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고양이, 개, 돼지, 암소를 모두 합친다 한들 닭의 숫자에 미치지를 못한다. 거기다 쥐와 새까지 더한다 해도 여전히 닭이 이긴다. 닭은 세상에 가장 흔한 새이며 동시에 농가 마당의 친숙한 동물이다. 지금 이 순간 200억 넘는 닭들이 지상에 살고 있으며, 인간의 세 배에 달한다. (앤드루 롤러, 치킨로드, 책과함께, 2015) 삐뚤이. 큰삐뚤이. 연갈이. 노랑이. 얼룩이. 점순이. 소점이. 봉이. 깜순이. 꽁지. 빼빼. 얼도리. 깐도리.보현골 집에 함께 지내는 닭들의 이름이다. 시인 김춘수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모든 생명의 무게는 같고, 똑같이 그 무게를 감당하고 있다는 말은 정작 무게를 나눠지지 못한다. 우리가 먹는 밥을 위해 무게를 더 많이 지는 이들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p214) 불어오는 바람이 어디서 왔는지 매일 기상청을 확인해 따지지 않는다. 준비 없이 인간을 만나고, 준비 없이 만나는 삶의 고저가 인생이다. 인생이 그렇듯, 나는 책도 그렇게 만난다 싶다. 이번에는 ‘밥’과 ‘노동’이다. 삶이 닳아서 쓰라릴 때 속을 다스리는 첫 번째 방법은 밥부터 먹는 것이다. 위로를 해 주고 싶다면 ‘밥은 먹고 다니냐?’
예수의 겨울서울의 겨울. 서소문 역사공원 구석에 캐나다의 조각가 티모시 슈말츠(Timothy P. Schmalz)의 작품 노숙자예수(homeless Jesus)가 설치돼 있다. 작품 앞쪽 가까이에 놓인 제대* 옆에는 검은 침낭을 머리끝까지 덮은 채 누워 있는 한 노숙인이 있다. ‘그들’ 주위로 잎사귀가 줄어드는 나무들이, 더 멀리에는 서울의 높은 건물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 제대: 제단 위에 위치하여 성찬의 전례를 위해 사용하는 탁자. 사진, 글 _ 김운영 ▼ 연대를 위한 후원계좌¶ 홈리스행동(homelssAction) 국민은행
2018년 10월 초, 예루살렘에서의 가을학기가 시작하기 며칠 전, Haaretz1는 한 미국 학생의 입국 불허 사건을 보도하였다. 팔레스타인 난민 3세대인 ‘라라 알카즘(Lara Alqasem)’이라는 학생이 예루살렘에 있는 대학원에 입학할 예정이었으나 입국 과정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BDS2(보이콧, 투자 철회, 경제제재) 운동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고 확인되어 입국이 금지되었다는 소식이었다.교환프로그램을 오기 직전 나는 학교에서 퀴어페미니즘 강연을 주최하였다는 이유로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적이 있었다. 4개월을 넘게 징계위원회에 대
4년 전에 이사 왔을 때, 마을회관 건너편 밭에는 마늘과 양파가 가지런히 심겨져 있었다.비닐 멀칭이 단단하게 둘러져 있었고, 마늘과 양파 둘레에는 빛깔이 고운 여러가지 꽃도 잘 가꿔지고 있었다.2층 집 어르신은 다리가 불편하다고 하셨는데도, 매일 그렇게 밭과 논을 돌보셨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병원에 장기 입원을 하셨고, 퇴원 후에는 두 어르신이 손을 꼭 잡고 매일 운동을 하셨다.그리고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 먼저 하늘나라로 가시게 되었다.이후에 마을회관 건너편 밭은 온갖 들풀들의 땅이 되었다.매일 자전거를 타시던, 정미소 앞집
오늘 아침에 아이들 배웅하고 집에 돌아와 제일 먼저 한 일은 지구본 ‘공구’이다.알람 신청을 해둔 인스타그램 계정에 지구본 공구 알림이 떴고, 품절이 되기 전에 얼른 결제했다.며칠 뒤에 지구본이 택배로 올 것이다.인터넷을 켠 김에 즐겨가는 커뮤니티 몇 군데를 둘러보고, 익숙한 닉네임의 글에는 댓글도 단다.어제는 zoom으로 진행되는 교육이 있어, 오전 내내 머리에 쥐가 내리도록 공부했다.한 달에 두세 번 이상 구미와 대구로 볼일을 보러 간다. 직접 보고 사야 하는 물건이 있거나, 아이들 병원을 가거나, 지인을 만나기 위해서 다른 지
글쓴이가 살고 있는 집에서 본 약 50여 호의 아랫마을 밤 풍경이다.사진의 야경 위쪽 밤하늘에서 많은 별을 늘 볼 수 있다. 도심에서 보이는 희미한 별을 상상하면 이곳의 별은 돌 전후의 아이들 눈망울처럼 선명하다. 그렇지만 욕심이 큰 때문인지 마을 밤의 불빛 조도가 낮다면 더 선명한 빛을 즐길 수 있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은 늘 있다.별을 우리 시대 낭만의 섬 제주 신화 에서는 이렇게 본다.‘별은 천지 탄생 이후 가장 먼저 생긴 것이다. 세상의 처음은 암흑과 혼돈이었다. 혼돈에서 차츰 개벽의 기운이 감돌아 하늘에서 청
3박 4일 개인 상담 겸해서 석사 졸업여행으로 엄마와 함께 오고 싶다는 분이 있어 다녀가고, SOS 마을에서 자립을 준비하는 18살~24살 청년 아홉 명이 다녀갔다. 나는 집을 청소하고, 이삿짐이 덜 온 상태라 부족한 이불과 그릇을 마련하고 장을 보고 음식 장만을 하느라 종종거렸다. 이웃에 사는 자연요리연구가이신 ‘홍샘’이 점심 준비를 해주셨는데도 발바닥이 아팠다.제시간에 담당 선생님과 아이들이 도착했고 어수선한 마당으로 발을 내렸다. 홍샘의 카레를 먹고 몸풀기를 하고 플로잉과 스타카토의 움직임을 연습하고 자립에 관한 이야기를 서로
조울병을 앓지 않았더라면 내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보내준 지지와 응원이 이처럼 마음 깊이 감사하지 못했을 것이고, 내가 얼마나 운이 좋은지 몰랐을 것이다. p253 어쩌다 또 질병에 관한 책을 서평으로 쓰게 되었다. 무겁지(?) 않은 번아웃과 같은, 정서적인 책을 선택해야겠다 싶었는데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이끌렸다는 말이 맞겠다. 시를 읽으면 의미가 와락 덤벼들 듯 통째로 이해됐고, 구절과 구절 사이 시인이 숨겨놓았을 감정이 세세히 떠올랐다. 속도가 너무 빨라 불안하면서도 황홀했다. p25
딱 한 번, 아이들 교육 때문에 좀 더 큰 규모의 학교가 있는 곳으로 다시 이사 가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자유학구제’가 시행되면서, 몇몇 지정학교 사이에 군위 읍내 초등 아이들을 유치하려는 경쟁이 시작되었다. 군위 읍내 큰 규모 초등학교 앞에 다른 초등학교 홍보 플래카드가 내걸리고,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양육자들도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오게 할 수 있을까가 중요한 대화거리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군내 한 작은 학교가 ‘방학 없는 학교’로 아이들과 그 양육자를 설득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듣자마자 ‘
“아이고! 올해 입학생이 없다카디 셋이나 와서 을매나 고맙노!” 이사 오던 해 아침에 스쿨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에 저 말을 몇 번이나 들었다.아이들이 다니는 군위 효령초등학교는 2024년이면 100주년이 된다.그러니, 동네 아주머니도, 그 아주머니의 아이들도 다녔던 학교인 것이다.마침, 우리가 이사 온 해에 처음으로 입학생이 없었고, 그것은 온 마을의 이슈였는데, 그런 와중에 우리 식구가 3월 말에 이사를 온 것이었다.사람들 눈빛에 환대가 넘쳤다.시선에는 큰 힘이 있어서, 두렵고 막막한 마음이 조금 덜어지기도 했다.동시에, 사
과수원의 풀들을 제초하는 모습을 봅니다.유명 가수의 노래에 이런 노랫말이 있습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바람 부는 언덕에 이름 모를 잡초야… 아무것도 가진 게 없네. 노래처럼 잡초가 정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존재인지 수년 전 적어 놓은 단상이 있습니다.#잡초는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나는 식물. 끊임없이 자신을 내주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 불멸의 생명력. 인간에게 외면을 당한 처지이지만, 생명을 품고 생명을 노래하는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 불필요한 생명이 있을까요? 여기 꽃을 피워 생명의 기쁨을 노래하는 잡초가 있습니다. 태
“삼국유사의 고장 군위에 사는 이영주입니다!”온라인 모임에서 나를 소개할 상황이 되면 항상 이렇게 한다.군위를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랜선 벗들은 나를 통해 군위라는 지명을 처음 만난다.이후에 모임이 진행되면서, 절기 따라 변해가는 동네의 풍경을 나누고, 이런저런 수다를 나누다 보면랜선 벗들에게 나는 ‘군위 사람’이 되어있다.하지만 나는 군위에서 ‘군위 사람’이 아니다.친정이나 시댁이 군위가 아니고, 군위에 그 어떤 연고도 없으므로 군위 사람이 아니고군위 읍내가 아닌, 효령면 내리리에 살기 때문에 ‘군위 사람’이 아니다.그렇다고
인구소멸지역의 가장 큰 장점은 사람이 적다는 것이다.사람이 적으니 가게도 적고, 가게가 적으니 간판도 쇼윈도도 적다.‘이걸 안 사?’하는 메시지가 담긴 유형무형의 자극이 없다.우리 동네에는 구판장 같은 작은 구멍가게도 없다.대신 논밭을 본다.농사짓지 않은 땅에 자란 들풀을 본다.그 사이를 오가는 개구리와 나비, 잠자리를 보고 긴장감 없이 나른하게 걸어가는 마을 고양이들을 본다.오늘은 사마귀와 눈을 맞췄다.개울 난간에 매달려있길래 몸을 낮춰 가만히 봤더니, 사마귀도 내가 신기한지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나 사마귀랑
새벽녘 추위로 몹시 몸이 떨린다. 서둘러 이리저리 팔을 휘두르며 이불자락을 찾는다. 닫힌 눈꺼풀이 떨어지지 않는 통에 더듬거리며 겨우 끌어당기려니 남편 또한 이불자락을 칭칭 두르고 있다.지난밤 주먹 하나 들어갈 만큼 창을 열고 잠을 청했다. 늦더위가 모질게도 스멀거리며 올라왔기에. 찬기는 이에 맞서는 중인가 말이지. 꽤 으슬거렸거든.가을은 가을이다.근데도. 아직도. 가을은 멀게만 느껴진다.글쎄. 9월 말. 어김없이 가을이 오고 싶다고 떼를 쓰고 있었던가 보다.하지만 자연은 몸살이 난 게지.내가 바라볼 수 있는 사거리에서 조금은 이른
〈우리는 밤마다 수다를 떨었고, 나는 매일 일기를 썼다〉- 원더박스, 2020년 11월 4일, 지은이 궈징, 옮긴이 우디. 해제 정희진 1월 23일, 우한이 봉쇄되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아는 사람이 없었다. p16 어쩌다 책이 또 일기다. 난해한 글을 명료하게 정리하고, 책을 세련된 맛으로 포장하는 여성학자 정희진의 프롤로그 덕분이다. 무겁지 않지만 가볍지도 않은, 개인의 생존일기다. 전염병의 심각성을 말하기보다 단절된 마음을 회복하고 서로를 도와 치유하려 한다.작가 궈징은 페미니스트이자, 사회활동가다. 중국 최초로
돌아가는 이유, 두려움. 군위 우리집에서 경주 ‘나정’까지 고속도로를 타면 한 시간, 국도로 가면 한 시간 사십오 분. 망설임 없이 국도를 탄다. 아이들에게 ‘셋이 합쳐 [한]이라는 글자를 40개 찾으면 편의점에 간다.’는 미션을 주고 출발! 군위의 동쪽으로 달려 부계와 산성면을 지나 영천시 신령면에 닿는 동안 40개가 금방 채워진다. ‘한우 전문’이 왜 이렇게 많은가! 다음에는 더 어려운 음절을 제시해야겠다. 아이들이 한목소리로 ‘편의점 고고!’를 외치는데, 드문드문 있던 식당도 없이 꼬불꼬불 이어진 길을 가도 가도 영천시를 벗
2018년 〈삼국유사 이바구꾼 양성과정〉 교육에 참여하면서, 삼국유사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다시’ 만났다는 것은 나의 착각이었고, ‘단군신화’를 비롯한 몇몇 이야기만을 알뿐, 삼국유사를 잘 모르고 있었다. 새로 읽게 된 삼국유사 이야기들도 모두 재미있었고, 특히나 ‘일연 스님’의 여정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국내 정치 상황도 혼란스럽고 몽골의 침입도 있는 어려운 시대를 스님으로 살아가면서, 일연 스님은 어떤 질문을 품고 살았을까 궁금해졌다.차로 다녀도 먼 거리를 동서남북으로 오가면서, 이야기를 수집할 때는 어떤 마음으로 그 이
“얘들아, 학교 마치고 자연학교 가자!” 추석을 앞두고 태풍 소식이다. 하늘에 구름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구름 사이로 쨍한 가을볕이 내려와 등판을 살짝 구워주고, 파란 하늘 사이로 살짝 찬 기운이 느껴지는 바람이 지나간다.가을이다! 태풍이 지나가는 며칠 동안 이런 볕, 이런 바람, 이런 하늘을 볼 수 없겠지?백로에서 상강을 향해가는 이 절기를 놓칠 수 없다. 우리 마을도 좋지만, ‘매곡리 자연학교’(이하 자연학교)로 가야 한다. 절기 따라 자연학교 품에 기대어 마음 편히 놀고 쉬고 오는 것이 아이들과 나의 절기살이다.아이들 하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