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수의 이야기를 담은 아름다운 노래 'Green Green Grass of Home'

진보란 무엇인가? 참으로 답하기 어려운 물음이다. 그러나 나는 진보가 무엇인가는 몰라도 진보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물음에는 답할 것이 있다. 내가 생각하는 진보는 가장 낮은 곳에 있다. 이를테면, 예수님은 그의 종들에게 철저히 낮은 곳으로 임하라 강변하셨기에 바벨탑처럼 오만하게 우뚝 솟은 대형건물의 교회엔 진보가 없다. 우리 시대 가장 빛나는 진보의 아이콘으로 체 게바라를 떠올리는 것도 그가 언제나 낮은 곳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혁명을 모르던 철부지 대학생 시절에도 그는 의대생으로서 호사를 부리기보다는 오토바이에 몸을 맡기고 라틴 아메리카의 낮은 곳을 찾았고 나환자촌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펼쳤다. 쿠바 혁명을 성공시킨 후에도 게바라는 국립은행장이나 산업부 장관의 권좌를 뒤고 하고 소총 한 자루 들고 아프리카 콩고에서 볼리비아에서 보다 덜 추한 세상을 꿈꾸는 이들과 함께 게릴라로 생을 마감했다.
 

 


이 땅에서 가장 낮은 곳, 가장 그늘진 한 곳으로 ‘감옥’을 생각한다. 신영복의 말대로 감옥은 자본주의사회의 모순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이 웅변하듯, 죄인의 여부는 자본의 여부가 결정한다. 그리고 죄를 짓게 되는 형편도 개인의 성격이나 자질보다는 그가 처해 있는 삶의 물적 조건에 기인하는 바가 많다. 그러니까 밑바닥 삶을 사는 사람들이 죄를 지어 이 사회의 가장 그늘지고 낮은 곳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감옥에 가는 사람들 가운데 이런 감상적인 시선을 받을 자격이 없는 인면수심의 흉악범들도 많을 것이다.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갈 이들이 대부분 그러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 성장했더라면 이들도 우리와 같은 선량한 시민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악마 같은 인간도 경우에 따라 천사 같이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가 인간이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회로부터 이미 격리된 삶을 교도소에서 보내고 있는 사람의 목숨을 끊는 행위가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고민을 해봤으면 하는 뜻으로 이 글을 열어 본다.
 

 


사형수의 이야기를 담은 아름다운 노래 [Green Green Grass of Home]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노래는 1965년에 컨추리 송 라이터 컬리 푸트먼 Curly Putman이 작곡하여 여러 가수들에 의해 불려 지면서 오늘날 팝의 고전으로 매겨져 있는 명곡이다. 이 곡을 부른 유명 가수들로는 톰 존스 Tom Jones(1966), 조운 바에즈 Joan Baez(1965), 나나 무스꾸리 Nana Mouskouri(1967), 엘비스 프레슬리 Elvis Presley(1975), 케니 로저스(Kenny Rogers, 1977) 등이 있는데, 이 중 톰 존스의 것과 조운 바에즈의 버전이 가장 유명하다. 위키피디어에는 이 곡을 부른 세계 여러 나라 가수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흥미롭게도 우리나라 가수 조영남의 이름과 함께 그가 번안해 부른 곡명을 한글 제목과 함께 한글발음을 영문표기로 적고 있다: ‘고향의 푸른 잔디(Gohyang-ui pooreun jandhi)’.
 

 


그렇다. 현재 사오십대의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이 노래의 선율은 1970년대에 조영남 씨가 원곡의 내용과는 너무 다른 노랫말로 우리에게 소개한 바람에 이 노래가 담고 있는 참뜻을 모르시는 분들이 많을 것 같다. 생각건대 조영남 씨가 이 아름다운 노래의 의미를 왜곡하려는 뜻은 없었을 것이고, 아마 박정희 정권의 시대 분위기상 이 노래를 곧이곧대로 번역하여 부르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판단한다. 조영남에 의해 '새마을운동'이라는 국가시책에 부응하는 목가풍의 노래로 변질되고만 이 노래가 원래 담고 있는 이야기에 대해 위키피디어에 적힌 영문을 그대로 우리말로 옮겨 본다.

한 남자가 어릴 적 고향에 돌아오는데, 아마도 젊은 시절 떠난 뒤로 고향 땅을 처음 밟는 듯하다. 사내가 기차에서 내릴 때 부모님이 마중 나와 계시고 사랑하는 그의 연인 메리가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 모두가 행복한 모습으로 따뜻하게 그를 반기며, 모두가 부드러운 미소로 두 손 맞잡고 그를 맞이한다. 사내는 메리와 함께 느긋한 발걸음으로 어린 시절 추억의 장소를 거니는데, 그 중엔 자신이 올라타 놀던 오래된 떡갈나무도 있다. “아~ 고향의 푸른 잔디를 밟으니 행복하도다.” 그러나 이 행복한 분위기를 노래하는 선율과 가사는 다가올 슬픔의 전조일 뿐......
사내가 잠에서 깬 시점에서 노래가 갑자기 대사로 바뀐다. “그때 잠에서 깨어 주위를 둘러보니,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방엔 온통 잿빛 벽뿐. 그제서야 깨달았어, 내가 꿈을 꾸고 있었다는 것을.” 실로 그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가수의 나레이션이 끝나고 노래가 다시 계속될 무렵 우리는 사내가 사형집행일 새벽에 잠에서 깼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주위엔 간수와 슬픈 표정의 늙은 신부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동이 트면 우리는 서로 팔을 낀 채 형장을 향해 걸어가겠지.” 그는 죽어서 고향 땅에 돌아오리라. “그래, 오래된 떡갈나무 그늘 속에서 마을 사람들 모두가 고향의 푸른 잔디 아래에 나를 눕혀 주실 때, 우린 모두 함께 하게 될 거야.”

 

 

 


이 곡의 압권은 2절이 끝나고 난 뒤에 가수가 노래 대신에 나레이션을 하면서 분위기가 반전되는 부분이다. 음악적 분위기의 반전보다 스토리의 반전이 너무 충격적이다. 사실, ‘고향’이란 단어는 가치중립적인 언어가 아니지 않은가. ‘어머니’란 낱말처럼 ‘고향’은 모든 이에게 풍성한 행복을 안겨다 주는 선물보따리와도 같은 것이다. 이 노래에서도 고향의 전형적인 소재들이 등장한다. 고향의 부모님, 마을 사람들, 고향집, 오래된 떡갈나무...... 그런데 갑자기 이 모든 행복한 장면들은 꿈이었고 눈앞에 펼쳐진 현실적 장면은 ‘회색빛’ 벽과 함께 나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간수와 늙은 신부이니 어찌 이 보다 더 심각한 반전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 청천벽력과도 같은 반전을 알리는 노랫말은 “그 때 눈을 떠보니(Then I awake)...”로 시작하는데, 톰 존스는 이 부분을 감정이 짙게 밴 특유의 중저음 목소리로 나레이션을 읊으면서 비극미를 고조시킨다. 반면, 조운 바에즈의 노래에서는 그냥 1~2절과 마찬가지로 노래로 불러짐으로써 시적 의미의 반전 외에 음악적 반전은 피해가는 것이 얼핏 이해가 안 갈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조운 바에즈의 버전은 바이올린과 스틸 기타가 주축이 되어 연주되는 전형적인 컨추리 풍으로 음악 자체가 경쾌한 느낌을 준다. 이 곡은 조성(key)도 단조가 아닌 장조인데, 경쾌한 홍키통크 리듬에다 심각한 나레이션도 제거되고 없으니 노랫말을 모른채 그냥 듣기만 하면 하등의 심각할 이유가 없는 이지 리스닝(easy listening)의 노래로 들릴지 모른다. 요컨대 예술의 형식과 내용이 심각하게 모순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바로 이 심각한 역설로 인해 이 노래가 더욱 아름답게 승화되는지도 모른다. 노랫말을 다시 살펴보자. 죽음의 순번을 기다리고 있던 주인공은 죽기 바로 전 꿈속 고향에서 행복에 겨워 있었다. 그 뒤 잠에서 깨면서 천당에서 지옥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주인공은 이 세상에서 어느 누구도 경험하지 못할 이 심각한 반전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오히려 이 죽음을 행복하게 맞이하는 듯하다. 더구나 조운 바에즈의 버전에선 노래 말미에서 다른 곡에선 없는 노랫말이 덧붙는다.

Yes, we'll all be together in the shade of the old oak tree
When we meet beneath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그래, 오래된 떡갈나무 그늘 아래서 우리 모두는 함께 할 거야.
언젠가 우리는 고향의 푸른 잔디 밑에서 만날 테니 말이야.


삶과 죽음이 하나라 했던가. 사형수든 모범시민이든 누구나 죽어서 땅에 묻히는 것이 부질없는 인간의 삶이 아니던가. 적어도 죽고 나면 평등해 지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는 믿음에서일까 저승사자를 맞으러 가는 사람의 심정이 어쩌면 이처럼 평온할 수 있을까? 영어(囹圄)의 몸을 벗어나 죽어서라도 고향의 푸른 잔디에 안기면 행복할 것이기에 기꺼이 죽음을 환영한다는 그 역설의 미학을 충실하게 전하는 면에선 톰 존스의 버전보다 조운 바에즈의 컨추리 버전의 <고향의 푸른 잔디>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참고로, 이 곡의 오리지널 버전인 컬리 푸트먼의 곡도 컨추리 풍이다.
 

 


너무 슬퍼서 아름다운 이 노래는 우리에게 ‘사형제도’에 대한 사색의 의무를 일깨워준다. 얼마나 끔찍한 범죄를 저질러 사형을 당하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죽음을 앞둔 순간에 저렇게 훌륭한 성찰을 하는 ‘생각하는 갈대’의 목숨을 끊는 법집행이 과연 옳은 것일까?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노랫말에 지나지 않고 사형수 가운데 저런 사람 몇 되겠냐고 회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형수와 꾸준히 소통하는 종교인들의 수기를 보면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흉악범들이 선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많은 사례를 전하고 있다. 삼중 스님이 쓰신 <사형수의 마지막 편지> 따위를 읽으면 책장을 덮는 순간 ‘내가 이들보다 뭐가 나은가’ 하는 생각이 찾아든다. 사형제도의 모순은 “한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선한 상태에 있을 때 생을 정지시키는” 점에서 이 보다 더 슬픈 역설이 있을 수 없으며 이 보다 더 비인간적이고 심각한 불합리가 없다 할 것이다. 그리고 박정희 같은 독재자가 저지른 사법살인은 말할 것도 없고, 흉악범죄의 경우에도 인간이 판단을 내리는 이상 무고한 사람이 사형에 처해질 가능성을 간과할 수 없다. 그 모든 이치를 다 떠나, 한 인간의 생명은 전 우주보다 더 무겁고 엄숙하다 했는데, 어찌 인간이 인간의 손으로 인간의 생명을 끊는 것이 정당화 될 수 있을 것인가?


Green Green Grass of Home
The old home town looks the same as I step down from the train
And there to meet me is my Mama and Papa
(And) down the road I look and there runs Mary hair of gold and lips like cherries
It's good to touch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Yes, they'll all come to meet me arms a reaching smiling sweetly
It's good to touch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열차에서 내려 본 나의 옛 고향은 예전 모습 그대로구나
저 너머로 내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날 맞이하러 와계시고
저 길 아래에서는 금발에 앵두빛 입술의 메리가 달려오는구나
고향의 푸른 잔디를 밟으니 너무나 좋구나
아무렴, 그렇지
모두가 나를 맞아 함박웃음으로 포옹하는 가운데
고향의 푸른 잔디를 밟으니 이 어찌 행복이 아니리.

The old house is still standing tho' the paint is cracked and dry
And there's that old oak tree that I used to play on
Down the lane I walk with my sweet Mary hair of gold and lips like cherries
It's good to touch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내가 살던 집도 예전 그대로구나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빛이 바랬을 뿐...
내가 타고 놀던 오래된 떡갈나무도 그 자리에 있구나
길 아래로 내 사랑스런 메리와 함께 거닐고파
금발에 앵두빛 입술의 메리와 함께...
고향의 푸른 잔디를 밟으니 너무나 행복하도다

Then I awake and look around me
At four grey walls that surround me
And I realized, yes I was only dreaming
For there's a guard and there's a sad old padre arm in arm
we'll walk at day-break
Again I'll touch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Yes, they'll all come to see me in the shade of that old oak tree
As they lay me 'neath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그때, 잠을 깨서 주위를 둘러보니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잿빛 벽 뿐
그제서야 모든 것이 꿈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어
간수와 슬픈 얼굴을 한 늙은 신부님이 서 있으니 말이야
동이 트면 우리는 서로 팔을 낀 채 (형장을 향해) 걸어가겠지
(그러면, 꿈에서처럼) 다시 고향의 푸른 잔디에 안길 수 있겠구나
그래, 오래된 떡갈나무 그늘 속에서
마을 사람들 모두가 고향의 푸른 잔디 아래에 나를 눕혀 주실 때,
우린 모두 함께 하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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