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SYMPATHY

‘희귀조’라는 뜻의 레어버드Rare Bird는 1970년대에 활약한 영국 출신의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이다. ‘프로그레시브 록’이란 ‘진보적인progressive 록’이란 뜻인데, 진보적이라 함은 음악의 형식에 있어 기존의 진부한 대중음악 스타일에서 벗어나 진일보한 양식을 취한 것을 말한다. 1960년대 중반 로버트 무그 Robert Moog 박사가 발명한 무그 신디사이저에 힘입어 태동한 프로그레시브 록은 크게 두 갈래의 조류가 있었다. 하나는 인스트루멘털(연주곡) 위주의 클래시컬한 음악을 추구하는 밴드로 무디 블루스, 프로콜 하룸, 이머슨 레이크 & 팔머(ELP) 등인데, 이들의 음악은 아트 록(art rock)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핑크 플로이드로 대표되는 것으로서 몽환적 사운드와 함께 비판적인 가사를 담아 인간소외나 사회적 모순을 폭로하거나 대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음악들이었다. 전자가 음악의 형식에서의 진보를 추구한다면 후자는 음악의 내용에서 진보를 추구한다고 하겠는데, 지금 소개하는 ‘레어 버드’는 후자에 해당한다.

레어버드의 이 곡은 보통의 대중음악에서는 잘 볼 수 없는 “희귀한” 측면이 있다. 사회비평적인 가사 내용은 둘째 치고, 연주기법이나 화성면에서도 비범한 면모를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대중음악이 클래식과 구별되는 점은 ‘비트(beat)’가 강조되는 점이다. 이 비트는 아주 단순하게 정형화된 양식을 취해, 4/4박자의 곡들은 8비트(8-beat)를 기본으로 하여 곡 중간에 음악이 고조되는 부분에서 16비트와 8비트를 오가거나 한다. 박자수가 12/8 혹은 12/4인 경우는 8비트로 연주되는데, 블루스나 리듬&블루스 음악 가운데 이런 곡이 많다. 이 곡 <Sympathy>는 정상적이라면 12비트의 리듬 앤 블루스 리듬형식으로 연주되어야 한다. 그런데 레어 버드는 이 곡을 4비트로 연주한다. 12비트의 리듬을 4비트로 단순화해버리면 리듬감이 사장되어 결과적으로 매우 무거운 ‘행보’가 이루어진다. 그걸로도 부족했던지, 이 곡은 4/4박자의 음악이 취하는 기본 셈여림, 우리가 초등학교 때 배운 (강-약-중간-약) 형식을 파괴하여 (강-강-강-강)으로 연주하고 있다. 곡 중반부 이후 등장하는 드럼 연주를 잘 들어보라. 오른손(라이드심벌)과 왼손(스네어드럼) 그리고 오른발(베이스드럼)이 똑같은 비트 타이밍에 똑같이 ‘강’으로 연주되고 있다.

http://www.youtube.com/watch?v=j2x8oA5h5Jo

화성학적 측면에서도 이 곡은 당대 대중음악에서 잘 쓰지 않은 디미니쉬 코드를 쓰고 있다.  디미니쉬 코드(diminished chord)는 우리말로 ‘감화음’이라 일컫는다. 두 음 사이의 거리를 음정(interval)이라 하는데, 같은 높이의 두 음으로 구성된 1도 음정 다음으로 안정된 음정이 완전5도(도-솔)이다. 이 음정에서 5도음(솔)을 반음 내린(diminished) 것이 감5도인데, 감5도(혹은 증4도)음은 3온음(트라이톤)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굉장히 불안한 성격을 지닌다. 더구나 디미니쉬 코드에는 이 감5도 음정이 두 쌍으로 구성되어 있어 그 불안한 성격이 배가된다. 알기 쉽게 B코드의 예를 들면, Bdim의 코드 구성음은 (시-레-파-라b)인데, (시-파)와 (파-라b)이 감5도이다. 요컨대, 디미니쉬 코드는 듣는 이에게 격심한 불안감을 유발하는 코드라 하겠다.

<Sympathy>에서 (강-강-강-강)의 파격적 4비트 주법이나 디미니쉬 코드를 배치한 까닭은 듣는 이로 하여금 “무겁고 불편한 마음”을 전하기 위함으로 이해된다. 무릇 예술의 형식과 내용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니, 이 특이한 정서 전달 전략은 노랫말을 뜯어보면 그 비범한 색채가 더욱 선명해진다.

 

Now when you climb into your bed tonight

And when you lock and bolt the door

Just think of those out in the cold and dark

'Cause there's not enough love to go around

오늘밤 당신이 침실로 향해

문을 닫고 빗장을 걸 때

어둡고 추운 문 밖에서 떨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엔 사랑이란 게 부족하지요.

 

And sympathy is what we need my friend

And sympathy is what we need

And sympathy is what we need my friend

'Cause there's not enough love to go around

No, there's not enough love to go around

친구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심파씨라네.

우리에겐 아픔을 함께 나누는 마음이 필요해.

이 세상엔 사랑이란 게 부족하기 때문이야.

그렇지, 이 세상엔 사랑이란 게 부족해.

 

Now half the world hates the other half

And half the world has all the food

And half the world lies down and quietly starves

'Cause there's not enough love to go around

지금 세상의 반은 나머지 반을 증오합니다.

세상의 반이 모든 식량을 소유하고

나머지 반은 굶주림에 쓰려져 말없이 죽어갑니다.

이 세상엔 사랑이란 게 부족하기 때문이지요.

 

And sympathy is what we need my friend

And sympathy is what we need

And sympathy is what we need my friend

'Cause there's not enough love to go around

No, there's not enough love to go around

친구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심파씨라네.

우리에겐 아픔을 함께 나누는 마음이 필요해.

이 세상엔 사랑이란 게 부족하기 때문이야.

그렇지, 이 세상엔 사랑이란 게 부족해.

 

 

영어노래를 우리말로 옮기는 것은 언제나 어렵다. 이 노래에서는 키워드 ‘sympathy’를 적절한 말로 대치하기가 무척 곤혹스럽다. 희랍어로 ‘sym-’ 또는 ‘syn-’은 ‘함께 together’의 뜻이고, pathos는 ‘감정’, 더 구체적으로 ‘아픔의 감정'을 뜻한다. 해서 ‘sympathy’는 “함께 아파하는 마음”인데, 이를 ‘동정심’ 혹은 ‘연민의 정’으로 옮기면 원어가 가진 치열한 뉘앙스가 다소 퇴색되는 느낌이다. 우리말은 한자어가 망쳐 놓는다. 이 영어 낱말은 '함께 아파하기'로 옮겨야 한다. 

지금보다 훨씬 젊었던 시절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한 적이 있었다. “20대에 마르크스주의에 빠지지 않으면 바보지만, 40대가 돼서도 마르크스주의에서 헤어 나오지 않아도 바보”라는 바보 같은 말이 있지만, 50대에 접어든 지금도 여전히 사물을 바라보는 나의 사고체계는 마르크스주의에 바탕하고 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빚어지는 사회현상이나 인간행위에 대해 마르크스주의보다 더 정확한 통찰력을 제공해주는 이론체계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어떠한 사상이든 전지전능할 수는 없기 때문에 늘 변화 발전해야 한다. 변화를 지향하지 않고 정체되어 있으면 그 자체로 이미 마르크스주의와 거리가 멀다. 마르크스주의라는 사상체계나 사물을 바라보는 개인의 관점 또한 끊임없이 부정의 부정을 거듭해가야 하니, 마르크스의 스승인 헤겔의 철학용어로 이를 ‘지양(Aufheben)’이라 한다. 독일어 ‘Aufheben’은 영어로는 ‘부정’을 뜻하는 ‘negation’으로 옮겨지지만, 철학 용어로서 ‘지양’은 단순한 ‘부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말 속에는 “부정+보존+상승”의 세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게 변증법의 핵심인데, 변증법을 선호하든 말든 모든 인간 사고는 이 ‘지양’의 원리에 따라 발전해가기 마련이다. 이 곡 <Sympathy>에 대한 나의 사고가 어떻게 지양되어 왔는지 논하기 위해 이렇듯 딱딱한 먹물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으니 양해 바란다.

맨 처음 이 음악을 접했을 때 나의 느낌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너무 좋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살짝 어두운 느낌이 들지만 그리 칙칙하지 않고 세련된 음악적 분위기가 품위 있어 보였다. 게다가 가사내용이 보통의 대중가요에선 볼 수 없는 진지한 인간 삶의 성찰을 담은 코즈모폴리터니즘을 표방하고 있어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으로 이 노랫말을 비판적으로 음미하면서 그 사춘기적인 감동은 나이브한 것으로 치부되었으니 '1차적 지양'이 이루어진 것이다.

지구의 절반이 굶주리고 있는 것은 결코 식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다국적 식량기업 카길(Cargill)사는 풍년이 들어 식량이 넘쳐나면 멀쩡한 먹거리를 땅에 묻거나 바다에 버려버린다. 식량공급량을 조절함으로써 일정한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1970년 칠레에서 세계 최초로 선거에 의해 사회주의정부가 수립되었다. 아옌데 대통령은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아이들에게 매일 0.5리터의 분유를 배급하겠다는 공약으로 가난한 민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아 집권했지만 이 공약을 실현시키지 못했다. 어떻게든 사회주의 정부를 무너뜨리고 싶었던 미국 정부가 스위스 네슬레 사에 입김을 넣어 우유공급을 막았기 때문이다. 그 후 미국의 조종과 지원 하에 피노체트가 군부쿠데타를 일으켜 아옌데를 사살하고 무자비한 살인과 고문을 자행하는 폭력정치로 칠레 인구의 10퍼센트가 사망하거나 실종되는 비극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 언어도단의 기만과 만행 그리고 가공할 폭력이 도처에서 일어나는 것이 과연 이 세상에 사랑이 부족한 탓일까?

레어버드의 이 곡은 1970년에 발표되었는데, 이때는 ‘히피이즘’으로 상징되는 청년들의 저항문화가 한창 번성하던 시기로서 대중음악에서 ‘사랑’이 중심화두로 떠오르고 있었다. 이 시기에 활약한 대중예술가들은 곧 히피였다. 사랑으로 낡은 세상을 고쳐나갈 수 있다는 히피들의 나이브한 사고는 그들의 음악에 그대로 스며들었는데, 그 전형이라 할 것은 당대 최고의 스타 비틀즈의 <All You Need Is Love>이다. <Sympathy>의 코러스(후렴) 부분에서 계속 반복되는 “And sympathy is what we need”라는 문장은 비틀즈의 이 노래 제목을 패러디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두 음악은 닮은꼴이다. 그 황당하고도 무책임한 순진성은 비틀즈의 이 노래가 훨씬 더 심하다. 사랑만 있으면 이 세상엔 불가능한 것이 없다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사랑뿐이라 하니!

꽃의 아이들(children of flower)이라 불리던 히피들은 모두 가고 없다. 1968년 혁명과 함께 만개한 히피이즘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말처럼 10년도 채 피어 있지 못했다. 그 사조가 단명했던 것은 마르크스주의로 설명이 된다. 마르크스주의를 쉽게 한 문장으로 설명하라면,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로 요약된다. ‘존재’란 물질적인 부분(객관성)을 말하고 ‘의식’은 관념적인 부분(주관성)을 말한다. 사회적 모순이 해결되기 위해서는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객관적인 조건이 구비되어야 한다. 때문에 단순히 “사랑만 있으면 뭐든 해결할 수 있다”는 식의 관념적 처방은 문제해결에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것이다. 대통령궁 안에서 쿠데타군에 포위된 아옌데에게 필요했던 것은 사랑이 아니라 폭도들에 맞설 수 있는 물질적 힘이었다.

이 대목에서 반전, 즉 '2차적 지양'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 무용지물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 역사에서 관념(정신)적인 부분(주관성)의 위력으로 중대한 변화가 이루어진 예가 적지 않다. 흑인노예의 비참한 실상을 널리 알린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이란 한 권의 책이 미국 노예해방에 기여한 것이 그러하고,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로 시작하는 마틴 루터 킹의 감동적인 웅변이 그러하다. 이와 관련하여 마르크스는,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지만, 관념도 대중을 사로잡을 때는 물질로 전화된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아옌데가 대통령궁에서 포위되었을 때 라디오 방송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고 피노체트 일당의 비판했지만 이 ‘비판의 무기’는 쿠데타군의 막강한 군사력(무기의 비판)을 압도할 수 없었다. 아옌데는 그 냉엄한 현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이 살기 위해 망명을 할 수도 있었다. 아마 피노체트도 그러길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칠레의 민주주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한 몸을 바치고자 했다. 비장한 각오와 불굴의 의지(주관성)를 죽음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아옌데는 민주주의 수호의 화신이 되어 칠레 민중은 물론 전세계에 감동을 주어 군사독재정권과 미제국주의에 엄청난 타격을 가했으니 이게 마르크스가 말한 ‘관념의 물질적 전화轉化’인 것이다.

 

교조주의와 열린 사고의 차이는 ‘관념과 물질’, ‘주관성과 객관성’의 상호연관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둘 중 하나를 절대적 가치로 신봉하고 다른 하나는 배격하는 경향성으로 요약된다. 실로 한국사회 운동판에서 이런 분들 많이 볼 수 있다. 그런 분들에게 사르트르가 20세기 가장 완벽한 인간으로 칭송해마지 않았던 체 게바라가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고 싶다.

조소의 위험을 무릅쓰고 감히 말하건대, 진정한 혁명은 사랑의 감정에 의해 활기를 띠는 법이다. 사랑의 자질을 결여한 참 혁명은 생각할 수도 없다!

지방 촌놈인 이 몸이 서울 갈 때마다 느끼는 불편함은 서울에서 가난한 사람은 그 존재 양태가 더욱 비참한 모습을 띠고 있는 점이다.

이화여대 정문앞 2층 레스토랑에서 창밖을 내려다보니 예쁜 여대생들이 최첨단 패션을 자랑하며 활기찬 모습으로 지나간다. 순간, 전봇대 밑에 버려둔 폐지를 뒤지는 한 할아버지가 눈에 들어온다. 도시가 배설해 놓은 쓰레기를 자기 생계의 근거로 삼으려는 이 불편한 역설적 광경은 지방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이곳에선 특별히 더 불편하게 다가온다. 화려한 옷차림의 여대생들이 아름다움을 자랑할수록 노인의 추함은 더욱 부각되고, 경제적으로 여유로워 보이는 여대생들이 행복해보일수록 노인의 불행은 더욱 처절하고 비참해 보인다.

흰 바둑돌이 가득한 곳에 검은 바둑돌이 한 개 있으면 우리의 시선이 그곳을 향하기 마련이거늘, 이곳 사람들은 그 특이한 현상에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사실, 내 마음을 더욱 불편하게 하는 것도 이것이다. APATHY(무심함).

레어버드의 나이브한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SYMPAT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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