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 어떤 것의 몰락

그야말로 '장안의 화제'인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4>. 뉴스풀e가 우리 나름의 '1994년'을 추억하려고 합니다. 그 시리즈로 [여기는 1994 오바!]를 준비하였습니다. 1편으로 독자 이석재 씨가 보내온 글을 소개합니다.

1994년 당시와 그 전후로 있었던 추억, 그무렵의 사회상이나 생활상을 회고하는 글을 모집합니다. 사적인 기억을 끄집어낸 글, 특정 분야를 깊이 다룬 글, 1994년경이 가지는 시대적 의미를 담은 글, 당신의 상상력과 기억력이 살아 숨쉬는 모든 글을 환영합니다. - 편집자

 
 MBC 드라마 <마지막 승부>

19941월 초, 드라마 마지막승부가 방영되고 나서 맞이한 첫 번째 일요일 새벽의 운동장 풍경은 아직까지도 내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숨만 쉬어도 절로 하얗게 입김이 나던 그 추위 속에서 평소라면 상상할 수 없었던 수의 사람들이 농구를 하고 있었다.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평소에도 농구를 꽤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몸에서 열기를 내뿜으며 농구공에 집중하던 사람들의 모습에 그 어떤 전율을 느꼈다.

물론 당시 농구 붐이 불기 시작했던 것이 94년의 마지막승부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전부터 이미 만화 슬램덩크로부터 수많은 열혈 농구청년들이 성장하기 시작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농구대잔치와 대학팀들이 오빠부대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미 혁명의 조건은 한껏 성숙해 있었고 어디선가 뇌관이 터지기만 하면 되었다. 199413일 월요일. 드라마 마지막 승부는 그렇게 불꽃이 되었다. 드라마의 완성도라던가 배우들의 농구실력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보다 더 조악한 어떤 것에도 몰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열기와는 달리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골대였다. 기존의 학교 운동장에 박혀있는 농구골대로는 넘쳐나는 농구인구를 소화하기에 한참 모자랐다. 그 때문에 모두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골대에서 농구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농구 골대를 둘러싸고 위계질서가 생기기 시작했다.

마지막승부와 슬램덩크... 그런데 골대가 적다


일단 운동장에 박혀 있는 농구 골대 중에 학생들에게 가장 주목 받는 골대는 따로 있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는 자 건물이었는데 그 골대는 그 자가 꺾어진 부분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이 햇볕을 피해 교실에 앉아 편하게 관람할 수 있었는데 나는 그곳을 메인 코트라 불렀다. 그리고 그 골대를 기준으로 각각의 코트에는 실력에 따른 기준이 매겨졌다. 쉽게 설명하자면 그곳에서 멀어질수록 상대적으로 하위리그가 되었다.

메인 코트 주변으로는 언제나 싸움 구경을 하듯 네모 낳게 둘러쳐진 인의 장벽으로 북적였다. 그리고 그날의 무대 위에 올라간 학생들은 마치 오늘이 삶의 마지막인 듯 최선을 다한 플레이를 선보였다.

그곳에 설 수 있는 기준은 학년이 아닌 실력이었다. 기존의 학교 문화에서는 있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가끔 가다 점심시간의 코트 쟁탈전 끝에 3학년의 실력 없는 선배들이 골대를 차지할 때가 있었는데 그런 날에는 구경하는 입장에서 왠지 맥이 풀렸다. 그리고 플레이하는 선배들도 왠지 주변인들의 실망감에 기가 죽어 농구를 했다. 그런 일이 몇 번 있고 나서는 실력이 없는 학생들은 점심시간에 1등으로 운동장에 도착하고서도 자연스레 아무도 보지 않는 운동장 끝의 골대로 뛰어갔다.

그렇게 메인 코트는 농구 좀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언젠가 가고야 말 목표이자 꿈의 무대였다. 그렇지만 세상사가 모두 그렇듯 실력 외의 잣대도 어느 정도는 작용했다. 공인 받은 실력자들과 인간적으로 친하게 지내다 보면 실력에 비해 좀 더 빨리 무대 위에 오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한 암묵적 규칙은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살던 동네 근처의 모 고등학교에는 아스팔트 코트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흙바닥에 골대 하나만 박아져 있는 것과는 격을 달리 하는 모습이었다. 휴일이면 인근 지역의 실력자들이 모두 그곳으로 몰려들었고, 거기서 실력을 인정받으면 곧바로 다른 학교로 입소문이 퍼졌다.

 
 농구대열풍에 크게 일조한 만화 <슬램덩크>


그 시절 많은 농구청년들이 그런 꿈을 갖고 있었다. 골대가 좀 더 많아졌으면, 흙바닥이 아닌 아스팔트였으면, 골대에 걸린 그물이 찢어지지 않고 언제나 달려있었으면. 그렇다면 우리들은 더 높이 날아오를 수 있을 텐데. 우리들의 바람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94년을 기점으로 내가 다니던 학교는 물론이요, 인근의 중, 고등학교 운동장 한 쪽에는 농구골대들이 줄을 이어 세워졌고 순차적으로 아스팔트나 우레탄이 깔렸다. 우리의 요구들은 그렇게 하나씩 이뤄졌다.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비인기종목이 된 농구와 함께 쪼그라든 것들

지난 봄, 몇몇 학교 운동장을 방문할 일이 있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농구가 비인기 스포츠가 되었다는 믿기지 않는 현실을. 아스팔트나 우레탄으로 잘 만들어진 코트 어디에서도 농구공을 튀기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고, 어느 곳에서는 아예 어린이 축구교실이 펼쳐지고 있었다. 하얀 그물만이 골대 아래 외로이 매달려 언제고 자신을 철썩 하고 뚫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단순히 하는 스포츠만의 문제일까. 그렇지 않다. 겨울 스포츠의 꽃이었던 농구는 보는 스포츠로서의 위상도 이미 바닥으로 추락한지 오래다. 시청률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당장 내 주변에는 각 프로팀의 대표적인 선수들 명단은 고사하고 당장 작년 우승팀이 어디였는지 아는 사람조차 드물다.

혹자는 이제 즐길 것들이 많아져서, 몰입할 수 있는 게 많아져서라고 이야기하지만 쉽사리 동의하기 힘들다. 그러한 분석은 야구의 인기상승을 설명하지 못한다. 종목으로서의 매력이 문제일까. 그렇지 않다. 구기 종목 중에 농구보다 다이나믹한 느낌을 주는 스포츠는 결코 많지 않다. 게다가 농구는 축구와 더불어 하는 스포츠와 보는 스포츠 모두를 쉽게 충족시켜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스포츠다. 당장 농구공을 들고 인근 학교 운동장에만 가도 혼자 즐길 수 있다. 게다가 20년 전과 비교하면 농구 인프라 역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다. 당장 그 시절에는 체육관에서 농구를 한다는 것은 정말 선택받은 자들이나 할 수 있는 행위였다.

 
농구대잔치 시절, 우승컵을 들고 인사하는 연세대팀 

이런 생각들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다른 것들의 몰락에도 생각이 미친다. 94년만 해도 민주노조와 전교조는 불법이었다. 개혁, 진보 진영에 우호적인 언론이라고는 한겨레 정도였고 인터넷이 대중화되지도 못한 시절이었다. 진보정당도 없었으니 진보정당의 국회의원은 당연히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합법적인 민주노총과 진보진영에 우호적인 인터넷 환경 그리고 여러 명의 진보정당 국회의원이 존재한다. 개혁진영이라는 민주당의 국회의원들 숫자도 130석에 육박한다. 1994년의 그 시절 우리에게 제발 있었으면 하는 많은 것들을 우리는 이제 갖고 있다. 그런데 그 20년 후의 모습은 왜 이럴까. 20년 전의 우리는 과연 농구의 몰락을 상상이나 했을까. 마찬가지로 개혁과 진보의 쪼그라듦을 예견이나 했을까.


예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다

지금 있는 프로리그를 없애고 농구대잔치로 돌아간다고 과거의 전성기가 되살아나지는 않는다. 이제껏 만들어놓은 정당과 노동조합을 부정하고 다시 과거의 운동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그렇지만 때로는 강렬한 기억의 장면 하나가 복잡하게 흘러가버린 세월을 정리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94년의 그 새벽, 등짝에서 열기를 피어내던 그 사람들은 지금 어떤 인생의 코트 위에 서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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