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힘들지 않고 신나게 놀 수도 있는 여행지

오래전부터 아내와 나는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두 영화를 좋아했다. <전망 좋은 방>과 <남아있는 나날>을 지금까지 각각 열 번은 넘게 본 것 같다. 전망 좋은 방은 헬레나 본햄 카터가 머리가 큰 가분수 분장이나 원숭이 분장 등을 하기 전 젊은 시절에 주연한 영화인데, 잔잔한 듯 하지만 시종일관 깔깔대며 보게 되는 영화이다.

젊은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바보 같은 모습도 재미있고 두 주인공의 열정에 감동받게 된다. 남아있는 나날은 안소니 홉킨스와 엠마 톰슨의 절제되었지만 강한 연기를 보는 맛이 일품이다. 이렇게 조용한 이야기로 사람을 끝까지 끌고 갈수 있구나 싶었고, 마지막엔 펑펑 울게 된다. 오래전에 우리는 제임스 아이보리의 영화이야기로 많이 친해졌다.

너무 사랑한 나머지, 책까지 사서 읽어본 우리는 전망 좋은 방에서 주인공과 그의 가족이 선택한 여행지에 언젠가 꼭 가보자고 말하곤 했다. 흔히 그렇듯 결혼 10주년에는 그곳 ‘프로방스’에 꼭 가자고 약속했었고, 올 가을이 10주년이다(젠장, 벌써?!). 흔히 그렇듯 그럼 애들은 어떡하냐, 그 먼 여행을 어린 애들이 견딜 수 있을까, 12주년도 의미 있고, 15주년이도 의미 있지 않을까, 20주년에는 반드시... 뭐 그러면서 우리는 ‘돈이 아쉬운 아쉬움’을 절제되었지만 강한 연기로 훌륭하게 숨겼다.

그러나 10주년이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기에, 아이들이 힘들지 않고 신나게 놀 수도 있는 여행지를 찾아내었으니 그곳이 바로 <청도 프로방스 빛 축제>였다. 그래 맞아! 꿈의 절반은 이룬 셈이야. 프로방스잖아. 프로방스.

소싸움으로 더 유명한 청도이지만, 소싸움 경기장 근처의 맛있는 소고기집도 그냥 지나치고 우리는 프로방스로 갔다. 떡볶이, 오뎅도 먹고, 놀이기구도 타고, 야바위 총 쏘기도 하고, 거울 미로 안에서 숨바꼭질도 하고 사진도 잔뜩 찍었다.

아내는 언젠가는 자기의 서재를 ‘프로방스식 인테리어’로 꾸밀 거라며 어서 돈 벌어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럼그럼, 10년 안에는 반드시. 가까스로 예약한 아담한 숙소에 애들 좋아하는 통닭도 사들고 가려는 참에 우리는 발견했다. ‘산토리니 카페’를. 그렇다. 영화 <일 포스티노>도 좋아했던 우리는 언젠가 산토리니도 꼭 가보자고 약속했었다. 그곳에서 한적한 산책을 하자고 약속했었다. 나는 말했다. 야, 너 아냐? 요즘 산토리니가 사람들이 하도 많이 와서 완전 시장바닥 북새통이래. 막 줄서서 다녀야 된대.

우리는 프로방스에 온 그날 산토리니의 꿈도 이루게 된다. 뭘 너무 많이 먹어서 배불러 죽겠는데 커피와 케이크도 먹었다. 산토리니 카페에서. 다음날은 유명한 프로방스 와인 대신 근처의 와인터널에 가서 ‘청도 홍시와인’을 마셨다. 꽤 맛있어서 한 병 더 사들곤, 소싸움 경기장 근처의 소고기 육회비빔밥집에서 반주로 까마셨다.

오늘 나는 이글을 쓰고자 인터넷을 검색해보다가 몇 가지 문제점을 발견했다. 영화 <전망 좋은 방>에서 주인공과 가족들이 선택한 여행지는 프로방스가 아니고 플로렌스였다. 프랑스 남동부의 프로방스가 아니고, 이탈리아 중부의 플로렌스(피렌체)였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영화 <일 포스티노>와 산토리니는 관계가 없었다.

우리는 도대체 오랜 시간 무슨 영화를 좋아했던 것이며, 무슨 책을 좋아했던 것이며, 무슨 꿈을 꾸었던 것인가? 이게 다 확실하지 않으면 찾아보아야 할 텐데 참고 말았던 오랜 습관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언제나 궁금한 점이 있으면 잘 참는 편이다.

우리는 10주년의 꿈을 우리의 방식으로 이루었다고 결론내었는데, 아내에게 이 사실을 말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이다. 그러나 걱정할 것 없다.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플로렌스 캠핑장과 포항 플로렌스 펜션도 찾아두었기 때문이다.

아하! 바닷가에서 회 한 사라 떠가면 되겄네. 소주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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