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오르한 파묵' 장편 소설

'그림은 신의 기억을 되찾는 것이며, 세상을 그가 본 대로 다시 보는 것을 뜻합니다'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은 독자에 따라 매우 다양한 층위에서 읽힐 수 있다. 먼저 이야기의 형식에 집중하면 하나의 살인사건과 사건의 범인을 추적하는 흥미진진한 추리 소설로 읽힐 수 있고, 표면적인 내용에 무게를 둔다면 살인사건의 해결 과정과 주인공인 세큐레와 카라의 밀고 당기는 연애소설이라고 정의 내릴 수도 있다. 또한 이러한 표면적인 내용과 형식의 이면을 보았을 때는 이슬람과 유럽의 그림을 매개로 해서 외부에서 유입된 새로운 가치관과 전통적인 가치관의 충돌과 그에 따라 발생하는 혼란과 갈등의 역사를 볼 수 있다.

14세기부터 르네상스 운동이 꽃핀 유럽에서는 미술의 중심이 신에서 인간으로 옮겨갔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묘사하는 원근법과 명암법이 등장하고 인체를 정확하게 묘사하기 위해 해부학이 연구되었다. 이러한 변혁의 바람은 지중해의 파도와 함께 이스탄불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바로 이 시점의 이스탄불이 이 소설의 배경이다.

유럽의 화풍을 도입한 책을 제작하라는 술탄의 명을 받은 에니시테는 궁정화원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진 4명의 화가들-나비, 올리브, 황새, 엘레강스-과 함께 비밀리에 작업을 진행해 나간다. 그러나 책을 완성해가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가치관과 종교관에 위배되는 새로운 화풍을 두고 화가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한다. 이러한 갈등은 결국 살인으로까지 치닫게 된다. 책을 장식하는 금박 세공사였던 엘레강스가 이스탄불의 외진 우물 속에서 살해된 채로 발견된 것이다. 에니시테를 도와 그림을 완성하고 범인을 밝혀내는 임무를 맡은 주인공 카라는 용의선상에 오른 나머지 3명의 세밀화가를 찾아가 각각 하나씩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들은 이슬람과 유럽이 각각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냐에 대한 질문과 직결되어 있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는 새로운 화풍과 전통적인 화풍을 통해 오스만 제국 시대에 전통과 정체성에 대한 갈등을 말하고 있지만, 이 소설 자체도 오늘날의 이슬람 세계가 가지고 있는 똑같은 고민을 드러내고 있다. 즉「내 이름은 빨강」이 그림이라는 예술을 통해서 16세기 중반의 충돌을 이야기 하고 있다면 작가는 문학이라는 예술을 통해서 오늘날 이슬람과 서구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문화는 사회를 반영하고 또 사회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무분별한 문화 제국주의의 확신에 대해서 오르한 파묵은 죽은 엘레강스의 입을 빌어 ‘두눈을 크게 뜨고 경계하라’ 고 거듭 충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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