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석 달여 전에는 5년 넘게 쓴 스마트폰을 바꾸게 되었다.

어느 날 아침, 밤새 100% 충전되었을 스마트폰이 켜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딱히 전화 올 곳도 없으면서 하필 이런 순간 가을시장 천만 관객 영화를 만들기 위해 내 만화원작을 1억에 사겠다는 전화라도 오면 어떡하나 싶어서, 둘째를 어린이집에 던져놓자마자 삼성 AS센터로 날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오래된 삼성 S2는 다시 눈뜨지 않았다.

내 만화를 미국 시장에 진출시켜서 퓰리처상을 노려보자는 전화라도 올지 몰라 AS센터 직원에게 당장 새 폰을 살 테니 데이터를 옮겨달라고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말했다. 그는 아무리 고물이 된 기계라도 전원만 켜지면 데이터를 옮길 수 있지만, 아무리 멀쩡한 기계라도 전원이 켜지지 않으면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런, 유전무죄무전유죄냐(?) 이런 법이 어디 있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만화 [메이드 인 경상도]의 연작작업을 위해 제작비 각각 오천만원을 지불하겠다는 전화가 올지도 몰랐기에, 삼성 스마트폰 S6의 출시를 기념하여 S4를 10분 만에 구입하여 개통시켰다. 덕분에 수많은 메모와 녹취록, 수백 개의 전화번호를 몽땅 날렸다.

그 날 이후 (지금 세어보니) 34개의 걸려온 전화번호만을 저장해 두고 있다. 우리 엄마 번호도 아직 모른다. 직접 만나면 만났지, 엄마가 그 이후로 나에게 전화를 건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금부터이다. 판매직원이 지금은 내가 SK통신사를 쓰고 있지만, KT로 바꾸면 구입비용이 훨씬 싸다고 말하며 아내가 쓰는 통신사가 뭐냐고 물었다. KT를 쓴다고 했더니, 잘되었다며 ‘사장님도 KT를 쓰시면 가족 간에 무료통화가 됩니다.’라고 말했다. 그거 잘되었네, 그렇게 해 달라고 하고는 끼워주는 선물 중 삼성 선풍기도 받아들고 아내에게 칭찬받을 부푼 꿈을 꾸며 흥얼흥얼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 아내는 냉정했다. 그녀는 말했다. 자기는 지금까지 SK를 써 오고 있었으며, 결혼 이후 8년간 우리는 무료통화를 해오고 있었다고. 그 혜택을 오늘 아침 내가 끊어버린 것이라고...

그리고 나는 옛날 017때부터 SK를 지금까지 사용해온 뭐, 골드멤버 비슷한 것이라 나의 멤버십 카드로 파리바게트 등에서 할인도 받아오던 터였는데 그것도 내가 오늘 아침 내다버리고 온 것이라고 말하며 멤버십 카드를 구겼다. 이상하게 아내는 화도 내지 않고 차분했다. 그러나 나지막이 차갑게 물었다. 선풍기 선물 받아오니까 좋으냐고...

상자도 뜯지 않은 공짜 선풍기는 나중에 처갓집에 가서 장인어른께 조립해 드렸다. 마침 장인어른의 선풍기 대가리가 올리면 저절로 내려가고, 덜덜덜 거리고 그랬기 때문이다. 처갓집에 갈 때마다 나는 그 반들거리는 새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남몰래 뿌듯해 하지만, 아내가 처제한테도 다 일러바쳤기에 그들이 나타나면 재빨리 ‘어흠’하며, 딴청을 피운다. 아내는 분명히 이죽거릴 것이기 때문이다. ‘선풍기 바람 시원하지? 그치?’ 고요하고 냉정하게...

저와 일이나 우정과 사랑 등으로 인연이 있으신 분들은 전화번호를 좀 가르쳐주시면 평생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제 번호는 010-4811-4515입니다.

만화가 김수박
뉴스풀협동조합 조합원
만화 [아날로그맨], [오늘까지만 사랑해], [내가 살던 용산](공저), [삼성에 없는 단 한 가지 : 사람 냄새], [만화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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