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천탄가에 보천사라는 절이 있었으니…’

근무를 마치고 자전거로 퇴근하는데 날씨가 생각외로 포근하였다. 오랜만에 구미보까지 다녀올 요량으로 산호대교를 지나고 해평솔밭을 지나던중... 해평 구미청소년수련원 입구에 석조여래좌상 안내 표지가 있는게 아닌가~ 낙동강 자전거길이 개통되고 이 길을 수백번을 더 지나면서 왜 오늘에야 보게 된것일까? 무심코 지나가면 많은것들을 놓치고 지나가게 되는구나~ 새삼 느끼게 된다. (일전에도 말한바 있지만 구미 하면 막상 떠오르는 문화 유산이 딱히 없다. 하지만 관심을 가지고 보면 곳곳이 문화유적이 아닌곳이 없다. 우리 삶의 터전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미(선산)는 청동기시대 이후부터 소국가시대와 삼국시대를 거치며 한반도 최초로 불교가 전래 되었으며, 성리학의 대가이자 충절의 인물인 야은 길재선생과 많은 석학들을 배출한 고장이다. 한반도에 최초로 불교가 전해진 성지로, 대한민국 성리학과 유교의 걸출한 위인들을 배출한 성지로써의 구미를 다시 조명해 봄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해평 구미청소년 수련원에서 차 한대 여유있게 지나갈 수 있을 정도 되는 고샅길을 따라 약 600미터 가량 올라가면 보천사가 나온다.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로 정확한 창건시기는 알 수 없으나 절터에서 통일신라시대 조성된 석조여래좌상이 발견된 것 보아 그 무렵에 창건되었으리라 추정된다. 고려 충렬왕(忠烈王, 재위 1274~1308)때 왕자 왕소군(王小君)이 절에서 요양하며 보천(寶泉)이라는 샘에서 솟는 물을 마시고 병이 나았다 하여 보천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1618년(광해군 10) 발간된 경상도 선산도호부 읍지 <일선지 一善誌>에 ‘보천탄가에 보천사라는 절이 있었으니…’라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보천탄이란 현재의 절 인근의 낙동강 여울을 부르는 말이다. 오랫동안 폐사된 채 절 이름만 전해 내려오다가 옛 절터에 묻혀 있던 불상(선산 해평동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492호)을 발견, 1959년 보호각을 마련하고 불상을 봉안하면서 다시 법등을 밝히게 되었다.

현재 보천사는 대웅전·설법전·삼성각·요사 2동으로 이루어진 단촐한 규모이다. 하지만 걸물과 건물 사이가 떨어져 있고 상대적으로 절터가 넓어 휑뎅그렁한 느낌이 들었다.


1981년 건립된 삼성각은 정면 2칸·측면 1칸 규모이다. 


불교의 제도화, 현대화, 인간화, 미래화 등 공로로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대만 성운대사의 인생을 뒤돌아 보게 해주는 고마운 질문 12가지.

보천사 대웅전 우측 잔디밭에 세워진 비석으로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은 중국 송나라때의 불서인 벽암록(碧巖錄)에 나오는 글귀이다. 

운문 선사(雲門禪師)가 보름날의 법회에서 제자들에게 말했다. "십오일 이전은 너희들에게 묻지 않겠다. 십오일 이후에 대해서 한마디 일러보라."

한번 지나가버린 과거사는 묻지 않을 테니 그 대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는 말일 것이다. 여럿의 얼굴을 쭉 훑어보았지만 하나같이 꿀먹은 벙어리였다. 이윽고 선사는 자신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 날이 날마다 좋은 날. 

 

 

대웅전은 팔작지붕, 다포양식, 화려한 단청으로 꾸며져 있으나 2001년에 신축된 건물이다. 작은 암자나 사찰의 대웅전에서 오는 정감가는 느낌은 없었다. 정면3칸과 측면 3칸으로 내부에 보물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보천사 대웅전에 주존불 모셔져 있는 이 불상은 얼굴과 신체의 일부에 약간의 손상을 입었으나 광배와 대좌는 모두 갖추고 있다.

나발(螺髮)의 머리에는 육계(肉髻)가 표현되었으나 머리와의 구분이 불분명하다. 불상의 얼굴 일부분인 눈과 코는 시멘트로 보수되어 다소의 아쉬움이 있다. 양감을 잃은 작은 얼굴, 힘없이 수평으로 반쯤 뜬 눈, 미소를 잃은 작은 입 등은 통일신라 전성기 불상의 풍만하고 긴장감에 찼던 모습과는 달리, 왜소하고 섬약해진 신라 말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신체 또한 어깨는 좁고 움츠린 듯 각이 지고 가슴도 평면적이어서, 부처의 위엄이나 당당함이 사라지고 생동감 없는 왜소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두 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였다. 통견(通肩)의 불의(佛衣)는 탄력성이 없는 이완되고 약간 처진 듯한 밀집한 평행 옷주름[平行密集形衣文]으로, 배에는 띠 매듭이 표현되어 있다.

광배는 주형 거신광(舟形擧身光)으로 약간의 손상과 풍화 현상이 보이지만 대체로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내부는 두 줄의 선으로 두광(頭光)·신광(身光)을 구분하여 그 안에 보상화문(寶相華文)을 새겼다. 두광 안에는 연화문을 새겼다.

두광과 신광의 밖에는 향로와 네 구의 화불(化佛), 삼존좌상을 조각하였다.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새겨 화려하고 섬세한 장식성을 보여 주고 있다. 이와 같은 광배 형식은 향로를 배치한 점이 특이할 뿐 9세기 광배 형식과 같은 것이다.

대좌 또한 8, 9세기에 유행한 팔각연화대좌이다. 상대석에는 중판앙련(重瓣仰蓮) 16엽을 조각하고 각 연판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중대는 팔각으로 각 모서리마다 우주(隅柱 : 모서리 기둥)를 표현하고 앞면에는 불좌상, 양 측면과 후면에는 꽃가지를, 그밖에는 비천상(飛天像)을 조각하여 형식화되어 가는 불상과는 대조적으로 화려하고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중대와 하대 사이에는 중대굄이 마련되었는데, 이것 또한 9세기 중엽의 불상대좌에 나타나는 유형이다. 하대는 복판복련(複瓣覆蓮 : 아래로 향하고 있는 겹잎의 연꽃)이 새겨진 것과 안상석(眼象石)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안상 내에는 양끝에 운문(雲文) 같은 것이 새겨진 점이 특이하다. 4각의 지대석(地臺石)에는 모서리마다에 지름 5.5㎝, 깊이 3.5㎝의 구멍이 뚫려 있다.

이상과 같은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불상은 청룡사석조여래좌상(보물 제424호)이나 부석사(浮石寺) 자인당(慈仁堂)에 봉안된 영주북지리석조여래좌상(榮州北枝里石造如來坐像, 보물 제220호) 등 9세기 불상의 양식과 유사하다. 섬세하고 화려한 장식성이 짙은 광배와 대좌 또한 9세기 무렵부터 나타나는 것으로, 이 불상의 제작 연대는 신라 말기, 특히 9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선산해평동석조여래좌상」(진홍섭, 『고고미술』 30, 1963)
『선산지구고적조사보고서』(정영호, 단국대학교박물관,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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