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최백순, <미래가 있다면, 녹색>

지난 9월 하순에 실시된 독일 총선의 최대 승자는 메르켈 총리였다. 그의 소속정당 기독민주당이 아닌 3선에 성공한 메르켈이었다는 것이다. 기독민주당(기민당)-기독사회당(기사당)연합(기민련)은 단독으로 과반의석을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독일에서는 국회 과반 의석을 보유한 정당 또는 정당연합이 총리를 배출하고 정권을 수립한다.

그에 따라 기민련은 손잡을 상대를 찾아야 했는데 계속해서 파트너십을 유지했던 자유민주당(자민당)이 5%의 미만의 득표로 연방의회 바깥으로 밀려나 우파연립정권은 물 건너갔다. 그러나 좌파정당이 총단결하여 정권을 잡음으로써 기민련을 야당으로 전락시킬 시나리오는 상상도 아닌 공상 수준에 불과했다.

후쿠시마 참사 직후 지지율 폭등한 독일 녹색당

사실 총선 결과 좌파정당들의 의석은 우파정당들의 의석보다 좀 더 많다. 기민/기사연합 311석, 사민당 192석, 좌파당 64석, 녹색당 63석으로, 우파 311 대 좌파 319. 그러나 좌파당과 사민당-녹색당은 서로서로 손을 잡을 의사가 없었다.

(좌파당은 독일 사민당의 보수화에 반발한 일부 당원들, 동독 출신 사회주의정당인 민주사회당, 그 밖에 여러 좌파 활동가들이 모여 만든 정당으로, 사민당과 서로 구원을 가지고 있다.)


고로 제1당 기민련에게 공이 돌아가고, 거기다 ‘적과의 동침’이 강요된다. 일단 기민련의 파트너로 유력한 당은 좌파 가운데서 가장 온건하고 가장 유력한 사회민주당(사민당)이다. 메르켈 총리가 첫 번째 임기를 시작할 때도 이와 같은 좌-우 대연정이었다. 그리고 2순위로는 사회당과 오래도록 공조해온 녹색당이 꼽혔다.

녹색당은 2011년 한때 지지율이 28%까지 치솟아 국제사회의 이목을 끌어 모았다. 후쿠시마 핵참사가 이 탈핵 원조 정당에 호기를 선사했다. 그런데 녹색당은 이번 총선에서 약8% 득표라는 그저 그런 성적을 올렸고, 1석 차이로 좌파당에 밀려 제4당에 그쳤다.

왜? 첫 집권 때만 해도 핵을 옹호했던 메르켈 총리가 후쿠시마 참사 이후 핵윤리위원회의 권고를 수용하여 2022년까지 핵발전소를 폐기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딜레마! 염원은 실현되고 지지율은 제자리로 


녹색당의 염원인 ‘탈핵’을 온건좌파인 사민당은 물론 우파까지도 받아들여 버렸다! 원대한 뜻을 정치권 전반에 관철시켜 이룬 데 기뻐해야 하는가, 아니면 트레이드 마크를 빼앗겨 지지율이 내려앉은 것에 슬퍼해야 할까. 둘 모두일 것이다. 이런 틈새에 처한 독일 녹색당은 어떤 정당인가?

지난 봄날 나는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최백순 씨에게 연락을 받았다. ‘녹색정치’에 대한 책을 썼으니 나더러 추천사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진보신당(현 노동당) 당원인 그가 ‘녹색’을 말하며 ‘녹색당’ 당원에게 추천사를 의뢰한 것이다. 메일로 초고 전문도 보냈다. 

전세계 80여개 국가의 녹색당 가운데 가장 이름이 널리 알려진 녹색당은 독일 녹색당이다. 최백순의 <미래가 있다면, 녹색>은 주로 독일 녹색당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전까지 국내에 녹색당의 스타 정치인 페트라 켈리, 오쉬카 피셔를 다룬 책들은 있었다. 이 책 역시 페트라 켈리의 역정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지만, 독일 녹색당사에 이렇게 깊이 접근한 저작은 없었다. 

독일을 필두로 한 녹색당 운동은 신좌파 운동의 산물이다. 구좌파 운동이 주로 노동 문제를 사회변혁의 핵심 과제로 설정하면서 점진적으로 자본주의를 혁신하는 사회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현하려는 국가사회주의로 나뉘어져 왔다면, 신좌파 운동은 생태, 평화, 여성 등의 다양한 의제를 품은 변혁노선을 제기했다.
 
신좌파가 전면에 떠오른 계기는 두말할 나위 없이 68운동이다. 68운동은 정치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유럽사회의 생활상을 바꿔놓았다(68 이전에는 서구에서도 남성이 여성 기숙사에 들어가는 것이 터부시되었다).


청바지를 입은 '정당 반대 정당'

그 68세대가 현실 정치에 진출하는 디딤돌이 바로 초창기 녹색당이었다. 독일에서 진보정당 노릇을 하던 사회민주당(사민당)에 신물을 느낀 젊은 활동가들이 녹색당으로 모여 들었다. 무장과 전쟁 그리고 핵발전소를 반대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와중에 스스로 느낀 혼란도 있었다. “현실정치에서 사회운동을 어떻게 이어갈 수 있는가?” 이때 녹색당내에서 제출된 개념이 ‘정당 반대 정당’이다. 이러한 모순적 표현은 생태를 망치는 주범인 인류의 일원이 생태정치를 하겠다고 나선 모순적 도전을 설명하는 적절한 단어인지도 모른다.   


1980년 창당한 독일 녹색당은 3년만에 연방의회에 진출했다. 청바지를 입고 의회에 들어서는 녹색당 국회의원들의 모습은 세계 정치사에 남을 명장면이었다. 또한 이미 그 이전 바덴뷔르템베르크, 베를린, 니더작센, 함부르크, 헤센 주 등의 의회에는 진출해 있는 상태였으므로 풀뿌리에서의 활동력도 고양되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 녹색당은 유럽의회에도 진출했고, 헤센주에서는 사민당과 녹색당이 손을 잡고 연립 정권을 창출했다. 주정부 환경장관이 된 오쉬카 피셔는 운동화를 신고 장관 선서를 행했다.


 

 


하지반 이러한 ‘정당 반대 정당’은 일상적인 당내 분열을 예고하고 있었다. 국회의원은 절반의 임기(2년)만 소화하고 다음 순번에게 의원직을 승계한다(의원순환제), 국회의원은 당지도부가 될 수 없다(당직과 공직 겸임 금지) 등등 보기에 따라 신선할 수도 순진할 수도 있는 초창기 방안들은 당내 논쟁에 시시각각 시달렸다.

나중에 비극적인 죽음으로 녹색당의 전설로 남은 페트라 켈리도 처음에는 의원순환제를 제창했으나 연방의원이 된지 2년만에 이를 거부하여 당내의 비판을 뒤집어써야 했다.


당내 분열과 통일에 대한 미비로 위기에 처하기도

이 책은 녹색당의 성공사 못지 않게 이러한 당내 분열 양상에도 초점을 맞춘다. 녹색당은 원칙주의자(푼디스)와 현실주의자(레알로스)가 내부에서 대결하는 정당이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푼디스는 힘을 잃거나 당을 떠나게 된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오쉬카 피셔 전 외무장관은 레알로스의 대표주자로서 능수능란한 정치력을 행사하며 푼디스를 제압해 나간다. 녹색당이 창당 18년만에 사민당과 공동여당이 된 이후 유고 전쟁 파병을 두고 푼디스와 레알로스의 격돌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정권의 파병안을 당내에 관철 시킨 주역이 피셔였다.


이런 녹색당이 창당 이래 맞이했던 최대 위기는, 정권을 잡기 8년 전인 1990년에 들이닥친 독일 통일이었다. 모든 정당이 통일을 말할 때 녹색당은 홀로 ‘날씨’를 이야기하다가 연방의회 의석 0라는 수모를 당했다.

그러나 독일 통일의 부작용, 그중 동독 지역에서 생겨난 문제들은 다시 녹색당에 재기의 기회를 제공했으며, 동독 지역의 ‘동맹90’과 합당하여 교두보를 마련했다. 오늘날 독일 녹색당의 정식 명칭은 ‘동맹90/녹색’이다.


이후 녹색당은 생태환경 의제 뿐 아니라, 경제, 노동, 일자리에서 대안을 제시하는 종합적 정당으로 발돋움했다. 지방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사민당과 공동집권하여 실행한 정책들도 인정받았다.

결국 독일 녹색당은 1998년 총선에서 7% 정도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사민당과 연정하여 집권여당이 되었다. 핵발전소를 단계적으로 폐기한다는 정책에 사민당과 합의했던 그 순간이 아마 독일 녹색당의 초절정기였을 것이다.  


1998년 마침내 집권... 그러나 정체성 후퇴

그렇지만 집권은 곧 녹색당의 새로운 위기를 초래했다. 연정 파트너 사민당과의 협상에서 후퇴한 정책들은 적잖은 당원들을 ‘멘붕’에 빠트렸고 고질적인 당내 분열을 야기했다. ‘녹색’도 ‘신좌파’도 흐려졌다. 원칙주의자들이 빠져나가면서는 더더욱 그랬다.

사민당과 녹색당의 공동 정권은 한 번 더 지속되었지만 이 적록연정은 3기까지 가지는 못했다. 지방정부에서의 진군은 이어졌고 프라이부르크 같은 도시는 국제적인 ‘녹색 수도’로 지목받았다. 허나 함부르크 같은 곳에서는 보수세력과 함께 복지수당을 삭감하는 등 보수화된 정책으로 서민들의 지탄을 받았다. 이쯤되면 ‘녹색 신좌파’가 아니라 ‘중도적 환경주의’ 정당이다.


그러나 저자 최백순은 녹색당이 최근 들어 달라지기 시작한 데 주목하고 있다.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좌파적 정책을 내세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책의 후반부에 독일 이외 다른 나라의 녹색당을 함께 소개하고 있는데, 독일 녹색당보다는 좌파색이 농후한 영국 녹색당이나 ‘녹색좌파’계열의 정당에 끌리는 기색이 확연하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한국 녹색당원인 나는 스웨덴이나 프랑스의 녹색당처럼 밋밋한 환경주의 정당보다는 이탈리아의 ‘좌파/생태/자유’와 같은 정당이 더 좋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독일 녹색당은 선거 이후 다시 (설령 잠깐이더라도 어쨌든)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기민련과의 정부 구성 협상 테이블을 박차버린 것이다.

우파 정당과의 협상 박차고 다시 좌향좌?

그래서 이제 공동정부협상은 기민련과 사민당 두 당만의 협상으로 좁혀졌다(이것마저 성사되지 않으면 총선을 다시 치러야 한다). 녹색당이 기민련의 손을 완전히 뿌리친 계기는 조세 문제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좌파 성향을 복원하던 녹색당은 총선에서도 ‘증세’를 내걸었다.


오랜 우회전을 청산한 독일 녹색당의 좌향좌는 아마 부유층과 중산층의 이탈과 적대를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자본주의사회에는 그들보다 서민과 빈민이 훨씬 많다.

크레인 고공농성을 비롯한 감동적이고 견결한 투쟁으로 알려진 노동운동가 김진숙은 2012년 총선에서 녹색당을 찍었다고 밝힌 바 있다. 녹색당 참여 2주년을 맞이한 나는 녹색당이 '환경보호'의 수준을 넘어서고, 끝내는 자본주의의 폐허를 넘어서려는 모든 이들의 등대로 자리하기를 소망한다.

그리하여 ‘미래가 있다면, 녹색’이라는 최백순 같은 ‘노동’당원과 경쟁하고 그 이상으로 연대하는 건 ‘오늘이 있는 한,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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