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세계에 소속돼 있어요. 필요한 만큼, 그리고 분리돼 있어요.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만큼.” p85 나이 듦은 아프고, 돈 없고 외로울 미래다. 노년의 솔로는 ‘고독사’로 연결되고 언론은 재난처럼 보도한다. 혼자를 선택한 사람들의 나이 듦을 고독과 빈곤으로 일반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를 선택하는 솔로, 1인 가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2021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전체 가구 중 1인 가구 비율은 33.4%를 차지했다.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정상가족’이라 불리는 3인 가구(29.3%)보다 많다. 2022년 서울시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필수적으로 사회를 구성해야 하며, 사회를 구성해나가는 행위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정치일 것이다. 정치 하나로 인해 우리의 먹거리, 주거, 삶의 안정이 결정된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내건 공약은 ‘여성가족부 폐지’이다. 이 결정이 많은 여성의 삶을 뒤흔들고 있다. 달팽이 트리뷴 기자들은 정치가 우리의 삶과 얼마나 연결되어 있고, 여성으로서 내가 얼마나 정치에 영향을 받는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백래시 속에 있는 지금김고라니(이하 라니)는 ‘여가부 폐지’가 일어난 지금 시점이 ‘백래
1. 수면 아래에서 드러나기 시작한 ‘거대한 변환’ 통계청에서 발간한 ‘2020 통계로 보는 1인 가구 보고서’에 의하면 2019년 기준 1인 가구 비중은 전체 가구의 30.2%에 달한다. 10가구 중 3가구가 1인 가구인 셈이고 전체 가구 구성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 가족’의 형태, 4인 가구는 2위로 밀려났으며 2인 가구의 비율도 만만찮게 늘어나는 중이라 한 세대 뒤에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 모델이 병립하는 사회로 들어설 게 명백한 상황이다. 하지만 언제나 변화는 수면 아래에서 우리가 인지하지
‘정인아 미안해’. 학대로 죽은 아이를 살려내라며 울부짖는 사람들의 모습이 의아함을 자아낸다. 이 사회가 이토록 아이들을 끔찍이 위하는 곳이었던가. 그런 곳에서 아동 학대는 왜 숨 쉬듯 일어나는 것인지. ‘아직 죽지 않은’ 아이들의 고통에는 더할 나위 없이 무심한 사회가 죽은 아이에게 보내는 통곡은 어쩐지 네크로필리의 냄새가 난다. 극단적이고 예외적인 경우만을 지칭하는 학대의 개념은 정상적인 삶의 방식으로 자리 잡은 만연한 학대를 보지 못하게 만들고 그것이 학대가 아니라는 착각을 일으킨다.고등학생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는 대학
2년 전 그곳. 초여름 바람이 선선하게 불던 날이었다. 하얀 천막 위로 포근한 햇살이 내려앉았다. 돗자리에는 김밥과 빵, 커피가 여기저기 놓여 있었고, 주위에는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천막 바깥으로는 연녹색의 나무들과 뭉게구름 몇 점이 보였다. 잠시 눈을 감으면 마치 소풍에 온 것만 같았다. 눈을 뜨고 천막 앞에 놓인 글자들을 읽기 전까지는 정말 그랬다. “부당징계 반대한다”, “징계 이후 한동대는 깨끗해졌습니까?”, “학교는 헌법 위에 있는가. 헌정 질서 준수하라”, “폴리아모리를 이유로 내쫓을 수
걔 학교 잘렸대. 폴리아모리인가 뭔가 그거 때문이라던데? 나도 잘 모르는데 여럿이 사귀는 거래. 애인이 자기 말고 다른 애인을 한 명 더 사귀고, 셋이 같이 산다나. 말이 되냐? 그게 그룹섹스지 뭐야. 애인 둘 끼고 있는 여자도 웃긴데 그걸 용납하는 새낀 무슨 생각이냐 대체. 애인이 다른 새끼랑 자면 질투도 안 나나. 우리 교회 목사님은 난교라고 하던데 딱 맞는 말 아니냐. 사실 그냥 바람이나 난교라고 하기 부끄러우니까 괜한 이름 붙여서 면죄부 받으려는 거지. 폴리아모리는 무슨. 아무리 포장해봤자 똥이 꽃으로 변하냐. 더러워.그 새
“너도 그 뭐 성소수자, 그거냐?” 아빠가 물었다. 마치 밥은 먹었냐고 묻듯이 가볍게. 아빠는 경상도에서 나고 자란 ‘베이비부머’ 세대의 60대 남성, 한나라당과 새누리당을 거쳐 국민의힘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정당을 지지하며 오랫동안 대형교회에 다니던 사람이다. 평소 ‘잘 지내고 있냐, 졸업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가냐, 미래 계획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주로 하던 아빠는 비슷한 뉘앙스로 내가 성소수자인지 물었다. 그때 아빠의 질문과 나의 대답 사이에 흐른 찰나의 순간이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기억이 될 거라는 걸, 나는 직감했다.재작년
2월 20일부터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시작되었다. 3월과 4월, 밖은 위험했다. 갑자기 시간들이 집안에 갇혀 뒹굴었다. 여러 날 밤을 새우며 드라마와 영화를 눈이 빠지게 봤다. 아, 이 얼마나 기다리던 시간이냐! 이렇게 늘어져 있는 것이…. 눈이 휑해지고 허리가 아프도록, 그간 보고 싶었으나 읽지 못했던 소설을 꺼냈다, 이 시절에 떠올림 직한 소설 와 을. 그리고 17살에 내 영혼에 접속했던 만화책 . 10년 전쯤 동네 비디오 가게가 문을 닫을 때 마흔아홉 권 전집을 샀으나 읽지 못한 채, 구석에서
명절이 괴로운 청년 세대들음력설과 함께 한 해의 양대 명절인 추석이 곧 다가온다. 하지만 올해 구정을 넘기자마자 창궐한 코로나19의 여파로 근래 보기 드물게 사람들의 이동이 적은 명절이 될 듯하다. 용돈만 보내라는 전갈이 시작되고, 코로나 이후 온라인을 이용한 택배는 오히려 늘어가니 사람 대신 금전과 재화만 오가는 명절이 될 것도 같다.코로나19 때문에 사회적 거리두기가 이어지며 고립으로 인한 피로를 호소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추석 귀성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었음을 반기는 속내도 젊은 층에서는 만만치 않다.
“증인, 선서하세요.”“선서. 양심에 따라 숨기거나 보태지 아니하고 사실 그대로 말하며, 만일 거짓말을 하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 작년 여름, 포항 법원 제1호 법정. 나는 형사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내 왼편에는 검사가, 오른편 피고인석에는 한동대 학생처장이 앉아 있었다. 죄명은 명예훼손. 학생처장이 나의 실명과 함께 나에 대한 모욕적인 발언이 담긴 문자를 교회에 퍼뜨렸기 때문이다. 새삼 피고인석에 “국민”으로서 앉아 있는 학생처장의 모습이 묘하게 다가왔다. 2년 전, “국민으로서 얘기하려면 학교 밖에서 해!”라고
포항에는 나의 20대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대학교 입학 후 학기 중은 물론 방학을 해도, 휴학을 해도 나는 포항에서 지냈다. 무기정학이 아니었다면, 아마 서른 살도 포항 바다 앞에서 맞이했을 확률이 높다. 비록 월세였지만 하나둘 살림을 꾸린 나만의 원룸이 좋았고, 집 근처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좋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오밀조밀 모여 사는 동네가 좋았다. 포항 토박이도 잘 모르는 나만의 히든 플레이스도 몇 군데 있었다. 인적 드문 바닷가라던가, 구석에 숨겨진 호수 산책로라던가, 잘 알려지지 않은 맛집 같은 곳들.징계 무효 확인 재판
한동대 징계무효 확인소송의 마지막 변론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택시에 타자마자 함께 사는 식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제 재판 끝나서 기차 타러 포항역 가고 있어요.” 오늘 재판이 어땠는지, 상대가 어떤 변론을 했는지, 그것이 얼마나 이상했는지, 그래서 어떻게 반박을 했는지, 그럼에도 무엇이 우려되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통화가 끝나자, 묵묵히 운전을 하던 기사님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법, 뭐 이런 일 하시나 봐요.” “아, 제가 일하는 건 아니고요. 다니던 대학에서 2년 전에 부당징계를 당해서 징계
“우스갯소리지만… 어떻게 하면 학교에서 그렇게 징계를 받을 수 있어요?”“아, 모르시는군요? 제가 만든 명언인데… 노력 없이 징계 없다! 노오~력을 해야죠.” 지난달, 한동대와 장신대의 부당징계 당사자들이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나온 말이다. ‘당사자 개그’라는 게 있다면 아마 이런 식일 거다. 일곱 명의 ‘쫓겨난 사람들’이 모여 각자가 경험한 부당징계 사건을 나누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헐 그 학교도 그랬어요? 저희 학교가 제일 문제인 줄 알았는데.”“징계 과정도 지난하고 아팠지만, 징계 이후의 삶도 확 달라졌어요. 앞으로 뭐를
올해 초, 한동대에 ‘반기문 글로벌 교육원’이 지어졌다. 84억 원이 투입된 건물은 1,300평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개원식에서 한동대 총장은 말했다. “반기문 글로벌교육원을 통해 이웃의 필요에 관심을 가지고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인재를 양성하고자 합니다.” 반기문 교육원의 핵심 가치 중에는 ‘극심한 빈부 격차 및 불평등 해결’이 있다. 교육원이 지어진 한동대가 동성애자 ‘이웃’을 ‘반대’한다고 선언하고, 페미니즘 강연을 열었다고 학생을 무기정학 시킨 학교라는 점만 빼면 훌륭한 말들이다. 한 가지
A: 남자 연예인 볼 때 멋지다거나 섹시하다고 느낀 사람 누구 있어?나: 공유? 유지태?A: 그 사람들 볼 때 감정이 어때?나: 음… 모르겠어. 동경?A: 그 감정에 확신이 있어? 혹시 네가 그 사람들 보면서 남자라는 성별을 인식하는 순간, 어떤 감정의 굴절이 생겨서 호감을 동경이나 선망으로 바꾸는 거면?나: 응?A: 그럴 수도 있다고. 아니면 말고. 한 번 생각해봐. 유학에서 돌아와 오랜만에 만난 A의 질문에 나는 잠시 당황했다. 이어서 A는 말했다.“난 남자랑 여자 모두에게 끌려. 바이섹슈얼이라고 하더라. 일본 가서 알았어. 한
정관 수술을 처음 결심한 건 20대 후반의 어느 봄이었다. 근처 비뇨기과에 전화를 걸었다. “정관 수술 예약 가능한가요?” “네, 근데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대뜸 나이를 묻는 상황이 이상했지만, 별생각 없이 답했다. “아… 근데 20대는 좀 곤란한데, 혹시 결혼하셨어요?” 하지 않았다고 말하니, ‘그럼 곤란하다. 다른 병원도 마찬가지일 거다’라는 답이 돌아왔다.따질 생각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정관 수술을 받는데 나이나 결혼 여부가 대체 왜 필요할까. 검색을 해보니 여러 증언이 나왔다. 어리면 안 해준다, 미혼은 안 해준다, 자녀
“피고 학교법인 한동대학교와 피고 OOO은 공동하여 원고에게 500만 원을 지급하라” 열 달 동안 진행된 소송의 최종 판결이 이뤄진 시간은 채 5분도 되지 않았다. 미처 내용을 파악할 새도 없이 이뤄진 선고에 어리둥절했지만, 결과는 일부 승소였다. 사건의 시작은 재작년 12월, 페미니즘 강연을 주최했다는 이유와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한동대는 나를 징계했다. 졸업을 1년 앞둔 무기정학 처분이었다. 교수와 목사들은 집단적으로 나에 대한 비방을 시작했다. 내가 맺는 관계와 사생활을 악의적으로 폭로(아웃팅)하고, 나를 “암세포”와 “곰팡이”
상대측 변호사가 변론을 시작했다. “재판부는 성소수자, 성적 지향, 성 정체성 이런 말 들어보셨습니까. 저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입니다. 저는 진짜 성적 지향이 무슨 학교 성적인 줄 알았습니다.” “성적 지향에 따라 차별해도 된다고, 차별해야 한다고 말한 거, 그거 제가 한 말입니다. (웃음) 그럼 안 됩니까. 남녀를 기본으로 하는 대한민국에서 성 정체성이 서른 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럼 배우자가 서른 명이 넘는 건가요. 이게 대한민국에서 도저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장장 8개월간 이어진 소송의 마지막 날이었다. 상대는 한동
1. ‘영화제란 무엇인가’ 탐구생활시간 대구경북지역은 타 시도에 비해 영화제가 많지 않은 편입니다. 현재 외부에도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고 자체적으로 굴러간다고 평가되는 영화제는 이번 8월에 20주년을 맞는 “대구단편영화제”와 10주년을 맞이하는 “대구사회복지영화제”, 그리고 “대구여성영화제” 정도입니다. “영화제”라 이름붙인 행사는 숱하게 생겨났다 사라지지만 객관적 기준으로 영화제로 공인되기는 어려운 행사가 많은 편이라 좀 까칠하게 분류하면 이 영화제들이 거의 전부입니다.우리는 흔히 영화제라 하면, 해외로 눈을 돌려보면 이른바 ‘
날카로운 목소리가 A를 향했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너 여기가 어딘 줄 알아? 알고 온 거야? 말해봐!” 자신을 A의 가족이라고 밝힌 두 사람은 A의 휠체어를 잡으며 꽥 소리를 질렀다. 이내 그 목소리는 옆에 있는 우리를 향했다. “당신들 뭐야. 왜 장애인을 이용해!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애 데리고 뭐 하는 짓이야? 장애인이 뭘 알고 여기 왔겠어! 니들이 얘 인생 책임질 거야?” 주변 사람들이 그들을 진정시키며 대화를 시도해봤지만, 그들은 기어코 A를 대열에서 이탈시켰다. 지난 3월 14일, 포항 법원 앞에서 경북 시민단체들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