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언제나 “구체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갈등사태에서는 누구든 입을 떼는 순간 이 편 아니면 저 편을 들게 되어 있다. 첨예한 대립 상황에서 중립적 입장의 표명이란 있을 수 없으며, 심지어 사태와 무관한 발언을 하더라도 어느 한 쪽을 이롭게 하고 다른 한 쪽에 타격을 가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시시비비가 명확히 가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나는 누가 옳은지 관심 없다. 이젠 지겨우니 그만 하자!”라는 식의 발언은 중립적인 입장 표명이 아니다. 세월호 사태에서 중립을 가장한 이런 식의 발언들이 유가족들의 힘을 빼고 상처 난 가슴에 못 질 해대는 것을 우리는 숱하게 봐 오고 있다.

최근 위안부 문제에 대한 박유하 교수의 입장 표명에 대해서도 우리는 ‘당파성’이란 차원에서 짚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제연행과 위안부의 역할에 대한 다른 증언이나 주장에 대해서도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느니 “위안부가 일본병사와 동지적 관계에 있었다.”느니 하는 박 교수의 말이 사실성을 담보하고 안 하고를 떠나 한국 지식인의 입에서 나온 이 발언이 누구를 이롭게 하고 누구에게 해를 끼치는지에 관해 박 교수가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제국주의가 아시아 인민들에게 가한 극악무도한 만행은 사실 세계적으로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가해의 규모 면에서 차이가 있을지언정 난징대학살이나 관동대학살, 만주 731부대에 의한 생체실험 등에서 보듯, 그 잔혹성 면에서 일제의 죄질은 아우슈비츠의 독일을 훨씬 능가한다. 나는 만일 위안부 피해자들이 조선이나 중국 여성이 아닌 유대인이나 백인 여성이었다면 일본 정부가 이렇게 오래도록 후안무치하게 버텨 올 수 없었을 것이며, 최근의 위안부 협상에서 미국 정부가 “대충 화해”를 종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전쟁은 인간성을 황폐화 시킨다. 점령지의 여성들을 상대로 집단 강간을 자행하는 군인들을 볼 때 그런 생각이 든다. 제 정신이라면 그럴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전시 상황에서는 피해자나 가해자 모두 인간의 존엄성이 망가지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박 교수가 위안부와 일본 병사가 동지적 관계에 있다는 말은 옳다. 그러나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몰라도 삶을 연명해 가기 위해 비인간적 상황에 적응해야만 하는 입장을 '동지적' 운운하는 것은 위안부들을 대상화하는 무책임한 수사법일 뿐이다. 살기 위해서 짐승들에게 자기 몸뚱아리를 내 놓아야 했고 점심 먹을 시간조차 없어 짐승들을 자기 몸 위에 올려놓고 음식물을 섭취해야 했던 위안부의 일상은 죽기보다 힘든 삶이었다. 지옥이 있다 하더라도 이보다 더 끔찍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위안부들의 삶이 다 이러한 형국은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 사실 여부를 떠나 문제의 본질을 희석시키는 우를 범하게 된다. 그러한 관점 표명은 극한의 피해를 겪은 많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욕보이는 것이는 한편, 궁지에 몰린 일본 정부를 돕는 격이 된다. 이게 박 교수의 당파성이라 할 것이다.

구글에서 ‘Nanking massacre 난징대학살’을 쳐서 이미지를 조회해 보라. 너무 끔찍해서 두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다. 보는 사람이 이리 힘든데 당한 사람은 어떠했을까? 나치의 만행을 기록한 영상물도 있지만 그 내용은 일제의 그것과 비교도 안 된다. 그럼에도 독일과 달리 일본은 아직 제대로 된 반성과 참회 그리고 사과가 없다. 작금의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핵심 이슈도 이것이다. 즉, 조선인의 협조가 있었느냐 없었느냐가 아니라 그 궁극적 책임의 주체인 일본의 진정어린 반성과 사과인 것이다. 돈을 몇 십억 받고 안 받고는 더더욱 아니다.

그리고 가해-피해의 주체도 구체적으로 다뤄야 한다. 위안부 문제에서 가해자는 일본이지만 피해자는 한국이 아니다.  한국인 일반이 아니라 ‘위안부 할머니’라는 “구체적인”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박근혜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협상함에 있어 국익을 앞세워 양국이 윈윈하는 협상타결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과정에서 피해자인 할머니들과는 한마디 상의도 나누지 않았다. 누구를 위한 협상인가? 한국을 위한 협상이었는지 모르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협상은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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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라는 기표는 언제나 모호한 환상을 불러 일으키는 신비적 수사일 뿐이다. 1965년 한일협정을 강행한 박정희와 2015년 위안부 협상을 종결지은 그의 딸이 위안부 할머니들과 같은 한국 사람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순진한 조선 처녀들을 꾀어 지옥 같은 곳으로 보낸 뚜쟁이들이 조선인이었다는 사실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지금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후손들을 위해 아베의 사과를 받아들이라”고 데모하는 엄마부대들도 한국인이다. 그리고 엄동설한에 소녀상을 지키는 대학생들도 또 이 글 쓰는 나도 한국인이다. 박정희, 박근혜, 뚜쟁이 조선인, 엄마부대 등등이 우리와 같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선량한 대다수의 한국인들과 정서적으로 동질성이 전혀 없는 반면, 일본 정부와 “당파적으로” 같은 편에 있는 이들이 그저 국적상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뭐가 그리 중요할까?

진리는 언제나 “구체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소녀상을 지키는 청년들의 '애국'과 엄마 부대가 말하는 '애국’이라는 가치는 완전히 다르다. 이 두 입장의 차이는 ‘국적의 차이’가 아닌 ‘계급적 차이’에 있다. 파울루 프레이리의 용법을 빌리면, 억압자의 당파성과 피억압자의 당파성의 차이다. 그리고 정의와 진리는 언제나 극소수 억압자의 편이 아닌 절대다수 피억압자의 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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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박유하 세종대 교수가 워싱턴의 싱크탱크 우드로 윌슨센터에서 주최하는 토론회에 참석했다고 한다. 윌슨센터는 “2차세계대전의 잔재에 대한 일본과 한국 간에 타결된 기념비적인 합의가 양국의 협력을 증진시킬 것이라는 기대가 높다”면서 “미국 입장에서도 이번 합의의 성공적 이행은 이 지역의 두 긴밀한 동맹국들과 함께 공통의 도전을 다루기 위한 강력한 ‘3국 동맹’을 만드는데 결정적”이라고 밝혔다.(경향신문)

누이 좋고 매부 좋을 때 선량한 사회적 약자가 피눈물 흘린다면 그 합의는 선량하지 못하다. 그러면서 그게 피해자를 위한 합의라 하면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웃긴다 할 것이다. 한편, 한국 대표로 토론회에 참석한 우리의 박 교수는 거기서도 “새로운 시각으로 위안부 문제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느니 하는 의견을 내다가 미국 교수로부터 빈축을 샀다고 한다. 다시 말하지만, 당파성의 핵심은 국적이 어디냐가 아니라 계급적으로 누구 편에 서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보편적인 계급은 남성과 여성의 문제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는 같은 여성으로서 위안부 할머니들을 그렇게 짓밟는 박 교수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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