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부터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오늘 아침에까지 이어진다. 안개비를 뚫고 유학산을 넘어 7시쯤 학교에 도착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교문 입구 축구골대에 저렇게 차량 진입금지 줄이 쳐져 있다. 차에서 내려 현관으로 향하는데 배움터 지키미 어르신이 추위에 떨며 현관 앞에 서 계신다. 이 마을에 사시는 분인데, 비가 와서 차량 때문에 운동장이 엉망이 될까봐 그 줄을 치기 위해 일부러 학교에 나오셨다고 하신다.

 

 

 

 
이 분이 받는 월급이 아마도 70만원 남짓한 것으로 안다. 다른 학교에선 교문 옆에 있는 초소도 설치되지 않아 운동장 벤치에서 기거하며 선량한 목자로서 양떼를 지켜주신다. 이 힘든 노동의 대가로 지불되는 70만원은 너무 박하다는 생각이다.
 
 
반면, 이 분보다 10곱절 되는 돈을 받는 어느 교장은 사흘이 멀다 하고 학교를 비운다. 젊었을 때는 교실을 탈출하기 위해 교감이 되었고, 교감에서 교장이 되니 이젠 교장실을 탈출하려 한다. 학교가 무슨 쇼생크인가?
 
연봉 700 받는 어르신은 자기 직무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이 꼭두새벽에도 학교를 지키기 위해 애를 쓰시는 반면, 연봉 7천이 넘는 교장이라는 사람은 학교를 탈출하려 하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이 두 사람이 보여주는 대조적인 모습은 계급사회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월 70만원을 받아도 자기 일에 긍지를 느끼며,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아이들과 학교를 위해 빗길을 자전거 몰고 나와 헌신하는 이의 실천은 “성스러운 노동”인 반면, 교감과 교무 눈치 보며 어떻게든 학교를 빠져나가려고 애쓰는 한심한 교장의 행태는 “노가다”다.
 
공사판의 인부들이 어떻게든 자기 일을 기피하려는 마음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그의 일이 너무 고되기 때문이다. 아니 공사판뿐이겠나? 세계 최고의 노동강도를 자랑하는 이 나라의 모든 직업인들의 노동관이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 가르치는 교사나 학교를 경영하는 교장이 자기 노동을 기피하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나의 용어 ‘노가다’는 마르크스의 개념 ‘소외(alienation)’와 맞닿아 있다. 소외는 곧 ‘노동의 소외’다. 인간 소외는 본질적으로 ‘소외된 노동’에 연유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사회의 인간은 4가지 형태의 소외를 겪는데, 그 중 가장 심각한 것이 유적 존재(species)로부터의 소외이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비로소 인간이 된다. 계통발생적으로 그러하고 개체발생적으로도 그러하다. 인류가 동물계를 벗어나 만물의 영장(=유적 존재)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노동에 힘입은 것이며, 한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것도 노동을 통해서이다. 인간은 생래적으로 노동을 즐기는 법이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인간은 노동할 때 행복을 느끼고 반대로 노동하지 않을 때 어색함을 느껴야 한다. 조선시대(=봉건사회)의 농부들은 그러했다. 그런데 자본주의사회의 도래와 더불어 인간은 노동을 기피하고 따라서 유적으로도 낯선 존재(=alien)가 되어 갔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일을 즐긴다는 것은 결코 궤변이 아니다. 아이들이 노작활동을 즐기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80이 넘은 내 어머니의 가장 큰 낙은 옥상 텃밭에 식물을 가꾸는 일이다. 우리 학교의 배움터 지키미 어르신은 결코 돈 70만원 때문에 이 일을 하시는 게 아닐 것이다. 만약 돈 때문이라면 왜 이 새벽에 비 맞으며 저렇게 줄을 치시겠는가?
 
 
사회적 존재로서, 자기 일터에서 자기 한 몸 열심히 움직임으로써 학교가 좀 더 나아지리라는 생각에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사회를 이롭게 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한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면, 유적 존재로서 자아실현을 하는 것이다. 반대로, 평교사 때는 교실을 탈출하려 하고 교장이 되어서는 교장실을 탈출하려는 ‘교육노가다’들은 미안하지만, 유적으로도 소외된 비참한 존재들이다.
 
더욱 비참한 것은...... 이 소외된 교육노가다들이 학교를 지배하고 있는 현실이다.
비도 내리고 이래저래 우울한 마음에서 월요일 아침을 여는 것 또한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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