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위의 어느 초등학교에서 한자 수업을 할 사람을 찾는다는 교육청 채용 공고를 봤다. 학교로 수업을 가 본 경력이 없어서 되겠나 싶은 마음 반, 그래도 해보고 싶은 마음 반이 싸움을 시작했다.일단 지원이라도 해보려고 양식을 내려받아 보니, 한문과 중등교사 자격증이 쓸모가 있었다. 겨우겨우 편입해서 겨우겨우 졸업하느라 치열한 시간을 보낸 것이 떠올랐다. 그 편입을 오래 후회했는데, 이렇게 쓰일 줄이야!두 학년을 통합해 일주일에 한 번씩 한자 수업을 하기로 했다. 막상 수업에 들어가 보니 한 반 안에서도 한자에 대한 지식 격차가 컸다.
노자는 ‘도를 도라 하면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라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제가 글을 배우는 선생님이 우스개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상사 걸릴 것 없이 사는 은해사 운부암 선원장으로 있는 모 스님보다 속세에서 부대끼며 사는 우리네 장삼이사가 고행의 바다에서 ‘도’에 가까운 생활을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신혼 초를 제외하면 평생 의사소통에 풍파를 일으키는 데면데면한 부부간의 문제(조심스럽게 말한 것임), 어릴 때는 더없이 귀하다가도 커가면서 기쁨 3 고뇌 7로 변하는 부모 자식 간의 문제, 한평생 먹고사는 것에 얽매여 이러지도 저러
상담으로 답답함이 많이 해소되긴 했지만 나 혼자 상담받는다고 남편이 갑자기 살가워지진 않았다. 그래도 미칠 것 같은 답답함의 원인이 모두 남편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니 화만 나면 남편에게 화살을 돌리던 습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개인 상담에서 상담 선생님과 작업을 통해 유년기를 돌아보며 내가 그토록 육아에 몰입하고자 했던 이유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음을 다루는 책들을 진공청소기가 흡입하듯이 열심히 읽어나가면서, 내가 돌보지 않은 나의 감정이 남편에 대한 불만과 뒤섞인 것을 알아채게 되었다. 내 마음 다루기도 이렇게 어
“올해 입학생이 없다카디만은 서이나(셋이나) 델꼬 왔으니 상 조야겠네!”마을 회관 앞에 선 통학버스를 놓칠까 봐 부랴부랴 달려가는 내 귓전에 환영 인사가 들렸다. 첫째와 둘째를 버스에 태워 보내고 셋째와 걸어서 집에 돌아가는 길에 그 목소리의 주인공과 마주했다.얼핏 봐도 구순은 되었을 법한 어르신이었다. 마을 주민들이 모여 아침 청소를 하는 가운데, 어르신은 청소엔 관심을 두지 않은 채 귀여워 죽겠다는 눈길로 우리 집 막내만 하염없이 바라보셨다.6년 전 봄, 경상북도 군위군 효령면 내리리로 이사 온 참이었다. 군위군은 가임기 20세
며칠 전 교실에 갔더니 민국(가명)이가 눈에 띌 정도로 두껍고 커서 백과사전처럼 보이는 책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밑줄을 그어가며 열중하여 읽고 있었다.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 물으니 요리의 원리와 각종 조리도구의 특성, 재료별로 활용 가능한 요리법까지 총망라된 책이라고 상기된 표정으로 설명을 늘어놓았다. 민국이는 조리 계열 특성화고등학교에 최종 합격하였다며 입학 전에 스스로 조리 이론을 공부할 계획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민국이의 말을 들으니 몇 년 전 비슷한 계열의 특성화고교로 진학했던 현규(가명)가 떠올랐다. 고 3이 되던 무렵
ooo - 동지 그는 얼굴이 있었다그는 이름이 있었다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자꾸 뒤로 돌아 본다내가 아는 얼굴인가내가 기억하는 이름인가그러나 그는 길에서 나를 만나면 알은체하지 않는다그는 누군가의 형제그는 누군가의 친구그는 누군가의 딸, 아들내가 그를 아는 것은 두 달에 한번 칫솔과 치약을 타러 온다는 것.내가 그를 아는 것은 그가 사는 방의 호수내가 그를 기억하는 것은 그마저 부끄러워 눈을 잘 맞추지 않는다는 것밖에 나올 용기를 저버리면 그는 작은 방에 자신을 가두고 스스로를 형벌한다는 것누군가의 자식으로 그를누군가의 형제로 그를
진한 핫초코. 마시멜로가 있다면, 3개 정도 넣어준다. 타다닥, 주위가 조용해야 들을 수 있는 마시멜로 녹는 소리. 마시멜로가 조금 녹아 더욱 진한 단맛을 갖게 된 핫초코. 핫초코를 들고 한숨을 돌려본다. 한입을 마시면 녹진한 단맛이 입안을 싹 덮는다. 따뜻한 담요를 덮은 것 같은 맛. 일을 하다 잠시, 핫초코로 한숨 돌린다. 단맛은 한번 들어오면 입안에 진하게 남는다. 오랫동안 남아 입안을 달게 덮는다. 그 입안에 남는 단맛이 좋다. 입맛을 다시면서, 그 힘으로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한다.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혹시 핫초코
지금으로부터 약 2600년 전, 춘추시대 장삼이사들의 살던 모습이 어느 날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나비 효과라고 해야 할까요. 정지창 선생의 페북 글에 소개된 현대 중국 작가 ‘옌롄커’의 소설을 살피다가 이라는 소설에 눈이 갔습니다. 이 시경에 관한 소설이라, 읽다가 버려둔 ‘우응순’ 선생의 에 다시 눈을 두었습니다. 장삼이사들의 삶이 곡으로 내려오다가 곡은 사라지고 글만 남았습니다. ‘공자’가 삼천여 수의 시를 삼백여 편으로 줄인 것을 우리는 으로 알고 있습니다. 소설
아이부터 어른까지, 우울증부터 분노조절장애까지 인간 심리를 해체하는 TV 프로그램이 인기다. 서점에는 심리학을 입은 인문학, 자기계발서가 베스트셀러다. 고통스러운 감정을 치유하고 위로받으며 기댈 곳이 생겼다. 그리고 인간들은 만나면 MBTI를 묻는다. I와 E의 차이가 도대체 뭣이라고, I도 E도 아닌 인간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이 따져 묻기 시작했다.감각적으로 강한 자극을 받으면 쉽게 피곤해지거나 가끔 신경이 지나치게 곤두서서 혼자 휴식을 취해야 하거나, 존재와 삶의 의미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한다면, 그리고 나를 진솔하
# 함께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책방. 사람을 위한 책방이 우리 동네에 있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퇴근길에 마주하는 고향 집 같은 동네 책방을 항상 원했다. 참새에게 방앗간 같은 곳이 된, 독자와 책방, 서로에게 소중한 관계가 되어버린 우리 동네 책방 멋쟁이들의 인터뷰를 담았다. 편지 형식의 구독 이메일링 서비스 으로 뭉친 두 책방지기, 이름에 사이좋게 ‘연’이 들어가서 ‘쌍연’이 된 ‘B급취향’과 ‘지금책방’! 인터뷰하는 동안 깨어있는 의식을 마주하는 일이 즐거웠고 사람을 향하는 책방의 모습이 따뜻했다. 아, 그래서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필수적으로 사회를 구성해야 하며, 사회를 구성해나가는 행위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정치일 것이다. 정치 하나로 인해 우리의 먹거리, 주거, 삶의 안정이 결정된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내건 공약은 ‘여성가족부 폐지’이다. 이 결정이 많은 여성의 삶을 뒤흔들고 있다. 달팽이 트리뷴 기자들은 정치가 우리의 삶과 얼마나 연결되어 있고, 여성으로서 내가 얼마나 정치에 영향을 받는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백래시 속에 있는 지금김고라니(이하 라니)는 ‘여가부 폐지’가 일어난 지금 시점이 ‘백래
“크고 화려한 것보단, 작고 아담한 이야기로 채워진 맛재마을”맛재마을을 소개하는 팸플릿에 적힌 문구다. 맛재마을 주민들이 만들어가고 있는 소소하면서도 알찬 마을문화를 표현하기에 아주 적절한 문구라고 생각된다. 맛재마을은 안동시 임동면 마령 1리에 있는 마을이다. 마령리는 1984년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대부분의 경작지와 거주지가 수몰되었고, 수몰민들은 이주하여 새롭게 마을을 형성했다. 때문에 마령 1리 맛재마을은 ‘마령단지’라고도 불린다. 이러한 ‘맛재’, ‘마령’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수몰되기 전 마을의 모습이 우마(牛馬)가 짐을
말이 마차를 끄는 동안 오랜 시간 음식과 물을 먹이지 않았고, 움직이지 않는다며 매질과 학대를 가했다. 경주 첨성대 앞에서 관광객을 태우고 꽃마차를 끌던 말이었다. 동물보호단체에서 꽃마차 업체를 고발했지만, 동물 학대로 처벌은 어렵다고 한다. 차선책으로 도로 위 마차운행 금지법을 만드는 활동을 하는 중인데 개정안은 국회에서 표류하고 있다. 싸우는 목소리들 덕분에 경주에서 꽃마차는 사라졌다. 합천군은 마차운행을 중지하고 전기차 운행을 시작했다. 시카고시는 마차운행 금지법을 신설하기 이전에도 말을 하루에 최대 6시간만 일하게 했고,
육아휴직 시기, 아이와 둘이서만 종일 지내니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어 늘 라디오를 켜두었다. 나에게 허용되는 외출의 범위 역시 극히 제한적이었다. 영유아 건강검진을 위해 아이를 데리고 간 병원, 일과를 마친 아이를 픽업하러 가던 어린이집. 이런 곳들에서 나는 누군가의 보호자, 혹은 “oo맘”으로 불렸다. 출산과 양육의 시기를 통과하는 동안 내 이름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었다. 지인 K는 얼마 전 둘째 아이의 백일을 맞았다. 에게? 싶은 한 줌의 시간이기는 해도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이 법적으로 보장은 되는 외국계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둘
이곳은 안동의 한 고택. 코로나로 인해 사방의 방문을 활짝 열어 놓아 청량한 바람이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다. 강연이 끝나고 자유토론 시간이 되자 한 참석자가 돌직구의 질문을 한다. “요즘과 같은 세상이야말로 인문학이 더욱 필요한 시점으로 보이는데, 왜 인문학은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실용성’이 무엇보다 최우선이다. 따라서 이런 상황은 인간의 상품화·기계적 인간관계·무한 경쟁으로 인한 마음의 피폐화를 초래하고 있다. 질문자의 의도는 이런 것이었으리라. “마음을 피폐하게 하고 옹졸하게 만
“프레드릭, 지금은 뭐해?”“색깔을 모으고 있어. 겨울엔 온통 잿빛이잖아.” ‘책방 그림이 글에게’ 박혜련 대표님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부드러웠다. 과장이 없는 목소리 덕분에 나는 그림책 속 이야기 세계에 푹 빠져있었다.열심히 일하는 들쥐들 사이에서 ‘동그마니 앉아 풀밭을 내려다보고 있는 프레드릭’이라는 구절에서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서 ‘정신 차려라, 프레드릭! 친구들 일하는 거 안 보이나?’하고 혼을 내주고 싶었다. 그 순간 “아! 귀여워!” 하는 다정하고 촉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최00 대표님의 눈꼬리와 입꼬리가 활짝 웃고 있다
‘용’에게 밥을 주다.제가 매주 수요일 저녁 다니는 서당은 한 번씩 툭툭 알밤이 저절로 떨어지듯 기발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곳입니다. 시대의 이야기꾼 의 ‘기’ ‘용’ ‘도’ 이야기 등은 책으로만 접할 수 있는 간접경험이라 상상력이 떨어지는 제게는 재미에 한계를 느낍니다. 그러나 서당에서의 이야기는 시대의 이야기꾼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현장성이 있는 것이라 가슴이 더 두근거리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오늘은 그중 제가 들은 것을 하나 먼저 꺼내보겠습니다.저와 같이 글을 배우는 도반으로 붓을 잡은 지 20여 년이 넘은
강박적 사고가 일어나면 생기는 불안과 고통은 강박적 행동을 하는 것으로 중화되고 불안과 고통이 해소된다. 지금 이 생각이 불합리하다고 느끼지만 떨쳐낼 수 없다. 일상생활이 불편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현대인에게 강박은 흔하다.가로로 돌려진 가스 밸브, 다 꺼진 멀티탭과 전기장판. 계단을 내려가다 흠칫 멈춘 나는 다시 현관 비밀번호를 누른다. 꼭 두 번은 확인해야 마음이 편하다. 내가 깨어있는 시간에 가족 중에 누군가 외출을 하게 되면 어떻게든 얼굴을 보고 “잘 다녀와!”라고 해야 한다. 만약 때를 놓쳐 인사를 못 하면 엘리베이터를 기다
도시의 텍스트들을 읽다영천은 사실 잘 알려지지 않은 도시이다. 그리 유별날 것도, 정감 있는 것도 없는 이 도시는 그나마 ‘걷기 좋은’ 곳인 것만은 분명하다. 금호강이 도심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흐르는데 시민들은 둔치를 걷기도 하고 가끔은 샛길로 빠져 보기도 한다. 평소 익숙하게 생각하던 것들이 펼치는 새로움의 향연. 도시를 걷는다는 행위는 그 유명한 사회철학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도시의 텍스트를 읽어내는 것이다. 개발의 논리와 물신주의에 빠져 잃어버리고 있는 이 도시의 텍스트를 발견해 보고자 한다.첫 행선지는 영천의 과거 원도심
MZ 세대들은 술자리에서 술게임을 하며 재미를 돋운다. 내가 가장 즐겼던 술게임은 단연 ‘눈치게임’이었다.눈치게임은 1부터 참석자의 수만큼 한 명씩 돌아가며 “일, 이, 삼, 사…” 외치는 게임이다. 2인 이상이 동시에 같은 수를 외치거나 눈치만 보다가 마지막까지 숫자를 외치지 못하는 사람이 벌칙을 수행한다. 정해진 순서가 없다. 그저 서로 눈치를 잘 보며 아무도 수를 외치지 않을 것 같은 타이밍을 노려 절묘하게 끼어드는 것이 묘미다. 간단한 규칙과 쫀쫀한 긴장감 때문에 유독 이 게임을 좋아했다.역설적으로 나는 ‘기후위기’라는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