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고사리를 먹으려면 결심이 필요했다. 잘 씹히지도 않고 쿰쿰한 향이 났다. 흙의 향기 같은 것이 그땐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코를 막고 대충 씹어서 꿀꺽 삼키는 것이 내가 하교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고비고사리라며 조심스럽게 다라이에 넌다. 엄마의 목소리를 듣자 하니 우리 집에 자연산 고비고사리가 있다는 것을 이웃에게 들키면 안 되는 모양이다. 아마 나눠줄 수 없을 만큼 넉넉하게 채취하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그렇지만 고비고사리를 널어놓은 다라이는 옆집, 앞집,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도록 볕 잘 드는 마당
본인의 10대 시절, 소위 제가 했던 덕질의 대상은 미국 보이그룹인 ‘뉴키즈 온 더 블록’이었습니다. 소녀 감성을 자극하는 가사로(영어 공부 열심히 했지요!) 사랑을 노래할 때 거기에 푹 빠진 본인은 여생을 미국에서 보낼 줄 알았었지요.제 딸이 10대가 되어 소개해 준 그룹이 바로 ‘방탄소년단’입니다. 제가 지나온 10대 시기이기에, 딸아이도 곧 식상함을 느끼고 다른 그룹에게 관심이 옮겨질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마흔이 넘은 나이에 제가 오히려 딸아이보다 더 열광을 하고 있지 않겠습니까!!!이 책은 팬들이 얘기하는 ‘굿즈’ 중
과거에도 지금도 지구에는 수많은 내전이 벌어지고 있지만 사실 나는 그 면면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물론 관심이 부족한 게 가장 큰 이유다. 그래도 아주 가끔씩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서 인터넷을 뒤져보는데, 자료를 찾아 읽다가 늘 중도에 포기하곤 한다. 여전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채로.핑계를 대자면, 내전의 맥락이라는 게 워낙 복잡하다. 문제의 발단에는 해당 지역 내의 종교·민족·문화 간 차이와 갈등,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통치하다가 슬쩍 발 뺀 제국주의 국가가 얽혀있다. 여기에 독립 이후의 혼란, 국제적
아직은 자두밭 일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서툽니다.그중에서도 가장 서툰 것이 봄 한 철 집중하여서 할 ‘열매솎기’입니다. 이 열매솎기로 인한 초보 농군의 마음고생은 한층 고조됩니다.열매가 포도송이처럼 달리는 종자인 ‘추희자두’는 더욱 초보 농군의 힘을 빼는 것입니다. 그 많은 알 중 한 알을 두고 나머지 알을 남겨 놓을 한 알에 영향을 주지 않게 조심스럽게 솎아내는 것입니다. 열매 간 거리도 생각해야 합니다. 열매의 병 발생 여부도 확인해야 합니다. 햇빛의 영향도 고려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고민되는 것이 한 가지에 남겨
다음 달 대구 편입을 앞둔 군위군의 깊은 산골, 해발 700M에 귀농해 살아가고 있는 두 아이의 아빠 청년농부 김태현입니다.이곳 바람이 좋은 화산마을로 귀농한 지는 벌써 2년을 채워가고 있습니다.9살, 7살의 두 아들과 영원의 단짝 아내와 함께 산골 속에서 치유농장을 운영하며 우리 아이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해 긍정적인 마음으로 양육자모임에 함께하게 되었습니다.작년 추워지기 시작하는 계절부터 시작되어 벌써 세 번째 계절인 여름의 중간 지점에서 이번 모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흐릿했던 양육 관점을 읽고 쓰며 나누며 뚜렷하게 만들
“나는 이 세계에 소속돼 있어요. 필요한 만큼, 그리고 분리돼 있어요.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만큼.” p85 나이 듦은 아프고, 돈 없고 외로울 미래다. 노년의 솔로는 ‘고독사’로 연결되고 언론은 재난처럼 보도한다. 혼자를 선택한 사람들의 나이 듦을 고독과 빈곤으로 일반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를 선택하는 솔로, 1인 가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2021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전체 가구 중 1인 가구 비율은 33.4%를 차지했다.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정상가족’이라 불리는 3인 가구(29.3%)보다 많다. 2022년 서울시
세이레 학당 공부 모임은 노래로 시작한다.‘냇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로 노래를 시작하면, 수다가 멈추고 마음이 한자리에 모인다.‘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를 부르며 모두의 목소리가 하나로 포개어지면, 노래는 끝이 나고 공부는 시작된다.우리가 공부로 만날 넓은 세상은 시공간을 가로지른다. 역할에서 벗어나 상상력의 바다에 머무는 시간이 된다.2003년 3월 첫 삼국유사 함께 읽기는 ‘알에서 나온 혁거세왕’으로 진행되었다. 서정오 선생님이 다시 쓴 [어린이 삼국유사](현암사)에는 여러 건국신화가 실려 있다. 우리가 살아
뿌리의 꿈은 꽃과 열매이다. 청한 적 없는 삶이었어도 이왕 심겼으니 사는 동안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원한다.뿌리가 원하고 바라며 그리던 꽃과 열매는 그가 아주 여리고 연약하여 아주 작은 힘으로도 금세 부러지기 쉬웠던 날들에도 그의 꿈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그의 꿈은, 그러니까 뿌리의 욕망은 어디에서 태어났을까? 아주 오래전 오래된 누군가들의 소망과 낙담 환희와 번뇌가 역동하며 만들어 낸 그림이 뿌리가 기억하기도 전 태초의 기억 어딘가에 각인된 것은 아닐까. 응축된 원형의 기억은 몸을 옹송그린 채 어둡고 낮은 곳에 도사리고 있다
군위공부모임〈세이레 학당〉_ 삼국유사 함께 읽기 모임 “우리 모임 이름은 ‘웅녀 정짓간’으로 합시다!”농사를 짓거나 가공업을 하는 군위 지역민 10여 명이 둘러앉아 ‘밀키트 가공 협동조합’을 만들면 좋겠다는 마음을 모아가고 있었다. 아직 코로나19가 그 세력이 만만치 않을 때였고, 도시의 골목골목마다 밀키트 편의점이 유행이라는 소식이 전해질 무렵이었다.꾸준히 농업에 관한 공부를 해 오던 모임[행복을 가꾸는 농부] 가 코로나19로 잠시 모임을 쉬다가 다시 협력하여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디려 하던 차였다. 함께 협동조합 설립의 과정을 공
방명록은 우리가 어딘가에 남기는 흔적이다. 어딘가를 방문할 때, 그 장소에 초대해 준 사람 혹은 이 장소를 찾아올 다른 이에게 전해줄 말을 방명록에 쓴다. 결혼식장이나 돌잔치에는 축하의 방명록을, 에어비엔비나 게스트하우스에는 이 숙소에 대한 간략한 평을 남기고 가기도 한다.만약 지금 ‘세상’에 머무는 사람들에게 세상에 대한 방명록을 쓰라고 하면 과연 어떤 방명록들이 나올까? ‘이 평화로운 곳에서 잘 지내다 갑니다.’ 이렇게 쓰는 사람이 있을까?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위와 같은 방명록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사람에게는 부러움의 박수를
지난가을에 봄을 기약하며 뿌린 밀 이삭이 고양이 수염 같은 까끄라기를 내밀기 시작했습니다. 그 밀밭에 단오 전후 오뉴월 즈음, 밀은 누렇게 익어 가고 시내 아이들이 와서 밀 서리를 하는 풍경을 상상해 봅니다. 그들의 종달새 같은 재잘거림이 요즘 보기 힘든 보리밭으로부터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종달새인 양 상상의 나래를 펴봅니다. 어린 새싹의 사람들이 보현 골짜기에 재잘거리며 노는 상상만 하여도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름다우리라 생각됩니다. 이것이 평화일 것입니다. 이것이 평화일 것입니다. 뻐꾸기 울어 울어 밀 이삭이 누렇게 익어 바스러
지난 4월 7일 군위군 화산마을 ‘자연닮은 치유농장’에서 군위 지역 양육자들이 모여 민들레 145호에 실린 ‘시민의식을 기르는 미적 체험’(현병호)을 함께 읽었다.이 글에서 저자가 말하려는 바를 주관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10대에 경험하는 문화예술분야의 미적 체험이야말로 시민의식을 구성하는 밑바탕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어떤 예술가도 종소리에 맞춰 그림을 그리진 않는다’라는 글에서 학창 시절 종소리에 맞춰 한 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선생님의 의도대로 그려내는 교육으로 제대로 된 미적 체험을 경험하고 느끼기에는 한계가
드라마 (NETFLIX)가 화제다. 학교폭력 피해자 ‘문동은’ 역할을 맡았던 배우는 인터뷰에서 극 중 가장 많이 화가 났던 장면을 묻는 물음에 ‘성인이 된 가해자들이 학창 시절에 저지른 잘못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을 때’라고 답했다. 한편 가해 측의 주동자 역을 연기한 배우는 그녀가 맡은 ‘박연진’을 ‘아무것도 모르는’ 캐릭터로 해석했다. 과연 연진의 부모는 딸이 저지른 살인마저 없던 일로 만들어 낼 만큼 부유하고 부패했다. 무지는 힘의 부산물인 동시에 연료로 작동한다. 부와 권력의 비호 속에서 연진은 희생자들을 연일 갈
사소한 모든 삶이 다 ‘나 같아서’ 쉽게 고개를 돌릴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이용하기로 했다. 작은 매체를 통해서나마 내가 외면할 수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내고, 너무 세밀해서 징글징글한 이야기를 정직하게 풀어보기. 숭고하기보다 정직하게. p95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직업과 함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많은 함의를 지닌다. 노동 시장의 차별 언덕을 오르내리는 그 직을 천직으로 삼은 것은 애쓰는 삶을 쓰고자 하는 숙명과 연결되어 있다. 이 책은 화려한 방송국이 궁금하고 라디오가 좋아 방송을 시작한 20년 차 베테랑 작가
지난 3월 10일 군위읍 정스터디에서 다섯 명의 양육자가 모여, 격월간 145호에 실린 글 ‘학생 수 감소와 교육의 미래(홍인기)’를 함께 읽었다.정부가 공식 통계로 사용하는 중간 정도의 시나리오(중위 추계)로 계산해도 2032년이 되면 2021년 초등학생 수의 54% 수준으로 줄어든다. 270만 명이던 초등학생이 140만 명이 되는 것이다. (위의 글, 76쪽)여러 통계를 활용하여 꼼꼼하게 지표의 변화를 분석한 홍인기 선생님의 글을 읽으니 인구 감소가 피부에 확 와닿아서, 할 수 있는 게 없구나 싶고 힘이 빠졌다.전교생
계절이 바뀌었습니다. 3월하고도 6일 ‘경칩’이자 보름입니다. 천문의 지혜를 알 턱이 없는 촌부가 경칩과 보름이 한 날에 겹치는 것에 묘하게 끌려 평소 소회를 적어봅니다.지난가을 놀고 있는 빈 땅을 차마 그냥 둘 수 없어 복합비료 두 포대와 함께 이삭이 예쁘게 패는 우리 밀을 뿌렸습니다. 종자 이름이 흑진주를 떠오르게 하는 ‘아리진흑’의 싹들이 봄을 맞아 제법 기운을 차려 500여 평 되는 밭에 푸른 기운이 겨우내 메말랐던 대지를 도포하고 있습니다. 자두 농사를 짓는 시골 농부의 엉뚱한 푼수 짓에 경운기를 몰고 지나던 노인 회장님은
영화 은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항일 단체 ‘흑색단’의 스파이 ‘유령’의 이야기이다. 유령은 끊임없는 의심과 감시망 속에서 최대한 살아남아 총독을 암살해야 한다. 총독을 암살하고 진정한 광복을 맞이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 그들은 그 누구보다 자신의 목숨을 조국을 위해 바친다.이 영화에서 눈여겨볼 점들이 있다. 먼저 여성들이 총과 칼을 쥐고 광복을 위해 한 몸 바쳐 싸운다는 것이다. 광복을 위해 끊임없이 잠입하고, 죽는 순간까지 무기를 겨누고, 끝까지 싸운다. 거기다 여성들이 서로 돕고 함께 싸우며, 위기를 헤쳐 나간다.
그런 낮은 둥지는 처음 보았었다. 무언가 든 둥지인지 아니면 빈 둥지인지, 그렇다면 지어지는 중인 둥지인지 혹은 지어지다 만 둥지인지는 알지 못하였다. 그중 무엇일지라도, 낮은 둥지는 다른 모든 둥지들이 그렇듯 쉬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온 둥지였다. 그러고 보면 낮은 둥지 앞에서 그것이 이미 성취한 어떤 근원적인 승리를 기억해 보는 일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새를 매혹하고, 중력을 거슬러, 무너지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쉬이 무너지지 않기.’기어이 무너진 후에도, 다시 당신에게 매혹될 새들과 중력을 거스르기.낮더라도,
신을 찾게 되는 순간이 있다. 이럴 순 없다고, 당신은 있어야 한다고, 저 재난 속에 슬픔과 아픔과 고통 속에 있는 저이들에게 원망이라도 당신께서 들어야 한다고. 너무나 초라하고 무력한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재난의 상황에서 난 신을 찾는다. 양극성 장애로 저 밑바닥에 있을 때, 물난리로 30년 넘게 일궈온 공장이 물에 잠겼을 때도 읍소했다.“‘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구절은 정말 기만이라고 생각해요. 이게 정말 감당할 수 있다고 보
“우리 마을 부녀회, 회원들 시니어 돌잔치 합니다!” 세이레 학당 단톡방에 이숙자 회원님이 오랜만에 소식을 남겨주셨다.‘시니어 돌잔치!’이숙자 회원님이 부녀회장 소임을 맡으면서, 관광버스 대절해서 놀러 가는 것 말고 다른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일까 오랜 고심 끝에 그려낸 기획이라고 한다. 마을에서 기존의 해오던 것을 바꾸기란 정말 어려운 일인데, 이숙자 회원님은 부녀회 살림을 꼼꼼히 하는 한편, 모든 회원이 돌 반지를 나누어 가질 수 있도록 동전 모으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충분히 준비되었을 때, 드디어 말로 입 밖으로 꺼내어 놓으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