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된 주먹다짐은 중학교 2학년 때가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로 한 번도 안 했다가 40을 전후하던 때, 오랜 친구 놈이랑 서로의 안경이 날아가는 펀치가 한 방씩 오갔다. 그만큼 40이라는 숫자는 뜻 깊었던 같다. 오래된 오해의 골이 터진 셈이었다. 조그맣게 남아있던 오랜 억하심정의 해소와 다른 방식으로의 삶의 전환이라는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그날 이후로 친구와 나는 묘하게 그 전과 달라졌다. 그 친구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와 나의 삶이 기뻐만 하기에도 모자라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이런 것은 오랜 친구의 좋은 점이다. 아무 것도 평가하지 않고 아무 것도 비판하지 않는다. 변화가 있다면 있는 그대로의 변화를 인정하고 이해한다. 박근혜가 아름답대도 이해하고, 새누리당 좋다 해도 토 달
1980년 오늘(4월 21일) 오후 2시께, 국내 최대의 민영탄광인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의 동원탄좌 사북광업소에서 탄광 노동자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70년대 정부의 노동3권 탄압 등으로 인한 기본권 제약에다 저임금과 어용노조에 대한 누적된 불만이 마침내 폭발한 것이었다. 이후 유혈사태까지 초래한 이 ‘사북노동항쟁’은 회사와 유착된 어용노조의 지부장이 회사의 요구대로 소폭의 임금인상을 결정하자 분노한 노동자들이 지부장의 사퇴를 촉구하면서 시작되었다. '노동귀족, 노조지부장은 물러나라!'4월 19일, 30여 명의 노동자들은 노조 사무실을 방문하여 ‘노동귀족, 노조 지부장은 물러나라고 요구하고 지부장이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하기에 이르렀다. 노동자 한 명이 연
만화가 김수박 / 뉴스풀협동조합 조합원 / [아날로그맨], [오늘까지만 사랑해], [내가 살던 용산](공저), [삼성에 없는 단 한 가지 : 사람 냄새], [만화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출간
엘리엇이 4월을 왜 잔인한 달이라 그랬을까 생각해보다가 스무 살에 4월을 보내곤 내 맘대로 내린 결론이 있었다.3월... 따뜻한 바람이 불 때부터 남몰래 키워온 그녀들이나, 그들을 향한 수많은 마음들이 4월의 봄나들이에서 고백으로 이어지더란 말이다.그러나 거절당한 고백들... 그러니까 산수계산만 해 보아도 그 수많은 마음들에 비하자면 이어진 결실은 그 중 몇에 불과했다. 그러고 보니 4월엔 나를 포함한 사랑의 패배자들이 넘쳐나더라. 엘리엇을 맘대로 빌려(물론 그의 시에서 4월이 잔인한 이유는 이것이 아닐 것이다.)에라이, 잔인한 달이라고 뇌까리며 우르르 모여서 소주를 들이켰다. 햇볕은 눈부시고 꽃은 또 왜 그렇게 흐드러지게 피는 건가, 잔인하게스리.나도 그 담배 한 대 피워보자며
1953년 4월 1일, 장준하(1918~1975)는 피난 수도 부산에서 월간 종합잡지 를 창간했다. 장준하는 당초 1952년 8월, 당시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연구원(원장 백낙준)의 기관지였던 을 단독 인수하여 본격 종합 교양지를 발행하게 된 것이었다. 은 6·25전쟁 중 국민사상의 통일, 자유민주주의의 확립 및 반공정신 앙양 등 전시하 지식인층의 사상운동을 주도하며 통권 4호까지 발행한 잡지였다. 연구원으로 잡지의 책임 편집을 맡고 있던 장준하가 이를 인수하여 로 제호를 바꾸어 창간하게 된 것이었다.독립 잡지 양심세력을 대변하다은 정부 기관지였지만 이를 바탕으로 창간된 는 백낙준과 장준하가 사재를 털어 만든 독립
한국문인협회가 친일 부역 문인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를 기리는 문학상을 제정하겠다고 나섰다가 여론의 몰매를 맞고 결국 뜻을 거두어들인 게 지난해 8월이다. 문협은 친일 경력에 대한 논란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지만 한국 근·현대문학을 선도한 두 문인의 문학적 업적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웠었다.[관련 글 : 춘원과 육당의 문학상 제정? 뜬금없고 생뚱맞다]당시 민족문제연구소는 육당과 춘원 문학상 제정을 ‘역사 퇴행의 막장 드라마’라며 규탄한 바 있었다. 그런데 이 막장 드라마는 주체가 바뀌어 계속 진행되고 있었음이 최근 밝혀졌다. 한 출판사가 지난해 12월에 이 두 사람을 기리는 상을 제정하여 시상까지 한 것으로 뒤늦게 드러난 것이다. 동서문화사가 제정한 제1회 육당학술상은 전성곤 중국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 상해에서 쓰러지다1894년 3월 28일 오전, 중국 상하이 미국 조계(租界) 안의 일본 여관 동화양행 2층의 객실에서 울린 세 발의 총탄이 한 사나이를 쓰러뜨렸고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자주 근대화를 통해 새로운 ‘근대 조선’을 꿈꾸었던 혁명가 고균(古筠)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은 그렇게 그 풍운의 삶을 마감했다. 향년 43세.10년 전 갑신정변(1884)으로 곤경에 처했던 민씨 척족(戚族)정권이 파견한 자객 홍종우(1850~?)의 총탄은 ‘근대 조선’의 길을 모색한 정객 한 명을 쓰러뜨린 데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봉건왕조 조선이 근대로 가는 길이 얼마나 험난한 것인지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김옥균은 1870년 전후부터 박규
1926년 오늘(3월 25일), 일본의 최고재판소인 대심원에서 대역죄로 기소된 조선인 아나키스트 박열(朴烈, 1902~1974)과 그의 일본인 부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1926)의 결심 공판이 열렸다. 정복과 사복 차림의 경찰 200여 명과 헌병 30명이 법정 출입자를 삼엄하게 검문하는 등 법원 안팎을 통제하고 있었다. 박열·가네코 부부, 대역죄로 사형을 선고받다재판장은 선고 전에 일어설 것은 명했지만 피고들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재판장은 형법 제73조 ‘대역(大逆)’죄와 폭발물단속벌칙 위반으로 이 부부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후미코는 벌떡 일어나 만세를 불렀고 박열도 “재판은 비열한 연극이다!”라고 외쳤다. 퇴정하는 판사를 향해 박열이 덧붙였다.“재판장! 자네도
아내의 발령지가 바뀌었다. 사는 집에서 차로 40분, 좀 밟으면 30분 걸리는 곳으로. 아내의 출퇴근이 부담스러운 상황. 고민 끝에 첫째와 둘째의 초등학교와 어린이집을 바뀐 곳으로 옮기고, 차 뒷자리를 방처럼 꾸미고는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다섯 달 동안 그렇게 했다(그 과정동안 이사 준비를). 아침잠 많은 나에게 매일 아침이 전쟁이었다.밥 차려 먹고, 애들 준비 시키고, 이 짐 저 짐 둘러메고, 아직 자는 둘째 둘러메고, 둘러메다보니 가끔 빠뜨리는 둘째 신발도 챙기고, 아내가 자주 빠뜨리는 안경 스마트폰 열쇠도 챙기고, 내가 가끔 빠뜨리는 아내도 챙기고 차를 출발시켰다.출발하고 나면 가족여행 기분이 났다. 아이들은 뒤에서 좀 놀다가 다시 잠들곤 했다. 아내 출근, 첫째 등교, 둘째 '등원'하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 매국을 하면 3대가 떵떵거리고 산다.”이는 우리 근대사의 상처를 환기해 주는,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은 우리 사회의 속설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이 해묵은 상처를 헤집는 현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의 대부분은 그 연원을 거슬러 오르면 친일 부역의 역사를 만나게 된다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을 만큼.정치인들 가운데서도 친일파 출신의 선친이나 조부 덕분에 논란이 된 이들도 적지 않다. 가까이는 2015년, 선친인 김용주 전 전남방직 회장의 평전을 냈다가 해묵은 친일 논란에 휩싸인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현 바른정당)가 있다. 기득권층의 연원, 친일 부역의 역사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밝힌 김용주의 친일 행적에 따
착한사람내가 보기엔...착한 사람의 눈에는,안착한 사람이 ‘착한 척’ 하는 게 잘 보이고,안착한 사람의 눈에는,착한 사람이 ‘착한 척 하는 사람’으로 보인다.그러니까 자기 자신한테 달려있다.내가 보기엔... 매일 새롭다첫째는 자기 다리를 아빠 다리에 척 올려놓으면 잘 잔다. 둘째는 아빠가 등을 솔솔 긁어주면 잘 잔다. 그래서 오늘도 이쪽에 오른쪽 다리를 내어주고, 저쪽에 왼손으로 솔솔 긁어 모두모두 꿈나라로 갔다. 나도 꿈나라로 가야겠다.요즘은 아침을 같이 맞이하고, 어두워지면 같이 하루를 마무리하는데 그 맛이 달콤하다. 얼마나 더 그러겠어... 그런 생각 가끔 하는데, 꼬맹이들 시절이 보기 좋고 고마울 따름이다. 아주 나중에는 지금을 떠올리며
그예 ‘박근혜 없는 봄’이 왔습니다.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시청하다가 헌법재판소장 대행 이정미 헌법재판관의, 감정이 실리지 않은 담담한 어조의 주문 선고를 듣는 순간,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같은 시간에 기쁨과 감격으로 겨워하며 환호한 이들은 전국에 또 얼마였겠습니까.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이 타오른 지 133일 만이었습니다. 박근혜가 파면됨으로써 그동안 열아홉 차례나 촛불을 밝힌 수고로움은 넉넉히 보상을 받았을 터입니다. 광장에서 새로운 민주주의를 창조해 낸 시민의 탄생은 박근혜 권력의 바탕이었던 ‘박정희 신화’의 퇴조로 봐도 무방할 듯합니다.그날, 후배 교사와 함께 선배 한 분을 모시고 가볍게 소주를 한잔 했습니다. 혹시 우리처럼 박근혜 파면을 자축하는 모임이 있나 살펴봤지만
내용을 입력하세요. 1944년 오늘(3월 13일), 민족해방운동가 김마리아(1891~1944) 가 해방을 1년여 앞두고 감기지 않는 눈을 감았다. 향년 52세. 두 차례의 투옥 중에 받은 고문 후유증이 그의 숨을 거두어 갔다. 여성교육이 전무했던 시절, 일본과 미국에서 공부하고 독신으로 독립운동과 민족 교육, 여권 신장을 위해 헌신한 이 담대한 여성은 수저 한 벌만 유품으로 남겼다.“일본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고문했는지, 물과 고춧가루를 코에 넣고 가마에 말아서 때리고 머리를 못 쓰게 해야 이런 운동을 안 한다고 시멘트 바닥에 구둣발로 머리를 차고… 그러나 내 정신은 똑똑해서 ‘너희가 할대로 다해라. 그러나 내 속에 품은 내 민족 내 나라 사랑하는 이 생명만은 너희가 못
‘대동세상’을 꿈꾼 동학교조 최제우, 형장에서 지다 내용을 입력하세요. 1864년 오늘(3월 10일) 오후 2시, 대구 남문 밖 아미산 아래 관덕당 뜰에서 동학의 교조 수운(水雲) 최제우(1824∼1864)가 참수되었다. 죄목은 ‘사도난정(邪道亂正)’, ‘서양의 요사한 가르침을 그대로 옮겨 이름만 동학으로 바꾸고 세상을 헷갈리게 하고 어지럽힌 죄’였다. 1860년 4월 깨달음을 얻고 동학의 가르침을 시작한 뒤 불과 4년 만에 그는 불꽃같은 삶을 형장에서 마감했다. 향년 40세. 1863년 12월에 체포되어 다리뼈가 부서지는 혹독한 고문을 이겨낸 뒤였다. 두 눈을 부릅
심판, 응징(1)심판! 같이 노력하는 곳에서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가 심판을 보기 시작한다. 노력하던 나머지 사람들이 몹시 곤란해진다. 심판 봐달라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같이 노력하는 곳에서는 자기 몫을 하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부부사이에도 이런 현상은 흔하다.응징! 전체에게 좋지 않게 될 것을 알면서도 반드시 상대를 응징해야 된다고 판단한다. 그 결과가 본인 개인에게도 손해라도 기꺼이 무릅쓴다. 구성원 모두가 이러한 개인적 정의를 따르면 전체가 망한다. 부부사이에 흔하다. ‘너만 돈쓰란 법 있냐? 나도 쓸란다.’ 심보(2)남이 기쁘면 즐거운 사람이 있고,남이 아프면 즐거운 사람이 있다.후자의 마음이 놀부 심보이겠는데, 그들은 자신의 심보가남에게 잘 보인
3·1만세운동은 특정 날짜로 이름이 붙긴 했지만 실제로 장장 두 달여에 걸쳐 전국 방방곡곡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이었다. 국내는 물론 만주 지역에까지 번져나간 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의 총 시위 횟수는 2천 회 이상, 참여자는 연인원 2백만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모든 계층'이 참여한 민족운동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에도 집회에 참여한 인원은 106만여 명이고, 그 중 사망자가 7,509명, 구속자는 4만 7천여 명이었다.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주도한 인물은 민족대표 33인이었지만 각 지역으로 확산된 만세시위 운동의 주력은 무명의 민중들이었다.3월 1일부터 4월 11일까지는 매일 10회 이상 시위가 일어났으며, 시위운동의 정점을 이룬 4월 1일에는 모두 67회의 시위가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