다. 내가 몸담은 직장에서는 ‘육아시간’을 사용할 수 있는 연령이 만 5세까지로 제한되어 있어(만 6세 이상의 아이는 더 이상 돌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인가?), 다가올 해에 아이 등·하원과 나의 출퇴근을 병행할 일에 고민이 깊다. 그동안에는 8시 15분 무렵 출근하시는 유치원 선생님 손에 아이를 붙들려 드린 후 헐레벌떡 급히 나와 그길로 곧장 출근하면 8시 30분인 출근 시간을 아슬아슬하게 맞출 수 있었고, 오후에는 육아시간 사용을 요청하여 정식 퇴근 시간보다 20분 정도 이르게 퇴근해 아이를 데리러
매년 노벨문학상 시즌이 되면 누가 상을 받을지에 대한 예측 기사가 쏟아지곤 한다. 우리나라 작가나 이미 유명한 작가의 이름이 강력한 후보로 오르내리면 더 많은 관심을 쏟게 된다. 유명한 작가가 상을 받게 되면 독서인이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이 책을 구매해서 읽어보는 것 같다. 마침 얼마 전 2023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었다. 올해 수상자는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이다.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은 작가이지만 ‘노벨상 특수’가 이어질지 궁금하다. 이번 호*에서는 권위 있는 상을 받은 작가와 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야기를 나누어
수채화는 물감을 짜 넣는 것에서 시작한다. 철판으로 된 팔레트에 빨강을 시작으로 주황, 노랑, 연두, 초록, 청록, 파랑, 남색, 보라, 검정의 순으로 가장 안쪽에서 시작하여 한 칸 가득 짜 넣는다.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두고 말리고 나서야 물감을 쓸 수 있다. 수채화에서 빛을 표현하려면 물을 많이 섞어야 한다. 밝음을 표현하겠다고 흰색을 사용하는 것은 금기다. 물을 얼마나 섞느냐에 따라 투명함으로 빛이 표현된다. 눈이 시리도록 들어오는 빛이 있으면 반드시 그림자가 생긴다. 어두움을 표현하겠다고 검은색을 사용하는 것은 금기다. 색
해가 갈수록 폭염주의보가 잦아지는 8월, 아이 둘을 데리고 한국의 무더위를 피해 더 더울지도 모르는 태국 치앙마이로 여행을 떠났다. 치앙마이는 태국 북부의 중심 도시이며 방콕보다 저렴한 물가와 고즈넉한 풍경들로 인기가 많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태국이 코로나의 터널을 잘 통과했길 바라는 마음으로 여행을 떠났다. 도착해 보니 코로나 이전 수준으로 회복한 듯 관광객도 많아 활기찬 분위기였다.아이 동반 여행을 할 때는 생각해야 할 조건들이 많다. 볼거리 그 자체보다 교통, 숙박, 음식, 안전 등이 아이들과 함께하기에 적합해야 한다. 게
나의 여러 기행(奇行) 중 하나를 고백하고자 한다. 나는 한때 별 목적도 가야 할 곳도 없는데도 이따금 한 시간이 넘도록 종점에서 종점까지 버스나 열차를 타는 사람이었다. 구석 자리에 혼자 앉아 차창 밖의 거리와 사람들을 구경하곤 했다. 스물셋 무렵 이러한 독특한 내 여행 방식을 변주할 만한 새로운 여행 경로를 하나 더 추가했다. 그것은 인근 지하철역에서 9호선 급행열차를 탄 뒤 김포공항역에서 내려 공항철도로 환승한 후 다시 인천공항까지 가는 행로로서, 십여 년 전 당시 내가 살고 있던 학교 근처 자취방에서 편도 1시간 20분 정도
10년 전, 막냇동생은 코엑스에서 열리는 행사에 가고 싶다고 했다. 짐을 바리바리 싸서 기차를 타고 4시간 만에 행사장에 도착해 물품보관소를 찾았다. 입장하는 줄에 서서 기다리는 동안 동생은 앞에 서 있던 본인과 비슷한 또래 아이들이 어른들도 없이 자기들끼리 구경 온 모습을 보고 “나도 시내버스, 지하철 타고 이런 데 올 수 있으면 좋겠어…….”라고 했다. 나의 대답은 “그래서 다들 서울에 있는 대학에 오려고 하는 거야. 공부 열심히 해.”였다. 서울에 사는 것으로 얼마나 많은 기회가 있는지 그 어렸던 동생 눈에도 보였나 보다.포항
어릴 적 고사리를 먹으려면 결심이 필요했다. 잘 씹히지도 않고 쿰쿰한 향이 났다. 흙의 향기 같은 것이 그땐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코를 막고 대충 씹어서 꿀꺽 삼키는 것이 내가 하교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고비고사리라며 조심스럽게 다라이에 넌다. 엄마의 목소리를 듣자 하니 우리 집에 자연산 고비고사리가 있다는 것을 이웃에게 들키면 안 되는 모양이다. 아마 나눠줄 수 없을 만큼 넉넉하게 채취하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그렇지만 고비고사리를 널어놓은 다라이는 옆집, 앞집,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도록 볕 잘 드는 마당
뉴스풀이#학생인권조례 개정이 교권보호 대책? #장면1. 어느 학교 상담실“난 지나가다 00이에게 뭘 물어보려고 어깨를 두세 번 두드렸어요. 근데 00이가 화를 내더니 주먹으로 제 가슴을 치려고 하면서 학폭으로 고발하겠다고 했어요!” 상담실에서 학생이 말했다. 상담교사의 입에서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장면2. 어느 학교 교권보호위원회“학생이 큰 소리로 시험 문제가 잘못되었다며 항의하는 과정에 반말을 섞어 저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너무 놀랐고 이건 교권 침해라고 생각해 고발하게 되었습니다.” 교권보호위원들은 답답한 마음에 서로를 쳐다보
윤석열 정부의 폭압 통치가 점점 더 기세를 올리고 있다.화물연대 파업 강경 대응, 민주노총 건설노조 수사에 이은 고 양회동 열사 분신, 광양제철 노동자 폭력 진압과 한국노총의 경사노위 불참 선언, 민주노총의 윤석열 정부 퇴진 투쟁이 시작되었고 민주노총 건설노조의 정당한 시위를 문제 삼아 압수수색으로 이어지고 있다.윤석열 정권의 폭압 통치 대상은 노동조합이나 노동자만이 아니다. 언론이나 시민사회단체에 대한 길들이기도 자행되고 있다.정권을 비판하는 세력은 누구든 적으로 간주해 수사권이라는 폭력을 동원하고 억압한다. 비판의 목소리를 꺾을
뿌리의 꿈은 꽃과 열매이다. 청한 적 없는 삶이었어도 이왕 심겼으니 사는 동안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원한다.뿌리가 원하고 바라며 그리던 꽃과 열매는 그가 아주 여리고 연약하여 아주 작은 힘으로도 금세 부러지기 쉬웠던 날들에도 그의 꿈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그의 꿈은, 그러니까 뿌리의 욕망은 어디에서 태어났을까? 아주 오래전 오래된 누군가들의 소망과 낙담 환희와 번뇌가 역동하며 만들어 낸 그림이 뿌리가 기억하기도 전 태초의 기억 어딘가에 각인된 것은 아닐까. 응축된 원형의 기억은 몸을 옹송그린 채 어둡고 낮은 곳에 도사리고 있다
방명록은 우리가 어딘가에 남기는 흔적이다. 어딘가를 방문할 때, 그 장소에 초대해 준 사람 혹은 이 장소를 찾아올 다른 이에게 전해줄 말을 방명록에 쓴다. 결혼식장이나 돌잔치에는 축하의 방명록을, 에어비엔비나 게스트하우스에는 이 숙소에 대한 간략한 평을 남기고 가기도 한다.만약 지금 ‘세상’에 머무는 사람들에게 세상에 대한 방명록을 쓰라고 하면 과연 어떤 방명록들이 나올까? ‘이 평화로운 곳에서 잘 지내다 갑니다.’ 이렇게 쓰는 사람이 있을까?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위와 같은 방명록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사람에게는 부러움의 박수를
쌀농사 그만하라는 윤석열정부 전국농민회총연맹(이하 전농)을 비롯한 농민단체들이 4월 24일 국회 앞에서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한 윤석열 정부를 비판하며 법 재추진을 요구했다.앞서 4월 4일 윤석열 대통령은 국회를 통과한 양곡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고 국회가 4월 13일 개정안 재표결에 나섰지만 재석 290명 중 찬성 177명으로 부결됐다.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쌀 초과 생산량의 3~5%, 수확기 쌀값이 전년 대비 5~8% 이상 하락하면 의무 매입해 적정가를 유지시키는 게 주요 내용이다.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후인 4
드라마 (NETFLIX)가 화제다. 학교폭력 피해자 ‘문동은’ 역할을 맡았던 배우는 인터뷰에서 극 중 가장 많이 화가 났던 장면을 묻는 물음에 ‘성인이 된 가해자들이 학창 시절에 저지른 잘못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을 때’라고 답했다. 한편 가해 측의 주동자 역을 연기한 배우는 그녀가 맡은 ‘박연진’을 ‘아무것도 모르는’ 캐릭터로 해석했다. 과연 연진의 부모는 딸이 저지른 살인마저 없던 일로 만들어 낼 만큼 부유하고 부패했다. 무지는 힘의 부산물인 동시에 연료로 작동한다. 부와 권력의 비호 속에서 연진은 희생자들을 연일 갈
영화 은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항일 단체 ‘흑색단’의 스파이 ‘유령’의 이야기이다. 유령은 끊임없는 의심과 감시망 속에서 최대한 살아남아 총독을 암살해야 한다. 총독을 암살하고 진정한 광복을 맞이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 그들은 그 누구보다 자신의 목숨을 조국을 위해 바친다.이 영화에서 눈여겨볼 점들이 있다. 먼저 여성들이 총과 칼을 쥐고 광복을 위해 한 몸 바쳐 싸운다는 것이다. 광복을 위해 끊임없이 잠입하고, 죽는 순간까지 무기를 겨누고, 끝까지 싸운다. 거기다 여성들이 서로 돕고 함께 싸우며, 위기를 헤쳐 나간다.
신을 찾게 되는 순간이 있다. 이럴 순 없다고, 당신은 있어야 한다고, 저 재난 속에 슬픔과 아픔과 고통 속에 있는 저이들에게 원망이라도 당신께서 들어야 한다고. 너무나 초라하고 무력한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재난의 상황에서 난 신을 찾는다. 양극성 장애로 저 밑바닥에 있을 때, 물난리로 30년 넘게 일궈온 공장이 물에 잠겼을 때도 읍소했다.“‘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구절은 정말 기만이라고 생각해요. 이게 정말 감당할 수 있다고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