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대가 저문 뒤 말 많던 도쿄 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본래 2020년 예정되었던 올림픽은 코로나19 창궐로 1년 연기를 겪은 후 결국 무산될 것으로 점쳐졌지만, 워낙 걸린 게 많은 IOC와 일본 정부의 강력한 의지로 결국 무 관객으로 치러졌다. 코로나19 비상사태 확산에도 큰 사건 사고는 (다행히) 없었지만, 일본의 정치적 편의를 봐준 부분이 적지 않아 꽤나 논란이 남았다.히로시마 피폭 헌화나 한국과 중국의 국민 정서를 자극하는 욱일기 도안의 은근슬쩍 사용 등이 행사 기간에 일어났고, 이는 IOC가 기존에 고수하던 정치와의 분
1_‘스파이’란 존재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초기 대표작 에서 “언어의 한계가 곧 세계(관)의 한계”라는 명언을 남겼다. 어떤 존재에 대해 어떤 이름으로 부르느냐는 그만큼 중요한 문제다. 인류 역사와 함께한 집단 간 전쟁에서 상대국의 정보를 빼내오는 임무는 중시되었고 이를 행하는 이들은 자국에선 애국자이자 영웅으로, 적국에선 간첩이나 스파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정체가 들통 나면 이들이 겪게 될 위험은 어마어마했다. 혈연이나 인맥으로 이어진 의리, 국가에 대한 충성, 성과에 포상으로 주어질 부와 명예에
소율이에게겨울은 겨울이구나. 영하 15도라니 대단한 날씨다. 바깥에서 일을 하니 손, 발이 얼어붙어 움직이지 않는다. 하늘에는 눈이 펄펄 내리고 찬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작년에 보지 못한 눈을 구경하니,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역시 겨울은 눈 구경만 한 게 없다.겨울이면 눈썰매를 타러 다녔어. 지금처럼 놀이동산에 가서 타는 게 아니라, 들판과 산속을 들개들처럼 헤집고 다니며 타는 거지. 거북선이 근사하게 그려진 비료 포대를 들고, 눈이 가득 내린 산이나, 못 둑에 올라섰어. 칼바람이 볼을 때리고 머리칼 속에서 이마로 땀이 흘러내렸어
소율아!하늘에 솔잎을 던져 놓은 것처럼 잠자리가 수북이 날아다닌다. 완연한 가을이다.가을비가 내리고 들판의 콩잎들이 노랗다 못해 투명하게 물이 들면 아이들은 메뚜기를 잡았어. 투명한 유리병을 허리춤에 하나씩 차고 저금통에 정성 들여 저금하듯 꼬깃꼬깃 잡아넣었지.한 병이 꽉 차면 의기양양 집으로 들고 가 어머니께 자랑했어. 참기름에 볶아 소금을 치면 고소하고 맛있는 밥반찬이 되었지. 반찬 하려고 잡기도 했지만 심심해서였어. 손이 근질근질해서 참을 수가 없었어. 손에 잡히는 대로 장난을 쳐야 했지.메뚜기, 방아깨비, 여치, 귀뚜라미,
소율아!언제 무더운 여름이었냐는 듯 아침저녁으로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분다. 귀뚜라미가 소리 내 울고, 매미 소리는 언제부턴가 들리지 않는구나. 가을이 왔어.개구쟁이 꼬마들은 늘 심심했어. 오늘은 또 무엇을 하며 놀까. 또 누구 집에 가서 놀까. 종일,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놀까 하는 생각뿐이었지.목욕탕과 이발소, 자장면 가게가 있었던 동네 중심지에 친구가 살았어. 제법 큰 골목길에서 바로 들어갈 수 있었던 집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주인집과 일곱 가구가 화장실 하나를 같이 썼던 셋방살이였던 것 같아.작은 대문으로 들어가면 큰 마당
소율아!장마를 뚫고 찾아온 무더운 여름이다. 더운 여름 건강히 잘 지내고 있어? 얼굴 본 지도 꽤 오래되었구나. 이번 휴가 때는 시원한 계곡으로 물놀이 가자!여름이면 친구들과 동네 도랑에서 늘 물놀이를 했어. 길가에 굴러다니는 스티로폼 조각을 송편 빚듯 이리저리 돌려 만지고 나뭇가지를 하나 꺾어 꽂으면 돛단배가 만들어져. 거기에 근사한 이름을 붙이면 별다른 것이 없어도 해가 질 때까지 종일 신나게 놀 수 있었지.뱃놀이도 슬슬 지겨워지면 골목길 끄트머리에, 항상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가 앉아 있는 ‘국자’ 가게로 달려갔어. 달고나
1. ‘옛날 옛적 혁명의 시대’일본의 19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는 한국의 1987~1991년에 비견된다. 전 세계를 뒤흔든 1968년 전후의 ‘68혁명’ 시기에 막 경제부흥을 이룬 일본 또한 내재된 사회불안이 폭발했고 ‘전공투’(전학공투회의)로 대표되는 일본학생운동의 전성기를 통과한다. 전공투 출신 중 다수가 대학 졸업 후 기성세대에 편입되지만 여전히 상당수는 지속적으로 ‘신좌파’ 운동을 이어간다. 하지만 1970년대 초반 ‘산악 베이스 사건’과 ‘아사마 산장 사건’ 등으로 사회적 지탄과 함께 축소된다. 이런 일본 신좌파 운
소율이에게 코로나19.무슨 외계행성처럼 낯선 단어가 공포를 몰고 다닌다.소율이도 개학이 늦어져 아직 집에 있지?어린이집도 폐쇄돼 삼촌도 육아 격리 중이다. 빨리 일상으로 돌아가 봄날을 즐기고 싶다. 그리고 이렇게 지겨운 생활에 아득한 유년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 본다.기억이 안 나던 것도 기억이 나구나.턱에 총상 자국이 선명하고 이북 사투리가 심한 옆집 ‘기도원’ 원장 할아버지 눈은 회색빛이었어. 한국전쟁 때 인민군을 피해 내려왔다는데, 모든 재산을 다 두고 왔다며 북에 대한 분노가 가득했지. 눈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멀리 떨어
소율에게올해도 벌써 한 달이 지났구나. 날씨까지 따뜻하니 농사짓는 농부의 마음이 더 바쁘다. 이대로 봄을 맞이하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된다. 겨울이 추워야 병해충도 덜하고 농사가 잘 되는데, 설이 지난 지금까지 눈이라곤 한 톨 내리지 않고, 비가 내리다니. 농사도 농사인데 그것보다 첫눈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더 크다. 펑펑 쏟아지는 눈 속을 달리며 얼굴에 달라붙는 수박씨 같은 눈을 느끼고 싶다.이번 설에 할아버지 집에 온 네 모습을 보니, 훌쩍 큰 것 같아 삼촌 기분이 좋더구나. 씩씩하게 동생들을 챙기는 모습이 기특하기도 하고. 세뱃
소율이에게 벌써 2019년이 저물어 간다. 얼마 전에 한 해를 시작한 것 같은데, 며칠 뒤면 2020년이라니. 마흔이라니. 시간은 쏜 화살처럼 소리도 없이 빨리 가네.송년회를 한다고 반가운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니 시간이 훌쩍 갔어. 어둑어둑 일찍 해가 기울고 안개가 깔리더니,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12월 마지막 날에 눈이 아니라 비가 내리다니. 존재를 잊어버린 겨울인지, 한 해가 아쉬운 투정인지.삼촌이 어릴 적 초등학교 때, 겨울 방학식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날 한밤이었어. 소변이 마려워
아침으로는 제법 날씨가 쌀쌀해 입에서 하얀 김이 나와. 올 한 해도 두 달밖에 남지 않았다 생각을 하니 마음이 급해져.소율아 잘 지내고 있지? 황금빛으로 물든 농촌 들녘으로 농민들은 추수하느라 여념이 없어. 태풍으로 나락이 넘어간 논들 사이로 부지런히 콤바인이 움직이며 추수를 하고 있어. 콤바인이 벼의 이삭을 떨어내고 논바닥에 볏짚을 남겨놓으면 트랙터가 볏짚을 공룡 알처럼 말아 놓아. 추수가 끝난 논에서 흔히 보았던, 흰 비닐로 감싼 공룡 알처럼 생긴 것이 바로 소여물로 쓰이는 볏짚 뭉치야.콤바인이나 트랙터가 없던 시절에는 추수가
1. 오욕의 시대를 지나 초강대국으로 부활하는 중국중국과 우리는 지난 수천 년 동안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 때로는 침략자로, 때로는 “중화”에 대한 ‘사대’의 대상으로 숭앙될 만큼 그 관계는 복합적이고 다면적이다. 한제국 VS 고조선, 수ㆍ당제국 VS 고구려(&신라), 요ㆍ금ㆍ원 유목제국 VS 고려, 청제국 VS 조선에 이르기까지 지난한 항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전근대 역사에선 주로 ‘대국’으로 떠받들어주며 당대의 국제무역인 ‘조공체제’(당대 중국의 조공은 대부분 오히려 중국이 적자를 보는 구조였음)를 유지하며 실리를 취해온
차가운 밤기운이 봄바람으로 바뀌고, 특유의 봄 내음이 좋은 요즘이야. 삼촌이 어릴 적 초등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는 하굣길에 친구들과 놀던 개울가에는 작은 웅덩이가 있었는데, 봄이면 햇살에 물이 데워져서 손을 넣으면 뜨뜻미지근한 것이 차갑지 않아 기분이 좋았어. 웅덩이 속에는 개구리 알이며, 올챙이며, 송사리 같은 것들이 가득 있었는데, 올챙이 옮기기 놀이가 아주 재밌었단다. 올챙이 등을 빨대로 살짝 빨아, 빨대 아래에 붙여 반대쪽 깡통으로 옮겨 담는 놀이였어. 친구들과 이 놀이를 할 때면 주먹이며 이마에 땀이 맺혔어. 긴장을 놓쳐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 매국을 하면 3대가 떵떵거리고 산다.”이는 우리 근대사의 상처를 환기해 주는,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은 우리 사회의 속설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이 해묵은 상처를 헤집는 현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의 대부분은 그 연원을 거슬러 오르면 친일 부역의 역사를 만나게 된다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을 만큼.정치인들 가운데서도 친일파 출신의 선친이나 조부 덕분에 논란이 된 이들도 적지 않다. 가까이는 2015년, 선친인 김용주 전 전남방직 회장의 평전을 냈다가 해묵은 친일 논란에 휩싸인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현 바른정당)가 있다. 기득권층의 연원, 친일 부역의 역사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밝힌 김용주의 친일 행적에 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