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 방식에 따라 두 유형의 인간관계가 존재한다고 했다. 그것은 '나-너'의 관계와 '나-그것'의 관계이다. ‘나-너'의 관계는 인간 대 인간의 관계로서 상호 신뢰에 바탕한 만남을 가진다. 이에 반해, '나-그것'의 관계는 상대방의 존재를 '기능적인 어떤 것', 즉, 나의 목적 실현을 위한 도구로 간주해 버린다. 도처에 물신화의 기제가 만연한 현대자본주의사회에서 사람 대 사람의 만남이 점차 나-너의 관계에서 나-그것의 관계로 흘러가는 것이 우리 시대 비극의 전부라 해도 좋을 것이다.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이 맺는 관계 또한 그런 양상으로 변해가고 있음에 우울한 마음 금치 못한다. 이를테면, 방과후수업이라는 게 학교에 들어오기 전에 초등교사들은 글자를 못 익힌 아이나 수학 문제를 잘 못 푸는 아이들을 남겨서 지도했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말이다. 그런데 요즘은 남겨서 가르치고 싶어도 학원가기 바빠서 남을 아이도 잘 없을뿐더러, 학생 지도 수당 따위에 익숙해져서 교사들 또한 ‘기브 앤 테이크’의 방정식에 조건화되어 있는 실정이다.

 교사의 입장에서 학생을 ‘너’가 아닌 ‘그것’으로 보는 적나라하고도 반교육적인 맥락은 승진과 관련한 국면에서 엿볼 수 있다. 7~8년 전 격주로 토요일 수업이 있던 때의 일이다. 나는 영어전담을 맡았던 터라 토요일엔 수업이 없었다. 그러던 중, 교무실에서 우연히 교감이 5학년 아이 몇몇을 교무실 소파에 앉혀 놓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내가 영문을 묻자 교감은 그 아이들을 데리고 진로 교육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그런데 아이들의 면면이 하나같이 공부도 못 하고 불우한 가정형편으로 애정과 관심이 결핍된 딱한 아이들이었다. 그땐 순진하게도 ‘교감선생님께서 이 불쌍한 아이들에게 마음을 쓰시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교감이 아이들을 대상으로 무슨 교육을 하면 무슨 점수를 받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 불쌍한 아이들을 수업 시간에 빼와서 교무실에 앉혀 놓고선, 교육은커녕 아무 짓도 안 하고 방치하면서 점수를 챙겼던 것이다.

 그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교감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승진하는 인간들의 뇌구조와 정서 기제가 의심스러웠다. 더구나 이미 교감이 되어 있는 사람이 또 뭐가 부족해서 아이들을 볼모로 점수를 챙기려는 것일까? 물론 그 시절엔 창체(창의적 체험학습) 시수라는 게 없어서 토요일 4교시엔 담임재량시간으로 학급회의 같은 것을 배치하고 있었으며, 해당 아이들은 어차피 수업에 집중을 잘 하지 않는 아이들이기 때문에 교감은 ‘수업결손’에 대한 가책을 덜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런 발상이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 만일 교감이 공부도 잘 하고 멀쩡한 집안의 아이들을 선택했더라면 내가 이렇게 격분하지 않는다. 그 아이들은, 성서적 표현으로 말하자면, ‘길 잃은 양’에 해당하는 가련한 영혼들이었다. 집에서도 무관심 속에 아무런 사랑도 못 받고 커 온 아이들이 학교에 와서도 그런 취급을 받는다면 그 아이들에게 학교란 대관절 어떤 의미란 말인가? 교감의 그 반교육적 행각에 비하면 학급담임 교사가 반 아이들 자습 시켜 놓고 승진에 필요한 연구 실적물을 만드는 짓거리는 차라리 인간적이리라.

 승진제도에 대한 나의 비판 글이 늘 그렇듯, 극단적인 예를 들어 독자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교육 영역에서 승진이란 게 본디 ‘극단적인’ 성향의 소유자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사실 그 교감도 특별히 나쁜 사람은 아니다. 집에 가면 선량한 가장이고 훗날 교장 돼서도 학교 돈 밝히지 않고 직원들에게 한 번씩 한 턱 내고 할 정도로 후덕한 심성의 소유자였다. 다만 그는, 승진 점수에 관해서만 ‘극단적’이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듯, 승진이라는 게 ‘점수’라는 기제에 극단적으로 편향된 일부 교사들이 펼치는 레이스였건만, 최근 ‘학폭(학교폭력) 가산점’이란 게 생기면서 그 빗나간 물신을 쫓는 욕망이 “평준화” 될 전망이다. 내가 볼 때 이건 장차 엄청난 후폭풍의 재앙이 예상되는 판도라의 상자와도 같다.

 앞서 살펴봤듯이, 승진욕의 화신이 된 교사에게 학생은 ‘그것’으로만 존재한다. 학교가 그나마 교육적인 면모를 유지하는 것은 학생을 ‘그것’으로 만나는 교사보다 ‘너’로 만나는 교사가 더 많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승진을 쫓는 교사가 아닌 승진에 무심한 선량한 교사들에 의해 학교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특히 젊은 교사들이 이 나라 교육의 희망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50%의 교사들에게 학폭점수를 남발함으로써 젊은 교사들에게 승진 가능성에 대한 환상이나 물욕을 “학습”시킨 것은 교육적으로 재앙이 아닐 수 없다.

 교사인 사람이 내딛는 승진의 길에 ‘교육’이 있는가? 승진이라는 욕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실적물 열심히 챙기는 교사에게 ‘성장’이 있는가? 연구점수와 자기연찬이 양립하는가? 이 모든 물음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이다. 절대적으로!

 학교폭력 가산점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를 생각해보자. 이에 대해 약간이라도 진지하게 성찰한다면, 이 추하디 추한 점수를 탐하고자 하는 욕심이 가실 것이다.

 ‘학폭’은 교육 붕괴의 표상이다. 학교의 붕괴가 있기 이전에 가정과 사회의 붕괴가 있었다. 총체적으로 망가질대로 망가진 이 사회에서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는 아이들이 하나 둘 아파트 옥상에서 몸을 내 던지고서 만들어진 것이 ‘학폭 점수’다. 말하자면, 아이들의 피의 대가로 만들어진 결정체가 학폭가산점제인 것이다.

 학교는 경찰서가 아니다. 교사는 보안관이 아니다. 학교폭력의 문제에서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가 교사가 보듬어야 할 대상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몇 해 전, 자신의 제자가 학폭 가해학생으로 지목돼 학폭위원회에서 강제전학 조치를 받은 것에 대한 자책감을 견디지 못해 자진한 교사가 있었다.

 http://news.joins.com/article/9418580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지만, 이 선생님의 행위는 ‘학교폭력’이라는 엄중한 현실 속에서 교사 된 사람이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는가 하는 점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데, 적어도 학폭가산점을 덥석 챙기는 자세는 아닐 것이다.

 앞으로의 교직 삶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주는 점수 우선 챙기고 보자는 심사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동시에, 아이들의 피로 얼룩진 이런 점수를 챙겨서라도 승진을 해야 하는 것인지도 생각해보자. 상처받고 피 흘리는 아이가 있으면 온 몸으로 끌어안을 일이지, 승진을 위한 매개물(‘그것’)로 삼을 일인가? 우리가 그렇게 ‘극단적인’ 성향의 소유자인지 진지하게 성찰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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