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은 밑에서부터 차오른다.”한때 즐겨 듣던 팟캐스트에서 재난 관련 이야기를 하던 출연자가 했던 말이다. 재난은 대체로 그 사회 내에서 힘없는 계층이 가장 먼저 그리고 더 큰 고통을 경험한다. 1348년, 흑사병의 공포 역시 종교적 광기와 함께 혐오와 배제로 나타났다. 이는 유대인과 같은 이민자나 빈민들처럼 사회적 소수자나 약자들을 향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이런 혐오를 조장하고 이용했다. 유대인 혐오, 인종적 차원과 경제적 차원탈무드에서는 신을 만나는 행위는 신성한 것이기에 평소에 자주 손을 씻는 등 청결한 생활 습관을 강조한
중세 유럽에서는 고대 그리스와 이슬람 의학에 근간하여 모든 질병의 근원을 ‘체액의 불균형’으로 보았다. 그래서 치료는 이 균형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었다. 때문에 의대 교육은 대부분 내과에 치중되었고, 의사 중에서도 이론의라고도 불리는 내과의(fisici)가 가장 소수의 상위 집단이었다.이 외에 도제식으로 양성된 외과의(chirurghi)와 독학과 개인 경험으로 의학을 습득한 임상의(empirici)도 있었다. 임상의는 무면허 의사 취급도 당했지만 골절이나 탈장, 외상 등 특정 분야에 상당한 전문성을 보유한 사람도 있었다. 1348년
1347년 10월,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시작된 흑사병은 1348년 3월에 피렌체를 덮쳤다. 흑사병은 순식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사회 전 분야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는 르네상스 촉발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관련 기사: 흑사병이 종교 권력에 몰고온 파국 ). 오스트리아의 역사학자이자 작가인 에곤 파리델(Egon Friedell, 1878-1938)는 저서 에서 흑사병이 터진 1348년을 ‘근대 인간을 수태한 해’로 평가했다.사실 피렌체에서만 해도 흑사병은 1348년부터 1495년까지 여러 번 크
르네상스의 발상지이자 중심지였던 피렌체를 얘기할 때 메디치 가문을 빼놓을 수 없다. 막대한 부로 많은 예술가와 철학자를 후원하며 피렌체 르네상스 탄생에 기여했다. 하지만 그림자 뒤에 숨어 공직선거까지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며 공화주의를 훼손한 독재자이기도 했다.시민의 왕이거나 왕 같은 시민, 로렌초 데 메디치메디치 가문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1449-1492)일 것이다. 1469년 아버지 피에로 데 메디치의 사망 이후 갓 20살이 된 로렌초는 가문의 부와 정치 권력을 물려받았다.
"불멸의 신이시여, 이제부터 제가 이야기하려는 이 도시, 피렌체의 영광에 필적할 만한 웅변력을 제게 주소서. (중략) 어느 누구도 이 도시보다 더욱 빛나고 영광스러운 곳을, 이 세상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을 겁니다. 피렌체는 이처럼 위대하고 장엄한 도시입니다." (레오나르도 브루니 지음, , 임병철 옮김, 책세상, 13쪽) 피렌체는 아름다운 도시다. 레오나르도 브루니(Leonardo Bruni, 1370-1444)는 자연환경과 건축물 뿐 아니라 정치제도와 시민 정신에 이르기까지 피렌체를 완벽한 도시로 칭송했다.후대에
2014년 6월, 처음으로 피렌체를 방문했다. 두오모 성당 꼭대기에서 말로만 듣던 피렌체의 아름다움에 빠져 있던 나에게 한 커플이 사진을 찍어 달라며 핸드폰을 내밀었다.흔쾌히 받아든 다음 순간, 조금 놀랐다. 여느 연인과 다름없이 사랑스러운 포즈를 취한 그 커플은 둘 다 여성이었다. 동성 커플을 실제로 가까이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동성애에 대한 비이성적 혐오를 혐오하던 나였지만, 익숙하지 않은 모습을 처음 접했을 때 순간적으로 드는 낯선 느낌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그 뒤로 피렌체를 방문할 때마다 한국과 달리 자연스러운 동
피렌체는 13세기에 이미 상당한 부를 축적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 증가했다. 피렌체 뿐 아니라 이탈리아 북부의 밀라노 역시 크게 성장한다. 피렌체와 밀라노를 비롯한 이탈리아 북부(North Italy 혹은 Central-Northern Italy)는 전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곳 중 하나였다.그렇다면 피렌체의 부는 얼마나 되었을까? 피렌체 정부는 정기적인 세무조사를 벌였는데, 이를 살펴보면 당시 피렌체의 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1427년에 시행한 세무조사 결과인 카타스토 보고서(Catasto report)를 보면 600명 정도가
“그녀들은 재산으로 간주되던 물품이나 항목이었다. 다시 말해 보호받고 또 일정 정도의 보살핌을 받을 가치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녀들은 다른 무엇보다 유용성, 편의성, 가용성에 의해 가치가 매겨졌던 대상이었다. 그녀들의 성은 보호되고 따라서 사용될 수 있는 어떤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의 사용 기간과 조건은 소녀들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니콜라스 터프스트라 지음, 르네상스 뒷골목을 가다, 임병철 옮김, 글항아리, 325쪽) 피렌체 여행 시 꼭 들러야 할 곳 중 하나로 꼽히는 곳이 우피치 미술관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전략) 메디치가의 피렌체는 페리클레스의 아테네가 아니라 오히려 스파르타 같은 도시였으며, 자유롭고 열린 도시가 아니라 반대로 자신의 생활방식에만 집착하는 닫힌 도시였다는 점이다. (안토니오 타부키 지음, 집시와 르네상스, 김운찬 옮김, 문학동네, 26쪽) 르네상스 시절 피렌체는 인문주의를 바탕으로 다양성이 존중되고 여러 문화가 섞이면서 창조의 에너지가 넘치는 도시였다. 그리고 유럽 최초로 공공 고아원과 병원을 설립할 정도로 시민의식이 앞서 있었다.현대에도 많은 학자들과 여행자들이 피렌체의 아름다움을 칭송한다. 하지만 어떤 시대의
이탈리아 피렌체에는 그 긴 역사 만큼이나 많은 이야기가 있다. 유명한 메디치 가문과 훌륭한 예술가들을 만날 수도 있지만, 서민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만날 수도 있다.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에서 북서쪽 골목으로 조금 올라가면, ‘ㄷ’자 모양의 광장을 만날 수 있다. 광장 정면에는 페르디난도 데 메디치의 청동 기마상이 버티고 서있다. 코시모 1세를 비롯한 메디치 군주들의 동상은 시뇨리아 광장 등 여러 곳에서 마주칠 수 있다. 과거 메디치 가문의 선조들은 표면적으로나마 피렌체의 공화정을 지지하며 시민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길 극도로 꺼
르네상스의 시작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 철학1414년, 독일의 작은 마을 콘스탄츠에 전 세계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공의회를 연다. 세 명의 교황이 난립하던 시기였기에 가장 중요한 의제는 누가 진짜 교황인가를 가리는 것이었다. 로마 교황 요하네스 23세는 공의회 소집을 계속 반대했으나 결국 승인하고 직접 참석한다. 여기에서 세 명의 교황을 모두 폐위시키고 새로운 통합 교황을 세우자는 의견이 힘을 얻었다. 요하네스 23세는 최선을 다해 대항했지만, 점점 수세에 몰렸다. 결국 1415년 3월 20일 오후 1시경, 그는 변장을 한 채
르네상스의 시작 종교 권력의 약화피렌체는 안에서 보는 모습도 아름답지만, 어느 정도 떨어져서 바라보면 색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여행자들이 피렌체 남쪽에 있는 미켈란젤로 언덕에 오른다.이와는 반대로 북쪽에서 피렌체의 경관을 바라볼 수 있는 곳도 있다. 바로 피에솔레(Fiesole)라는 작은 마을이다. 거리도 꽤 떨어져 있어서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바라보는 것과는 또 다른 감흥을 느낄 수 있다. 버스로 약 20분 정도 가야 하지만 피렌체 시내와는 달리 매우 조용하고 한적하다. 그래서 일정에 크게 쫓기지 않는 여행자
르네상스의 시작 중세의 작은 틈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철학과 문화에 대한 재발견이자 근대로 가는 인류의 큰 발걸음이었다. 이런 르네상스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여기에는 미술, 종교, 철학, 경제, 정치, 역사 등 그 분야만큼이나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그만큼 르네상스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발생했다. 그 요인들 중에서도 우리가 잘 인식하지 못했던 몇 가지를 살펴보자.르네상스 최초의 천재, 단테단테(Durante degli Alighieri, 1265-1321)는 르네상스 최초의 천재라고
단체 관람 영화 정하기나는 한 기업에서 교육담당자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년 신입사원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인원은 다소 줄었지만, 올해 초에도 어김없이 30여명의 신입사원이 들어왔습니다.합숙 교육 2주 이후, 다시 2주 간의 기술교육으로 이어지는 다소 빡빡한 일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교육 중간에 교육생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기 위한 문화행사가 있습니다. 문화행사라고 해봐야 평일 오후에 일찍 나가 영화 한편 보고 고기에 소주 한잔 먹는 일정이지만, 많은 교육생들은 그 순간을 손꼽아 기다리곤 합니다.문제는 단체 관람할 영화를 정하는 것입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인원들이 모이다 보니, 영화 한 편 정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이 때 제일 만만한 방법이 바로 투표입니다. 이번에도 신입사
오늘은 주제가 좀 뜬금없다. 산학협력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나는 학부에서는 교육공학을 전공했고, 대학원에서는 인력개발(기업교육)로 학위를 땄다. 그리고 현재 기업 내 교육담당자로서 인사팀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가끔씩 각종 학교 관계자들이 산학협력을 제안하며 만나길 원하는 경우를 보기도 했다.요즘은 대부분의 학교들이 취업률을 높이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다보니 회사에 적합한 인재를 길러내기 위한 산학협력을 확대하려는 노력 역시 게을리 할 수 없다. 기업 입장에서도 특정 기업에 특화된 교과목으로 적합한 인재를 육성해주겠다는데
몇년 전, 설인지 추석인지 명절 연휴 직후였다. 어김없이 지하실에 모여 술잔을 기울일 때였다.리더(정길진)가 명절 때 이야기를 꺼냈다."명절 때, 안동 본가에 갔었거든. 밥을 먹는데 우리 엄마 김치가 너무 맛있는 거야. 그래서 김치통에다가 머리 처박고 막 먹고 있었는데, 와이프가 좀 섭섭해 하는 거라. 맨날 자기가 해주는 음식이 제일 맛있다고 했으면서 결국 엄마 김치보다 못했나 보다 그러면서....""근데 형님 나중에 형님 아들도 결혼해서 집에 오면 형수님 음식이 제일 맛있다고 하지 않을까요?""그지? 결국 다 똑같아 지겠지?""그렇죠. 형수님도 진짜 화가 났다기 보다는 순간 약간 섭섭해서 그런 걸 거에요.
살다보면 내가 누구인지를 매번, 그것도 있어보이게 포장해야 되는 경우가 많다. 참 피곤한 일이다.2011년 5월 살인배추가 결성됐다. 그리고 우리는 구미 예스락페스티벌을 준비했다.당시 예스락 페스티벌은 지역 인디밴드들에게는 가장 큰 무대이면서 관객들과 만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그러다보니 구미지역 밴드들은 이 페스티벌이 일년 중 가장 중요한 공연이기도 했다. 우리 역시 이를 준비하기 위해 참가 지원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그런데 참가 지원서 항목을 보고 우리는 당황했다.지원서에는 밴드 소속 멤버들의 개인 신상을 적게 되어 있었는데, 거기에 각자의 직장을 적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밴드가 지향하는 음악 장르나 성격 등에 대한 건 한 줄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멤버들의 직장과 주소를
제목이 참 거창하다. 우리라고 맨날 뻘소리만 할 수 있겠는가? 가끔 이런 얘기도 좀 해야 있어보이기도 하고... 흠흠... 요즘은 좀 덜하지만, 몇년 전만 해도 명절 때 어른들이 모이면 정치얘기가 빠지지 않았다. 지역이 지역이니 만큼, 모든 야권은 '반국가 빨갱이'로 여론이 형성되었다. 그러다가 나름 집안에서 가장 가방끈이 길고 그나마 제대로 인간구실(안타깝지만, 우리 집안 어른들도 대기업 직원이나 공무원이면 최고로 여기신다.)한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니는 국가가 먼저가, 개인이 먼저가?'영화 국제시장 이후 이런 질문은 다양한 형태로 시도 때도 없이 대화의 주제가 되었다. 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당연히 국가가 먼저지요.’어른들은 만족해하시며, 아직 학생이거나 본인
언어는 가장 강력한 의사소통 수단 중 하나이다. 그러나 같은 단어를 말하면서도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 의사소통이 상당히 복잡해 질 때가 있다. 기업에서 HRD(Human Resource Development, 인적자원개발)를 담당하다보면 경영진과의 의사소통 과정에서 이런 경우가 종종 있다. 대표적으로 ‘리더십(Leadership)’이란 단어에 대해 나와 상대방이 생각하는 의미가 달라 대화가 공회전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참 많은 곳에서 리더십이란 말을 쓴다. 대통령을 포함한 국가기관에서부터 회사와 학교는 물론, 가정과 친구 관계까지도 리더십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과연 리더십이란 무엇일까? 리더십이란 단어만큼 분야에 상관없이 광범위하게 쓰이면서 각자 생각하는 정의가 다 다른 경우도 드물 것
올해 초 우리 회사에 들어온 신입사원들을 보면서 문든 작년에 나에게 취업관련 조언을 구하던 네가 생각나더구나. 학번 차이가 많이 나서 같이 학교를 다니기는 커녕 얼굴도 제대로 본 적 없던 네가 연락을 해왔을 때 주제넘게 몇 마디 조언이랍시고 던졌던 게 생각난다. 취업이 어떻게 됐냐는 내 물음에 작년에 이어 올해도 취업에 실패했다고 했지. 어떤 회사에서는 남자를 원한다는 면접관의 말에 발길을 돌렸다는 얘기를 할 때는 너의 허탈함이 전해오는 듯 하더라. 남자를 원한다면서 그 먼 길을 달려오게 한 건 무슨 심보였는지 나도 살짝 부아가 치밀었다. 지방대 출신이라는 사실만으로도 힘든데 거기다 본인이 선택할 수 없는 성별까지도 중요한 스펙이 되는가 보다."남자 원한다"에 발길 돌려야 했던 너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