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현대 정치사를 상징하는 ‘3김’의 한 인물이 세상을 떠났다. 그 분의 영면을 접하면서 그 분보다 먼저 간 또 다른 3김의 한 분과 그의 화두를 떠올려 본다.

행동하는 양심!

김대중 전대통령이 남긴 유지(遺志)가 “행동하는 양심이 되라”는 것이었다.

 

행동하는 양심!

참으로 좋은 말이다.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독재에 맞서 싸우며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의 한평생을 바친 그 분의 삶을 표상하는 화두가 “행동하는 양심”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통해 “행동하는 양심”이란 말이 그릇된 논리임을 말하고자 한다.

“행동하는 양심”이란 말은 “행동하지 않는 양심”이 있음을 내포한다. 누구나 이 같은 뜻에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행동하지 않는 양심이란 말은 ‘둥글지 않은 원’이란 말처럼 난센스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대체로 사람은 자기 양심대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법이어서, 행동하지 않는 양심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사람이 양심대로 행동하지 않는 경우가 없지 않다. 학생들이 배우는 도덕 교과서에서 제시되는 갈등사태가 대부분 이런 내용들이다. 즉, 남의 물건을 탐낸다거나 아무도 보지 않을 때 휴지를 버리거나 무단횡단을 하는 경우가 그런 예에 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자유로울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며, 김대중이 말하는 ‘행동하는 양심’은 이런 차원의 이야기와 무관하다.

 

위의 사진은 김대중 전대통령과 같은 해에 우리 곁을 떠난 노무현 전대통령과 관계있는 한 장면이다. 1990년 통일민주당의 마지막 의원총회에서 김영삼이 3당야합을 공식적으로 발표할 때, 같은 당에 속해있던 젊은 정치인 노무현이 “이의 있습니다!”라며 자신의 소신을 밝히는 모습이다. 프레임 속 인물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양심을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무덤덤한 표정도 있지만 박수 치는 사람도 있고 또 음흉한 웃음을 짓는 사람도 보인다. 요즘 정치판에서 유행어가 되다시피 한 ‘배신의 정치’의 전형에 해당하는 역사적 장면인 것이다. 자력으로는 대통령이 못 될 것 같기에 독재정권과 손을 잡으며, 국민이 만들어준 야당을 여당으로 바꿔버린 그 추악한 배신의 순간에 환호했던 무리들! 나는 이들이 결코 양심이 불량해서 그런 짓을 범했다고 보진 않는다. 확신컨대 그건 김영삼과 그 일당의 “양심”이었다!

 

양김(兩金)으로 회자되는 두 전직 대통령 김대중과 김영삼은 우리 정치사에서 둘도 없는 치열한 라이벌 관계로 비교되곤 한다. 암울한 군사독재 시절 두 사람은 저항적 정치인의 화신으로서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국민대중의 지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다가 군사정권의 종식과 더불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을 갔다. 하지만 나는 양김(兩金)의 차이가 선한 양심과 불선한 양심의 차이에 있다고 보지 않는다. 두 사람의 차이는 양심(良心)이 아닌 양식(良識)의 차이였다.

올바른 의식(意識)이 선량한 마음을 견인하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 인간은 자기 인식의 지평만큼 양심을 품는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서 실망감을 느낄 때, 대부분 그의 양심에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양식에 절망하게 된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빨갱이라며, 우리가 지금 이렇게 먹고 사는 게 뉘 덕이냐며, 박정희 비판하는 젊은 것들에게 삿대질 하는 경상도의 보편적인 어르신들이나, 월요일 애국조회 시간에 땡볕에 아이들 세워놓고 장시간 일장훈시를 늘어놓으시는 교장선생님이 우리에게 안겨다는 주는 실망감의 실체는 ‘양심’이 아닌 ‘양식’의 문제인 것이다.

폭로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가 ‘주한 美대사관의 역대 대통령 평가’를 공개한 적이 있다. 2005~2008년 미대사로 있었던 알렉산더 버시바우는 김영삼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정책적 이슈들에 대해 상당히 제한적인 지식과 보수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고 평가하였다.  '제한적인 지식 restricted knowledge'이란 우회적인 표현은 쉽게 말해 '무식하다'는 뜻이다. 반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정치적 인물로 외교정책의 모든 측면에서 능숙한 인물로 적고 있다. YS의 무식에 관한 일화는 넘쳐난다. 너무 많아서 감당이 안 되니 그 무식함을 소탈미로 승화시켜 수습하기 위한 출판물이 [YS는 못 말려]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 YS가 현재 대한민국호를 이끌고 있는 선장을 '칠푼이'로 일컬었던 점이다. 칠푼이한테서 칠푼이 소리를 들을 정도라면 이건 문자 그대로 '덤 앤 더머 dumb & dumber'라 하겠다.

 

양김 시대는 이제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생물학적으로도 종식되었다. 김대중을 따라 자연으로 돌아간 김영삼, 아마 이 어른은 눈을 감는 순간에도 3당합당 잘 했다고 진심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게 정치인 김영삼의 분별력이며 그의 양심은 그 분별력에 터하여 발동했던 것이다. 때문에 생전에 김대중이 김영삼을 지칭해서 ‘행동하는 양심이 되라’고 주문했던 것은 후자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한 요청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독실한 크리스찬으로서 자신은 늘 자기 나름의 양심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지엄한 가치어는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의 올바른 실천은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을 전제로 한다. 정치인 김영삼은 자신의 분별력만큼의 양심을 가졌고 그 양심대로 행동했다. 그의 실천에 대한 평가는 이제 역사적 판단의 몫으로 넘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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