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에는 쓸모를 기준으로 어떤 존재나 경험을 생각하고 평가하는 사람이었다면, 글을 쓰는 사람이 된 이후로 어떤 사물과 현상과 존재에서 다른 의미를 발굴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p294 글을 쓴다는 일은 시작한다는 강력한 의미다. 나를 지키고, 나를 통제하고, 나를 의미한다. 글을 잘 쓰고 싶었다. 살아온 경험이 글쓰기가 된다고 진심으로 믿고 싶었다. 잘 익은 글을 건져낸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인가.부산에서 KTX를 타고 마감 원고 한 편을 서울 도착 전에 보낼 수 있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쓰고는 싶지만, 써지지 않는 현실과
“나는 이 세계에 소속돼 있어요. 필요한 만큼, 그리고 분리돼 있어요.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만큼.” p85 나이 듦은 아프고, 돈 없고 외로울 미래다. 노년의 솔로는 ‘고독사’로 연결되고 언론은 재난처럼 보도한다. 혼자를 선택한 사람들의 나이 듦을 고독과 빈곤으로 일반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를 선택하는 솔로, 1인 가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2021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전체 가구 중 1인 가구 비율은 33.4%를 차지했다.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정상가족’이라 불리는 3인 가구(29.3%)보다 많다. 2022년 서울시
사소한 모든 삶이 다 ‘나 같아서’ 쉽게 고개를 돌릴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이용하기로 했다. 작은 매체를 통해서나마 내가 외면할 수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내고, 너무 세밀해서 징글징글한 이야기를 정직하게 풀어보기. 숭고하기보다 정직하게. p95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직업과 함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많은 함의를 지닌다. 노동 시장의 차별 언덕을 오르내리는 그 직을 천직으로 삼은 것은 애쓰는 삶을 쓰고자 하는 숙명과 연결되어 있다. 이 책은 화려한 방송국이 궁금하고 라디오가 좋아 방송을 시작한 20년 차 베테랑 작가
아이부터 어른까지, 우울증부터 분노조절장애까지 인간 심리를 해체하는 TV 프로그램이 인기다. 서점에는 심리학을 입은 인문학, 자기계발서가 베스트셀러다. 고통스러운 감정을 치유하고 위로받으며 기댈 곳이 생겼다. 그리고 인간들은 만나면 MBTI를 묻는다. I와 E의 차이가 도대체 뭣이라고, I도 E도 아닌 인간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이 따져 묻기 시작했다.감각적으로 강한 자극을 받으면 쉽게 피곤해지거나 가끔 신경이 지나치게 곤두서서 혼자 휴식을 취해야 하거나, 존재와 삶의 의미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한다면, 그리고 나를 진솔하
말이 마차를 끄는 동안 오랜 시간 음식과 물을 먹이지 않았고, 움직이지 않는다며 매질과 학대를 가했다. 경주 첨성대 앞에서 관광객을 태우고 꽃마차를 끌던 말이었다. 동물보호단체에서 꽃마차 업체를 고발했지만, 동물 학대로 처벌은 어렵다고 한다. 차선책으로 도로 위 마차운행 금지법을 만드는 활동을 하는 중인데 개정안은 국회에서 표류하고 있다. 싸우는 목소리들 덕분에 경주에서 꽃마차는 사라졌다. 합천군은 마차운행을 중지하고 전기차 운행을 시작했다. 시카고시는 마차운행 금지법을 신설하기 이전에도 말을 하루에 최대 6시간만 일하게 했고,
많은 돈이 아닌, 노동의 대가로 더 많은 가용시간을 경험하면 무엇이 성공을 구성하는가에 대한 신호가 바뀐다. p38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라는 광고 문구가 있었다. 여행을 가거나 퇴근 후 그저 그런 취미생활이라도 일상이 되는 워라벨이 다가올 것 같았다. 그러나 곧장 패러디가 등장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더 해라!”“아버지는 망~했지, 인생을 즐기다.”번아웃과 과로사가 낯설지 않은 세상, 생각해 보면 우리는 너무도 잔혹한 세상에 살고 있다.주4일 노동은 기업 이윤이 확대되고, 개인 삶
“군인이 필요하다는 거야······ 아직은 더 예쁘고 싶었는데······”전쟁은 누구의 언어로 표현되는가. 어떻게 최첨단 무기마다 그토록 위협적인 이름이 붙을 수 있으며, 어떻게 무기의 이름은 남성의 대명사가 되어 있을까. 어떻게 여성 군인은 역사 속에서 지워지게 되었을까. 전쟁이 없는 세상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다.포격 당한 전차에서 병사를 꺼내도록 훈련받은 군인, 수십 명을 사살하고 머리가 백발이 된 저격수, 가슴을 보여달라는 군인을 돌보는 간호병, 생리혈을 흘리며 진군하는 군인, 수시로 벗겨지는
오늘 태어난 아이와 오늘 죽은 사람, 가장 힘 있는 사람과 가장 힘없는 사람, 가장 부자인 사람과 가장 가난한 사람, 가장 기쁜 사람과 가장 슬픈 사람, 그 사이에 저널리즘이 있다. P146 붉은 꽃잎이 뚝뚝 떨어진다. 꽃은 비가 되어 내린다. 사람 이야기에 공을 들이고, 성경과 한서,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 루쉰의 을 인용하며 봄날을 서사한다. 시의적절한 인문학적 감성과 배경음악의 선택은 탁월하기까지 하다.저녁밥을 먹으며 앵커 브리핑을 시청하다 울컥한다. 노회찬의 ‘작별’이 그랬고, 세월호 1주기 ‘가만히 눈을 감기만
돌봄 선언은 ‘보편적 돌봄’이라는 퀴어-페미니즘-반 인종차별주의-생태사회주의의 정치적 비전을 제안한다. 보편적 돌봄은 직접적인 돌봄 노동뿐 아니라 타인들과 지구의 번영에 대해 관여하고 염려하며 공동으로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p177 코로나는 나를 패싱 하지 않았다. 무료진료, 비대면 처방, 지원 물품, 성가실 정도의 지속적인 문자(추후 상담까지)와 지인에게 위로의 비타민을 선물받았다. 내 기관지와 면역체계가 오미크론과 싸우고 있을 때, 플랫폼 노동자, 국가와 의료기관이, 가족을 포함한 지구 전체, 공동체가 나를 돌보고 있
‘예의 있는 반말’에는 반말도 존댓말도 아닌, ‘평어’라는 언어체계를 사용하고 있는 디자인 커뮤니티 디학(디자인학교) 열다섯 명의 글이 담겨있다.언어가 가진 권력을 직시하고 나의 위치가 어디인지 직면했을 때 느끼는 불편함을, 당연함의 렌즈를 벗는 새로운 소통 방식인 언어에서 시도한다. ‘평어’라는 언어를 실행하며 변화를 현실적으로 그려냈다. 디자인과 미학 전공자들의 영역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읽어 볼 수 있다. 평어는 위계를 느낄 수 있는 요소들, 상하관계를 의식할 때 사용하는 호칭을 걷어내고 이름으로만 부른다. 언니, 오빠,
빈부를 수치화하는 등급과 통계 좌표상에 자신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정확히 점 찍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부가 그렇듯 빈곤 역시 구체적인 삶이자 내력이며 외면만이 아닌 내면의 어떠함이다. 홈리스의 삶은 생애 내내 꽁무니에 붙은 채 끊어지지 않고 길어지기만 하는 서사의 실타래다. P312 서울 밀레니엄 힐튼 호텔의 매각이 언론에 오르내린다. 엄청난 자본을 쏟아부은 사업주는 용적률을 높이기 위해 건물을 철거하고 높이 올리기로 한다. 시대사적 의미의 건축물 철거라는 기사와 함께 화려한 건물 뒤, ‘도시 빈곤 메커니즘’, ‘숨어있는
모든 생명의 무게는 같고, 똑같이 그 무게를 감당하고 있다는 말은 정작 무게를 나눠지지 못한다. 우리가 먹는 밥을 위해 무게를 더 많이 지는 이들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p214) 불어오는 바람이 어디서 왔는지 매일 기상청을 확인해 따지지 않는다. 준비 없이 인간을 만나고, 준비 없이 만나는 삶의 고저가 인생이다. 인생이 그렇듯, 나는 책도 그렇게 만난다 싶다. 이번에는 ‘밥’과 ‘노동’이다. 삶이 닳아서 쓰라릴 때 속을 다스리는 첫 번째 방법은 밥부터 먹는 것이다. 위로를 해 주고 싶다면 ‘밥은 먹고 다니냐?’
조울병을 앓지 않았더라면 내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보내준 지지와 응원이 이처럼 마음 깊이 감사하지 못했을 것이고, 내가 얼마나 운이 좋은지 몰랐을 것이다. p253 어쩌다 또 질병에 관한 책을 서평으로 쓰게 되었다. 무겁지(?) 않은 번아웃과 같은, 정서적인 책을 선택해야겠다 싶었는데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이끌렸다는 말이 맞겠다. 시를 읽으면 의미가 와락 덤벼들 듯 통째로 이해됐고, 구절과 구절 사이 시인이 숨겨놓았을 감정이 세세히 떠올랐다. 속도가 너무 빨라 불안하면서도 황홀했다. p25
〈우리는 밤마다 수다를 떨었고, 나는 매일 일기를 썼다〉- 원더박스, 2020년 11월 4일, 지은이 궈징, 옮긴이 우디. 해제 정희진 1월 23일, 우한이 봉쇄되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아는 사람이 없었다. p16 어쩌다 책이 또 일기다. 난해한 글을 명료하게 정리하고, 책을 세련된 맛으로 포장하는 여성학자 정희진의 프롤로그 덕분이다. 무겁지 않지만 가볍지도 않은, 개인의 생존일기다. 전염병의 심각성을 말하기보다 단절된 마음을 회복하고 서로를 도와 치유하려 한다.작가 궈징은 페미니스트이자, 사회활동가다. 중국 최초로
왜 한국에서 계속 살고 싶으냐고 묻는 사람이 있어요. 저는 이 질문을 한 사람에게 그대로 되돌려 주고 싶어요. 그럼 왜 당신은 한국에 살고 있나요? 똑같아요. 저는 이곳에서 태어나 자랐어요. p82친구들은 제가 역사랑 국어를 학교에서 제일 잘했다는 걸 기억하니까 저한테 그래요. “너는 나보다 한국어 잘하는데 왜 군대 안 가냐?” p159 이주아동과 이주인권활동가, 이주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변호사의 인터뷰를 기록한 《있지만 없는 아이들》(국가인권위원회 기획, 은유 지음)이 2021년 6월 출간되었다.이 책은 보이는 이들과 없
8살 때부터 착한 딸 코스프레를 시작했다. 그것이 이 집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했다. 착한 누나, 착한 딸이 되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연기가 미숙했던 탓에 금방 눈치를 챘다. 그래서 그냥 막 가자고 노선을 바꾸고 지금의 어정쩡한 누나, 매사 불만인 딸이 됐다. (p51) 책 선물은 언제나 기분이 좋다. 지역 출신 작가가 쓴 책이라 더욱 친근하게 다가온다.하얀 무광 표지에 네임펜으로 쓴 듯 삐뚤빼뚤한 표지 그림과 제목, 핸드메이드 느낌의 앙증맞은 크기는 연필로도 줄 한 줄 허용하지 않고 소장 가치를 불러온다.이 책
또 한 명의 청년이 세상을 떠났다.2017년 4월 방송사 제작 PD였던 ‘이한빛’은 방송 현장의 노동력 착취에 문제를 제기해 오다 ‘카메라 뒤에 사람이 있다’고 고발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핸드폰에 ‘나의 희망’으로 저장되었던 아들, ‘사람을 벌레로 밟고 오를 수 없어서 하늘을 향해 몸을 던진’ 아들을 위해 국어 교사였던 어머니 김혜영 씨가 아들에게 보내는 약속의 말들을 책 로 엮어냈다.저자는 자식을 먼저 보낸 애틋함, 주변인에 대한 원망, 길을 걷다가도 쏟아지는 눈물, 공황장애처럼 다가오는 슬픔,
폐업은 기록을 없애는 거잖아요. 잘못된 것들을 리셋시키고 다시 만드는 거잖아요. 모든 사람의 피땀 눈물을 다 한마디로 리셋시키는 거. 노동자한테는 환장할 노릇이고, 자본가한테는 정말 손쉬운 방법이죠. 폐업은 정말 인생에 구멍이 뚫리는 것 같은 일이에요. - 회사가 사라졌다, p. 236IMF 이후 일자리, 감원, 해고, 부도, 폐업, 청산, 외주화, 아웃소싱은 기업을 움직이는 단어로 자리 잡았다. 특히 코로나 이후 노동시장에서 ‘일자리를 잃는다’는 성별 구분 없이 일상의 공기처럼 떠돈다.‘쉬운 해고’와 문을 ‘탁’하고 닫는 것처럼
황금 같은 두 번의 토요일을 뉴스풀 영상교육을 들으러 교육장에서 보냈다.15인치 노트북 화면에 4개의 프로그램 창을 띄우고도 새 창을 자꾸자꾸 만들어야 했다.눈과 마우스는 초점을 잃고 헤매기 일쑤였다.강사님은 조곤조곤 친절했지만 “화나셨어요?”를 우리에게 자꾸 물었다.가을 하늘은 멋지게 푸르고, 코스모스는 바람에 흔들렸지만당연한 것들에 질문을 던지고 낮은 곳으로 카메라 렌즈를 향한다.시장통에서 만날 수 있는 어르신, 개와 주인, 친구와 이야기하는 학생, 퇴근 후 가을밤을 산책하는 사람…이들의 걷고 있는 발을 카메라 담았다.멈춰 있다
늦은 휴일 오후, 강변을 산책했다. 경민 씨 어깨에 한 손을 얹고 속도를 맞춰 나란히 걷는 소점 씨의 어깨에 가을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김소점(46) 씨는 전 유도 국가대표 선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운동선수의 경험을 살려 헬스장을 열었고 사업은 대박이 났다. 결혼과 임신, 출산으로 모든 활동은 중단되었다. 소점 씨의 아이는 3살 무렵 희귀난치성 질환인 근육병 진단을 받았다.아들 경민(18) 씨는 희귀난치성 질환인 근육병이 있는 와상장애인이다. 손가락의 근육으로 전동 휠체어 조작만 가능하다. ‘경산자인학교’를 다니는 경민 씨는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