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고 가벼운 마음으로 경주에서 독립서점 운영기를 연재할 너른벽 서점지기입니다.‘너른 벽(wide wall)’은 돛과 닻 출판사에서 펴낸 제로의 책 ‘메타버그 세계관’에서 접한 단어인데요. 너른벽이 등장하는 문장에서 강한 메시지를 오랫동안 기억하며 실천으로 삼고자 서점의 이름으로 선정했습니다. 문장은 “…더 많은 사람이 발을 들여놓을 수 있도록 너른 벽을 추구해야 합니다.”인데, 접근성에 대한 고민과 다양성을 포괄하기 위해 어떤 실천이 있어야 하는지와 같은 현실적 고민도 연결 지어 볼 수 있어 좋습니다. 서점에는 한 권 한 권,
민생위기와 근시안 해법의 파괴적 앙상블 앞에서나라는 부강한데 시민은 살기 어려운 나라가 되어간다. 통계 지표상으론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니, 국제사회에서 위상이 날로 높아진다니 등등 연말연시마다 미디어에선 호들갑을 떨어댄다. 하지만 정작 이를 보는 시민들의 표정은 냉소 그 자체다. 온갖 실적 근거를 보면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을 달리는 게 맞다. 온라인 곳곳에선 평균치가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출처 불명의 수치 기준이 넘쳐난다. 하지만 정작 실제 현실에서 본인 포함 주변에서 평균치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대체 온라인의 평균소득
“무급으로 함께 일하기엔 너무 좋고 고마운 존재지만, 막상 임금을 지불하기엔 뭔지 모르게 찝찝하고 아깝다”라는 동료의 속마음을 들어야 했다. 1년을 근무한 단체에서는 임금을 지불할 여유가 도저히 없다며 나의 활동보조시간 일부를 동료에게 명의를 돌려서 가사보조를 얼마만큼 포기하게 하는 대신 나의 임금으로 주기도 했다. 몸과 마음이 점점 지쳐가고, 급기야 몸담고 있던 단체의 안 좋은 실상들을 깨닫게 될 때 쯤 난 동료들과 자주 부딪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 일터를 떠났다. - 출처: ‘생산성’ 묻는 사회, 장애여성의 노
4년이 지났다. 다양한 이름 적힌 긴 종이에 인자를 찍는 총선이 돌아온다. 하루에 열두 번씩 오는 선거 유세 전화와 문자, 서로 공격하는 자극적인 헤드라인. 매번 반복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얼른 끝났으면 하는 마음이 앞선다. 그래도 국민에게서 나온 힘을 국민에게 쓰는 사람이 있길 바라는 마음과 우리의 목소리를 듣길 바라는 아주 실낱같은 희망으로 후보들이 읽었으면 하는 책을 골라보았다.인권, 기후위기라는 의제 그리고 안보달팽은 ‘코다’(청각장애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녀)의 정체성으로 바라본 다양한 인권 이슈를 길지 않은 글로 엮은
우연한 기회에 현재 우리 사회가 겪게 된 ‘오래된 미래’들을 만나다2023년 한국 1인당 국민소득(GDP)은 32,142달러(약 4,400만 원)로 세계 22위를 차지했다. 그나마 전년 대비 8.2%가 감소한 것이다. 수치상으로만 놓고 보자면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을 강조하는 흐름과 잘 들어맞는다. 하지만 평범한 시민들의 체감이 과연 그럴까? 오히려 ‘한국이 싫어서’ 이민을 꿈꾸는 분위기가 팽배하고, ‘헬조선’이란 자조는 사라지지 않는 현실이다. 여러 계층에서 다양한 이유로 절망이 들끓지만 아마 그중에도 전반적으로 동의가 되는 지점
봄처녀 아니 아지매 아기별꽃 남편님이 냉이 넣고 끓인된장찌개가 먹고 싶답니다.냉이 다듬는 게 얼마나 힘든데하며 면박을 주었습니다.많이 캐지 말고 딱 먹을 만큼만요러는 곱상 남편입니다. 햇볕이 따뜻하니 나물 캐러가기 딱 좋으네요.모자 덮어쓰고마스크 끼고장갑도 끼고호미 챙겨 들고 봉다리 들고 나갑니다. 어디에 가면 냉이가 있으려나먹잇감 찾아 나선 호랑이처럼어슬렁어슬렁 동네를 누빕니다. 동네를 벗어나 살살 걷다가묵밭을 발견했습니다.이런 데 냉이가 있을까?풀떼기가 간간이 보이기는 하는데 노안인지라이눔이 풀인지 냉인지구분하기도 힘드네요.
한 해의 시작은 시간의 흐름을 분절하는 새 마디다. 이번 호에서는 기자들이 각자 변화한 상황이나 위치에 따라 새로운 해를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며 살아가고 싶은지 나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동행하기바다거북 해가 바뀌면서 저는 사회적으로도 어른이 되어야 하는 나이에 가까워졌고, 그것이 최근의 생각들에 영향을 주고 있어요. 박연준 시인의 『쓰는 기분』(현암사)에 이런 글귀가 있었어요. “무언가를 다른 이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산할 수 없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그것과 동행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어
남편의 변화 아기별꽃 밍기적 밍기적하며오전을 그냥 다 날릴 작정인 게다.눈뜬 지 몇 시간째이불 속에서 꼼지락대면서기차 꼬리처럼 줄지어 선집안일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싶다. 어영부영 밥때는 다가오고밥은 하기 싫고참 난감한 상황을 맞았다. 누가 대신해 줄 사람도 없다.거북이처럼 목을 쭉 빼고이불 밖으로 슬금슬금 기어 나오는 꼴이라니진짜 꼴같잖은 모양새다. 어제 걷어온 빨래가 마르지 않아거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이놈부터 해치우자.차곡차곡 개어두고 점심 준비이건 이래서 하기 싫고저건 저래서 하기 싫으니이걸 어째야 하나 싶다. 간단히 있는
20년 전쯤 지역에 대형마트 입점이 예고되었다. 당시 지역 재래시장 상인들과 흔히 ‘동네 마트’라 불리던 중소형 마트들, 그리고 시민사회단체가 함께 대형마트 반대 운동에 나섰다. 반대 운동에 참여한 단위들은 지역 내에서 서명운동과 일인시위, 항의집회 등을 진행했다. 노동조합에서도 지역 사회단체와 함께 운동에 동참하면서 소속 조합원에게 서명 참여를 요청했다. 이참에 지역 내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발언권을 가졌지만 지역사회와의 연대를 통해 극복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반대 운동 내부에서도 수천여 조직을 가진 노동조합에 기대를 피력하던 상황
동지 일 년 중 가장 춥다는, 혹은 가장 길다는그것도, 게다가, 밤이 제일 길다는그것도, 캄캄한 밤이 그토록 길다는冬至대구에서 죽어간 노숙자 무연고자가 286명이라는데이 한파에, 깜깜한 밤에, 더 이상 추위를 견딜 수 없어별도 달도 죄다 도망가 버려더더욱 새까매진동짓날팥죽 먹는다 하여 액운이 날아가는 것도 아니고별도 달도 나타나아무도 모르는 어두운 죽음, 죽음의 어둠 비추어줄 것도 아닌데이미 별도 달도 없는 하늘나라로 떠나갔지새들도, 집 지을 지푸라기 같은 생을 물고 다니다 온몸 부르르 떨고 남으로, 남쪽으로일찌감치 떠나갔는데고양이
“한 의사가 매일 아침 출근 전 자기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준다. 그런데 의사는 아이의 아버지가 아니다. 그러나 아이는 그 의사의 아들이 맞다. 어떻게 된 일일까?”내가 만난 이백여 명 남짓의 열세 살 아이들은 이 수수께끼에 금세 ‘아이가 입양아다,’ ‘의사가 새아빠다’와 같은 답을 내놓았다. 놀랍게도 의도된 정답이었던 “그 의사는 아이의 엄마이다”를 아이들이 상상해 내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의사’를 생각할 때 우리 머릿속에는 가운 입은 남성의 이미지가 디폴트 값으로 번뜩 떠오른다. 비슷하게, ‘미국인’을 생각할 때 흑인-장애
휴일 보내기 아기별꽃 시골살이가 그래요.초저녁 잠들고일찍 하루 시작하게 되더라구요.오늘 쉬는 날늦잠이라도 자면 좋을 텐데멋진 잠을 자고 새날을 시작하는 시간여섯 시 반입니다. 남편님 청소기 밀고 다니고나는 걸레 담당.청소 끝내고장미 삽목 네 개하고꼭 살아줘… 장미야생난리를 떨어도 아홉 시가 안 되었어요. 황토방… 따끈한 게누우면 잠들까이불 하나 빨고내 주식 빼고 다 오르는코스피 한번 둘러보고언니랑 수다 한판 떨고 나니 열시 치과 가야겠다 하고 보니빨래가 한 시간이나 걸린다네점심 먹고 시내 나가 볼 참입니다.오늘 메뉴는 생선 정식옥돔
영화제 현장에서 사라진 감독의 이야기, 2023년 10월 9일,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는 현장에서 작은 사건이 터졌다. GV(Guest Visit, 관객과의 대화)에 참석하기로 한 감독이 사라진 것이다. 사전에 전혀 공지가 되지 않은 상황이라 영화 상영 후 부대행사를 기다렸던 이들에겐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무대에 등장해야 할 외국인 감독은 끝내 등장하지 않았고, 행사 진행을 맡을 예정이던 영화제 프로그래머만이 등장해 자초지종을 관객들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혼란은 가라앉았다. 프로그래머가 마이크를 통해 전달한 사정이 너
추석이 지나니 사람들이 연휴 후유증을 겪는다. 총 6일간의 연휴가 있다 보니 다시 업무에 돌입하기가 힘든가 보다. 2023년 추석이 지나니 사람들은 벌써 내후년 명절을 기다리는 모양이다. 2025년 추석은 7일의 연휴라고 한다.하지만 정규직 직장인들이 그토록 환호하는 연휴에도 장애인은 고통스러워한다. 일단 활동지원사도 경우에 따라서는 명절을 가족과 보내야 해서 근무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장애인들은 명절에 활동지원사를 구하기 힘들고, 다행스럽게도 구한다 하더라도 바우처 소비가 더욱 많아져 고통스러워한다.장애인의 입장에서 활동지
나의 여러 기행(奇行) 중 하나를 고백하고자 한다. 나는 한때 별 목적도 가야 할 곳도 없는데도 이따금 한 시간이 넘도록 종점에서 종점까지 버스나 열차를 타는 사람이었다. 구석 자리에 혼자 앉아 차창 밖의 거리와 사람들을 구경하곤 했다. 스물셋 무렵 이러한 독특한 내 여행 방식을 변주할 만한 새로운 여행 경로를 하나 더 추가했다. 그것은 인근 지하철역에서 9호선 급행열차를 탄 뒤 김포공항역에서 내려 공항철도로 환승한 후 다시 인천공항까지 가는 행로로서, 십여 년 전 당시 내가 살고 있던 학교 근처 자취방에서 편도 1시간 20분 정도
게으르기 쉽지 않다 아기별꽃 알람보다 먼저새소리가 들리고등을 켜기도 전햇살이 방안으로 쑥 드는가을 초입 아침바람마저 쳐들어 와얼굴을 만지작거리는데어떻게 잠을 깨지 않을 수 있겠어. 신음동 집이라면다시 자기도 쉬운데여기서는 힘들다. 빨래 툭툭 털어 널고로봇 청소할 때나는나의 즐거움을 찾아 헤맨다. 가위 들고나가부채 같은 호박잎 열 장 따고부추 한 줌 자르고빨갛게 익은 홍고추 하나초록 초록 풋고추 하나보랏빛이 좋은 가지도 하나.따다 두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꽈리고추 한 봉지.아들이 사다 둔 햄 한 봉지.계란 다섯 알.말린 곤드레 나물.
“돈 받기 위해 아이와 올라갔다는 비방 글에 대해 사과하라”8월 17일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 회의가 열리던 날, 양아름찬꼬뮌 군은 손피켓을 들고 회의장을 찾았다. 꼬뮌은 “보이는 사람 다 붙잡고 피켓 보여주면서 인사했다”고 말했다.꼬뮌은 7월 11일, 아버지와 함께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옥탑에 올랐다. 공공운수노조 산하 노조에서 조직국장으로 활동하는 어머니의 노동권과 건강권 보장을 요구하며 투쟁에 나선 아버지 곁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방학 중 체험학습으로 며칠 농성장을 비울 때 꼬뮌은 말했다.“내려가는 게 아니라 올라가는 거라구!
공격성향의 돌봄 대상 - 교육도 지원도 없이나는 A를 B와 함께 만났다. A는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B는 A의 보호자다. B는 A에게 필요한 일을 나에게 지시했다. 내가 밥과 물을 차려주면 A는 알아서 먹었다. 때로는 A를 데리고 산책을 다녀왔다. A는 보조기기 없이도 잘 다녔고, 집 바깥 화장실을 좋아했다. 우리는 종종 집 인근 공원의 화장실에 오갔다. A는 대소변을 본 후 뒤처리를 해 줄 필요가 없어 큰 어려움이 없었다. 다만 그가 다른 사람을 깨물기도 해 문제였다. A에게는 손발톱 깎기, 목욕이 필요했고, A는 그 과정에서
기존에는 쓸모를 기준으로 어떤 존재나 경험을 생각하고 평가하는 사람이었다면, 글을 쓰는 사람이 된 이후로 어떤 사물과 현상과 존재에서 다른 의미를 발굴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p294 글을 쓴다는 일은 시작한다는 강력한 의미다. 나를 지키고, 나를 통제하고, 나를 의미한다. 글을 잘 쓰고 싶었다. 살아온 경험이 글쓰기가 된다고 진심으로 믿고 싶었다. 잘 익은 글을 건져낸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인가.부산에서 KTX를 타고 마감 원고 한 편을 서울 도착 전에 보낼 수 있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쓰고는 싶지만, 써지지 않는 현실과
10년 전, 막냇동생은 코엑스에서 열리는 행사에 가고 싶다고 했다. 짐을 바리바리 싸서 기차를 타고 4시간 만에 행사장에 도착해 물품보관소를 찾았다. 입장하는 줄에 서서 기다리는 동안 동생은 앞에 서 있던 본인과 비슷한 또래 아이들이 어른들도 없이 자기들끼리 구경 온 모습을 보고 “나도 시내버스, 지하철 타고 이런 데 올 수 있으면 좋겠어…….”라고 했다. 나의 대답은 “그래서 다들 서울에 있는 대학에 오려고 하는 거야. 공부 열심히 해.”였다. 서울에 사는 것으로 얼마나 많은 기회가 있는지 그 어렸던 동생 눈에도 보였나 보다.포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