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어둠을 뚫고 한파가 몰아치는 이른 아침을 달려 나간다. 바로 오늘, 추위를 앞세운 내 주춤거림으로 기회를 잃고 싶지 않은 간절한 두 손이 운전대를 움켜쥔다. 그렇게 함께할 일행을 만났다. 우리는 전라북도를 향해 달린다. 지난밤 진눈깨비처럼 흩뿌려진 얕은 눈 쌓임이 듬성듬성 스친다.어느 순간에 가는 눈알갱이들이 천천히 춤추며 나풀거리더니 제법 굵은 소금알갱이로 보인다. 차창 밖으로 내민 손에 내려앉은 눈 결정은 제법 굵었다. 점점 우리는 속도를 낼 수 없게 되었다. 내내 눈들도 쌓이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새 백색의 들판으로
크리스마스이브나 크리스마스가 아닌 12월 23일이 기다려진 해는 처음일 것이다. 그날을 위해 며칠 전부터 테이블 주변을 치우고 박스 속에 숨어 있던 알전구를 꺼내 창문 커튼에 달았다. 케이크도 주문했다. 친구가 추천해 준 케이크 전문점이었는데, 프랑스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먹는다는 부쉬드 노엘이라는 케이크를 시즌 한정으로 판매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집에서 모임이라도 하는 줄 알겠다. 그것도 코로나가 창궐하는 이 시기에. 맞다. 모임이다. 독서모임. 그런데 우리 집에 모이는 건 아니다. 온라인 독서모임이다.몇 주 전, 북스
만화가 김수박 프로필주요 저서 〈아날로그맨〉, 〈내가 살던 용산(공저)〉, 〈삼성에 없는 단 한 가지-사람 냄새〉, 〈메이드 인 경상도〉, 만화 에세이 〈더 힘들어질 거야 더 강해질 거야 더 즐거울 거야〉, 〈아재라서書〉, 〈날라리 X세대의 IMF 이야기-타임캡슐〉, 〈나! 이봉창〉 외 다수.블로그 _ 김수박과 파편들 https://blog.naver.com/orpeo74
1. 젠트리피케이션 다음은?영화가 시작된다. 작지만 근사한 바에 가득 들어찬 손님들 앞에서 바텐더는 수수께끼를 낸다. “그 동네를 떠날 때가 됐다는 첫 번째 신호가 뭘까요?” 쉽게 답하지 못하는 청중들 앞에서 바텐더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한다. “빈티지 옷 가게가 생겼을 때죠.” 젊은이와 예술가들이 그 가게를 드나들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몰려들고 곧 임대료가 오를 것이란 이야기다. 그리되기 전에 얼른 떠날 궁리를 해야 한다는 우스개에 듣던 이들은 박장대소한다. 의 인상적인 도입부다. 그리고 카메라는 세계
애절하게 반짝이던 손톱달이 오늘 밤엔 상현달로 변했다. 목성도 황금빛을 발한다. 까만 밤하늘을 흔드는 창밖의 바람은 어둑어둑한 공간을 마구 휘휘 저어대고 있다. 공허해 보이는 흑색의 밤바람이다. 어둑한 가로등 불빛 아래 우두커니 선 뽀얀 전봇대는 지난 자작나무숲을 오버랩한다.멀리서 바라보는 가늘게 앙상진 자작나무 붉은 빛깔 숲 머리들이 빛바람을 타며 넘실거린다. 그건 넘치는 거품 가득한 하얀 파도를 일궈내는 모습과도 흡사하게 보인다. 줄줄이 이어지는 크고 작은 흰 기다란 막대들 말이다. 그렇다. 며칠을 집안에 묶여 있었으니 가슴이
소율아! 한 해의 끝이 벌써 다 지나가는구나. 일 년이 이렇게 빨리 가다니, 하루살이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세월이 아쉽다.이번 겨울에는 한 번도 오지 않은 작년의 첫눈을 기대해 본다.찬 바람이 불고 얼음이 어는 추운 겨울이 오면 아버지는 마구간에 있던, 사람만큼이나 귀했던 황소를 나뭇간으로 끌고 왔어. 나뭇간은 안방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창고 같은 곳인데, 안방 아궁이와 땔감들이 비와 눈에 젖지 않게 하는 역할을 했어.저녁이면 뜨거운 불이 활활 타고 있었고, 그 위에 얹은 까만 바둑알처럼 반들반들하게 닦인 무쇠솥에는 소 콧김처럼 구수
1. 데이비드 애튼버러는 누구인가 데이비드 애튼버러는 1926년 5월 8일(만 94세!) 영국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영국 레스터 대학 총장이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그는 2차 대전 종군 후 1952년에 영국 국영방송 BBC에 취업했다. 1950년대부터 자연 다큐멘터리 명가로 불리는 BBC 자연 다큐멘터리 제작부에서 근무했으며 영국에 컬러 티브이 방송을 처음 도입하는 업적을 남겼다. 그의 친형은 고전 명작의 반열에 오른 “머나먼 다리”, “간디” 등을 감독하고 “34번가의 기적” 등에서 배우로도 활약한 故 리처드 애튼버러다.
1. IMF와 게임 문화1997년 연말 외환위기는 국민소득 1만 달러 & OECD 가입으로 선진국 반열 등극이라는 천상에서 순식간에 한국을 IMF 구제금융을 지원받아야 하는 나락으로 추락시켰다. 불황이 닥쳤고 실업자가 쏟아졌다. 대학만 나오면 어찌어찌 취업에는 성공하던 호황기는 전설이 되었고, 재수 없이 시기 맞춰 전역하거나 졸업을 맞이한 대학생들은 상상 못 한 취업난에 빠졌다. 그 직전에 전국적 총파업으로 저지했던 노동악법은 IMF라는 미증유의 국난 속에 어물쩍 다 통과되었고, 그 결과로 정리해고와 명예퇴직이 기업들을 휩쓸었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 뒤편을 이제서야 이어봅니다. 에 나오는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조금 고쳐 들려주었어요. 그래서 아이들은 뒷간으로 가는 척하다가, 우물 옆에 있는 큰 소나무에 올라가서 가만히 숨어있었어. 아이들이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니까, 호랑이가 뒷간에 가봤지. 아무도 없는 거라.‘요것들 봐라! 도망가 봤자지! 끝까지 찾아내서 잡아먹겠다!!!’라고 중얼대면서 집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녀. (어흥 어흥 거리면서 돌아다니는 척을 하면 아이들이 좋아합니다^^)그러다 우물을 보니까, 우물물에
북스타그램을 하면서 새로운 작가들을 알아가는 재미가 크다. 책을 고를 때 작가도 매우 중요한 조건 중 하나니까. 평소 관심 있는 작가가 책을 내면 망설임 없이 집어 들게 된다. 반면 잘 모르는 작가의 책은 책의 제목과 목차, 그리고 무작위로 펼친 페이지의 글을 보고 나서야 관심이 생긴다. 그나마 오프라인 서점이면 가능한 일. 온라인 서점으로 책을 사려 할 땐 그마저도 들여다볼 수 없어 망설이는 시간이 길어진다. 북스타그램을 하기 전엔 더 심했다. 잘 모르는 작가의 책은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물론 그때는 책 자체를 거의 읽지 않을
1. Prologue _ 2019년 10월 부산에서 “에듀케이션”을 만나다코로나19 창궐로 전 세계 영화제가 파행을 겪기 몇 달 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에듀케이션”을 만났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겠지만, 국제영화제에서 흔히 만나볼 수 있는 영화를 통해 현재 우리가 사는 세계의 문제점들을 골고루 접할 수 있다. 특정 지역, 개별 국가의 비극도 있지만 좀 더 보편적인 지구적 쟁점을 동시적으로 접할 드문 기회다. 공통 쟁점에 관한 나라별·지역별 상황을 비교 분석할 수 있다. 책이나 다른 경로로는 닿기 힘든 기회다.부산국제영
1. ‘엘리트 문화’의 벽에 부딪힌 힐빌리 촌뜨기의 수난에팔레치아 산맥 중턱 시골에서 나고 자란, 속칭 ‘힐빌리’라 불리는 계층의 일원인 J.D.밴스는 열심히 공부해서 아이비리그에서도 하버드와 쌍벽을 이루는 명문 예일대 로스쿨에 진학했다. 학비를 벌기 위해 패스트푸드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여자친구와 간간이 통화하며 워싱턴의 유명 로펌이 주최하는 저녁식사 파티에 참석한 그는 중요한 게스트 옆자리에 앉는 데까지는 성공한다. 그러나 그에게 시련이 다가왔으니….웨이터가 와인을 권한다. 그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소율아!하늘에 솔잎을 던져 놓은 것처럼 잠자리가 수북이 날아다닌다. 완연한 가을이다.가을비가 내리고 들판의 콩잎들이 노랗다 못해 투명하게 물이 들면 아이들은 메뚜기를 잡았어. 투명한 유리병을 허리춤에 하나씩 차고 저금통에 정성 들여 저금하듯 꼬깃꼬깃 잡아넣었지.한 병이 꽉 차면 의기양양 집으로 들고 가 어머니께 자랑했어. 참기름에 볶아 소금을 치면 고소하고 맛있는 밥반찬이 되었지. 반찬 하려고 잡기도 했지만 심심해서였어. 손이 근질근질해서 참을 수가 없었어. 손에 잡히는 대로 장난을 쳐야 했지.메뚜기, 방아깨비, 여치, 귀뚜라미,
입동이 벌써 지났다. 두 주가 지난 그 숲은 아직 뾰족하고 가늘게 날카로운 초록잎들이 조심스레 나스락거리고 있었다. 그 틈 단풍나무의 붉은빛과 상수리나무의 진노랑빛은 가을 추억을 더욱 익어가게 한다. 그렇게 온통 하늘을 가리는 소나무들은 빛바랜 노란빛을 슬쩍 비친다. 그러다 스치는 바람에 엽록소를 버린 윤기조차 잃어버린 채 힘없이 매달린 바늘잎들이 스르르 떨군다. 또한, 매몰차게도 몰아치는 바람이 야속하기까지 할 수도. 이내 잎비로 쏟아져 내린다. 따끔거리며 내려앉더니 투박한 내 안경 위로도 걸쳐진다. 두 장의 소나무 잎이 말이다
1.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처음 접했을 때1995년 11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전태일 열사 25주기를 맞이해 개봉했다. 전태일 열사 기념사업회가 공동제작에 참여한 이 영화는 상업적 흥행과 평단의 호평을 거두며 그해 한국 영화 대표작 중 한편으로 회자되었다.사회적 소재로 노동 문제를 다룬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지만,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같은 위상을 가진 작품은 그 후로 25년 동안 등장한 적이 없었다. 대체 그 시절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그해 5월, 대구 경북대학교 대운동장에서는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북스타그램을 하다 보면 독립책방 계정을 만날 때가 종종 있다. 주로 책방 소개와 전경 사진 그리고 서점주인이 추천하는 책 소개가 올라오는데, 언젠가 그 지역으로 여행을 갈 수도 있고 요즘엔 택배 배송도 해주기 때문에 다소 먼 지역에 있는 책방이라도 마음에 드는 계정은 팔로잉한다. 그래서 그 전시 소식도 알게 되었다. 북스타그램을 하다가 팔로잉 해놓은 책방 중 한곳에 올라온 포스터. 모 지역 8개 독립책방에서 큐레이팅(Curating:다양한 콘텐츠를 카테고리별로 선별하여 전시하는 작업)한 책들을 한자리에 읽을 수 있는 전시였다.2주
1. 잭 런던과 그의 소설 이야기 잭 런던(Jack London, 1876~1916)은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가의 일원이다. , 등 지금은 고전에 반열에 오른 장편 소설과 , 같은 명작 단편을 남겼다. 원래 가난한 가정환경 때문에 유년시절 공장에서 일하고 청년기에 금광 붐이 일었던 클론다이크 지역에서 몇 년간 골드러시에 뛰어들기도 했다. 이후 인기작가로 부와 명성을 얻었지만 가혹했던 노동환경에 대한 기억은 그의 작품세계 속에 사회개혁과 반자본주의적 성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