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박 기고] 마지막 페스티벌(Festival) 2편

전역 후 1997년, 아르바이트를 하며 IMF라는 단어를 만났다. 나의 주유소 일자리가 없어진 건 아니라서 도통 실감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먼저 졸업해서 취업했던 92학번 여자 선배가 ‘짤린’ 기념으로 술 한 잔 사겠다고 한다.

선배로서의 권위를 잃어본 적 없었던 그녀는 후배 앞에서 울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서러운 것이 구조조정, 인수합병의 과정에서 막내인 자기 혼자 쫓겨나게 된 점이란다. 자기 자리를 유지하게 된 남은 자들이 보내는 위로의 눈빛을, 그리고 숨기던 안도의 눈빛을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92학번 여자 선배는 그 후 몇 번의 취업도전에 실패하고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버지의 가내 사업을 돕고 있다. 그리고 미혼이다.

98년에 복학하고 나니 학생들의 분위기가 조금 과장하자면 ‘쑥대밭’이었다. 부모들의 사업이나 회사에서의 위치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고, 더 이상 학비지원을 의지할 수 없어서 조바심이 많았다. 과대표가 봄MT나 페스티벌 이야기를 꺼내면 과격한 욕을 듣기 일쑤였다. 많은 학과에서 축하행사나 졸업여행이 없어졌다. 98학번인 지금의 내 아내는 (내가 그렇게 재미있어 했던) 페스티벌이란 행사를 경험하지 못했다. 내가 파트너가 되어 줄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페스티벌을 경험 못한 아내, 내가 파트너 되어줄 수 있었는데

건축공학을 전공했던 나와 선후배들은 염두에 두고 있던 건설업체들의 줄도산을 넋이 나간 채 보았다. 당장은 사회로 나가면 위험하다는 얘기가 오고갔다. 졸업을 늦추려고 1년 씩 휴학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나도 그랬다. 휴학 중에 여러 자격증을 취득하던 우리들은 경기침체가 단시간에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분위기를 실감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언급되지 않았던 토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어학연수를 떠나는 학생들도 생겼다. 스펙이란 단어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던 때다. 어렵게 취업한 친구들도 1년을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회사를 그만 두었다. 하나 둘씩 다른 길을 찾아 나서기 시작하더니, 졸업을 앞두고 있을 시점에는 대부분이 전공을 살려 취업하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많은 졸업생이 불참하여, 졸업식 분위기가 썰렁했다. 그래도 축하해야할 자리라며 가족과 함께 참석한 친구들의 얼굴빛은 회색이었다. 대부분 이미 다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공사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친구가 제일 많았고, ‘당분간’이라는 단서를 달긴 했지만 학원 강사를 하겠다는 친구도 꽤 있었다. 정부의 IT산업 육성정책의 일환으로 IT교육을 무료로 받을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는 학원에서 돈도 안 받고 무언가를 가르쳐준다면 원하는 바가 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그런데 도리어 교육을 받으면 학원에서 식사비도 주고 IT업체로의 취업알선도 해 준다는 것이다. 컴퓨터 조립에 관심이 많고, 게임을 좋아하던 많은 친구와 후배들이 그쪽으로 몰려갔다.

사실 우리는 ‘직업교육’이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이 교육을 받은 후 취업한 친구와 후배들은 회사가 망하거나 자신이 실직하는 경우 다시 취업하기 전까지 ‘실업급여’를 받기도 했는데, 이 제도에 대한 이해도 없었다. 실업급여를 받는 날은 한턱 쏘는 날이었다.

비교적 취업하기 쉽다는 곳은 영업직이었다. 아버지의 실직으로 당장 돈벌이가 급한 동네친구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판매왕의 꿈을 품고 외국계 보험회사에 들어갔다. 사회 분위기가 이러하니, 학교 신문에 시사만화를 그리던 경험을 살려 만화가의 길을 가겠다는 나의 뜻을 아버지는 말리지 않았다. 지방에서 문화산업에 종사하겠다는 말을 진지하게 여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무작정 서울에 올라갔고, 이미 가뭄이 오래 가고 있었던 집안 형편상 더 이상의 지원도 부탁할 수 없었다. 서울 간다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건넨 가르침은 ‘어려워도 빚지지 마라.’였다.

당시 노무현에게서 서태지로부터 받았던 셀렘을 느꼈다

정치에 관심 없다고 소문난 X세대다.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에 반대할 생각은 없으나 나는 느낀다. 자기 밥벌이가 시원치 않은 상태에서는 정치 참여가 사치로 느껴지는 심리가 분명히 있다. 현재가 힘들고 불안하므로 더욱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겠냐는 질문을 받으면 그 질문 자체가 무척 야속하게 들리기도 한다. 억하심정이 솟구친다. ‘그래도 너네는 직업이 있잖아?’

나와 비슷한 세대들은 당시 그 불안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러나 노무현은 신선했다. 나는 당시 노무현에게서 서태지로부터 받았던 설렘을 느꼈다. 우리나라의 오랜 역사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진 많은 지도자들과 노무현은 달라보였다. 그는 우리와 가까운 사람 같아 보였다. 독한 감기가 걸린 몸으로, 나라도 한 표 보태자고 집을 나서 투표장으로 걸어갔던 기억이 난다.

서태지가 만든 노래 ‘교실이데아’ 중에 ‘왜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라는 가사가 또한 지령처럼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는 노무현을 ‘팬심(Fan心)’으로 선택했음을 인정한다. 나중에 나와 친구들은 지난 과거와 달리 2002년 대선에 모두 참여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사전에 서로 대화하지 않았지만, 투표 성향이 같았음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자기의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개인주의자’들이니까.

서른을 맞이하는 자리의 소주 맛은 유난히 썼을 것이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란 노래가 전하는 정서와 우리는 맞지 않았다. 스무 살에 상상해 본 서른이 이러 했나 자문했다. 제대로 ‘자리’를 잡고 사회생활을 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서른이란 나이는 결혼이란 굴레와 같이 한다.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막내라서 혼자 쫓겨났던 92학번 여자선배가 소주를 가장 많이 마셨던 것 같다. 하필 그녀의 꿈이 일찍 결혼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술값 계산은 신용 카드로 해결했다. 한 사람이 적게는 두 개에서 대여섯 개까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카드사용이 익숙했고, 사용금액을 다음 달에 어떻게 결제하는지는 서로 묻지 않았다. 이것 또한 빚이란 것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어떤 행동을 많은 사람이 똑같이 하고 있으면 문제라고 여기지 않는 법이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이런 말을 제일 많이 들었다. ‘남들도 다들 그래.’ 서로가 묻지 않고 대답하지 않았기에 가려져 있었나 보다.

'신용카드 돌려막기'
채무독촉을 견디지 못한 친구 '야반도주'


숨겨져 있던 문제는 곧 터져 나왔다. IT업체들로 몰려갔던 친구와 후배들은 월급이 6개월에서 1년 씩 밀려, 체불임금을 받을 때까지는 회사를 그만 둘 수 없다고 했다. 그 동안은 몇 장씩 되는 신용카드로 버텼다. ‘돌려막기’가 흔한 말이 되었다. 벤처열풍 이후 부실업체들이 도산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일자리를 옮겨 다니느라 골치를 썩고 있었다.

외국계 보험회사에서 일하던 동네친구는 아는 사람을 총동원해 실적을 채우는 ‘소개시장’이 고갈되자 어려움에 봉착했다. 역시 열 장 가까이 되는 카드로 돌려막으며 버티고 있었지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쏟아지는 채무독촉을 견디지 못해 직업을 버리고 그의 아내와 ‘야반도주’를 했다.

그의 소식이 끊어진지 1년 쯤 후에 어느 시골마을 제일 구석진 집에 살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집에 전에 살던 사람 역시 그와 같은 이유로 도시에서 도망친 가족이었다. 많은 친구와 후배들은 2년차, 3년차 공무원 고시생이 되어 있었다. 몇 년 동안 반복되는 낙방의 스트레스로 주변과의 소통에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도 많았다. 비합리적인 말을 반복하거나 쉽게 화를 내어 만남의 자리가 씁쓸하게 끝나기도 했다.

모두들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역시 술값은 카드로 계산했다. 당시 9급 공무원 연령제한 32세라는 ‘마지노선’에 닿은 친구들은 ‘마지못해’ 다음 해부터 군무원 시험에 도전했다.
 
※ 다음편에 이어집니다.

(1편 /  난 지방대93, 들어봤나 'X세대'?)

만화가 김수박
뉴스풀 협동조합 조합원
만화 [아날로그맨], [오늘까지만 사랑해], [내가 살던 용산](공저), [삼성에 없는 단 한 가지 : 사람 냄새], [만화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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