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복지 실태와 시공간의 상품화

현재 우리나라에서 시행되고 있는 장애인의 무고용제도에서는 공기업의 경우 전체고용의 3%, 민간기업의 경우 상시 노동자 300인 이상 사업주에게 2%의 고용을 법적으로 강제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실제 고용되어 있는 수는 이에 비해 훨씬 적을뿐아니라 적용예외업종이 너무 많아 실제 적용되는 곳이 극히 적어, 사실상 이 제도가 ‘유명무실’하다는 비판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최근 5년간 공직에 임용된 장애인의 수는 연평균 260~280명에 불과하다. 연간 1만명가량이 정규직 공무원으로 채용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의무고용률(3%)에 여전히 못 미치는 수치이다. 심지어 2010년 장애인 고용인원은 186명으로 그마저 전년도의 절반 이하 수준으로 줄여버리는 것이 우리나라 장애인 복지의 현 주소이다. 하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이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장애인의 비율은 15%정도로 ‘추정’된다. ‘추정’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실제로 우리나라에서의 장애기준은 엄격한 동시에 임의적이여서 다른 나라들에 비해 말도 안되게 낮은 ‘장애인출현율’인 5%로 되어있다. 결국, 10%는 장애인이라는 규정에서 배제되어 고통받고 5%는 장애인이라는 규정으로 차별받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의 모습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15%는 살기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장애를 증명해야만 하는 야만적인 나라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다.

한국 장애인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45.8%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마저도 전국가구 월평균소득의 54%. 절반밖에 미치지 못하는 임금을 받고 일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가 보여주는 또 다른 단상은 취업을 했다한들, 저임금 단순직에 종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직장에서의 차별대우 또한 심각한 상태이다. 비장애인중심사회에서 장애의 다양한 특성들은 “장애인”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아주 편리하게 묶여버림으로써 청각장애인과 시각장애인의 차이보다 비장애인과 둘간의 차이만을 중요시 이야기한다. 세상에 장애와 관련하여 두 가지 인간만이 존재할 뿐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하지만 이윤논리는 훨씬 더 세밀하고 치밀하게 삶의 구석구석을 스민다. 정상적인 노동시간을 마치고 퇴근하는 ‘칼퇴근’이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묘하게도 비도덕적이라는 인상, 혹은 ‘편한 직장’이라는 뤼앙스를 느낀다. 휴게시간이나 퇴근 이후의 ‘업무외 시간’까지도 우리는 끊임없이 이윤의 논리에 따라 그 시간의 가치를 평가받는다.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시는 일은 ‘비생산적인’ 무가치한 일이고, 틈틈이 쉬는 시간을 쪼개 자기계발에 힘쓰는 인간이 우리사회의 모범적 인간이라고 사회는 이야기한다. 즉, 임금노동체제안에 존재하는 가치를 생산하는 것, 이윤을 추구하는 것만이 ‘가치있는 것’으로 존재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 곳에서 이윤이 되지 못하는 어떠한 공간과 시간도 존재로서 인정받지 못한다. 장애는 사회적으로 여기에서 결정된다. 임금노동이 가능한 신체적, 정신적 불편함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장애로 분류되지 않는다. 위에 인터뷰에서 이야기나왔듯, 살짝 귀가 불편한 것등의 ‘임금노동을 통해 이윤을 창출함에 지장이 없는, 다시 말해 업무상에 지장이 없는 경우에 그것은 장애로 인식되지 않는다. 모든 존재의 가치는 상품성에 있다.

물론, 자본주의라는 근대적 속성이 이념적으로 적용되었을때 ‘최소한’ 이러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라는 전근대적 속성이 팽배한 사회이다. 결국 사회에서 구성된 그러한 편견은 자본주의의 유지와 발전에도 유용하게 활용된다. 우리사회의 여성처럼, 장애인 또한 같은 일을 하더라도 ‘보다 적은 임금만을 줘도 되는 존재’로 규정함으로서 더 강한 착취를 용인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사회에서 장애인은 함께 살아가야 할 하나으 lwncp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도와주어야 할 대상이다. 얼마나 도와주느냐의 문제는 스스로 채우지 못하는 상품성을 비장애인이 규정지음에 따라 결정된다.

100에 50의 성과를 만들 수 있다면 50을 지원하고, 80을 만들 수 있다면 20을 지원하겠다고 이야기 하는 복지논리가 우리사회의 복지담론을 주름잡고 있는 선별적 복지, 시혜적 복지의 철학이다. 이 생각에는 철처히 임금노동의 상품성으로서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고, 비정상성이라는 낙인과 그에 따른 시혜적 조치가 결합되어 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사회는 나아가 한 마디 더 하고 있다.
근데, 꼭 도와줘야 하나?


             ▲ 평화캠프 구미지부(준)에서는 장애어린이 인연맺기학교 준비단을 모집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국내 총생산 대비 장애인 관련 예산 비율’은 OECD국가 평균의 1/12배인 0.1%이다. 이 마저도 줄이기 위해 장애연금의 경우 국민연금가입기간 중에 장애인이 되었을 경우에만 혜택을 받는 다는 말도 안되는 제한을 두어, 실제로 장애수당을 받는 장애인은 전체 장애인의 3.2%에 불과하다. 선별복지로 ‘장애성’을 끊임없이 나누고 나눔으로서 최대한의 공간에 이윤논리를 삽입시킨다. 동시에 ‘장애성’에 대한 진단까지 굉장히 보수적으로 진행함으로써, 최소한의 공간만을 복지의 영역으로 남겨놓는다. OECD국가의 평균 ‘장애인 출현율’은 14%정도인데 반해, 우리나라는 5%에 불과하다. 산업재해 1위라는 위상에 걸맞지 않는 말도 안되는 수치이다. 우리나라에는 유독 장애인이 없는 것일까?

그렇게 최소한의 공간만 복지의 공간으로 남겨진 우리나라에서는 그마저도 시혜적 복지이다. 시혜적이라는 말에 이미 권력관계가 존재하고 받는 사람은 그저 주는 사람에게 고마워해야 할 존재일 뿐이다. 여기서 복지는 권리가 아닌 구걸과 다름이 없다.

상품성이 떨어지는 ‘외모’는 비도덕적인 것이 되고, 상품성이 떨어지는 ‘비정규직’은 게으른 인간이 되듯, 상품성이 떨어지는 ‘장애인’은 불쌍한 이웃이 된다.

모든 시간과 공간에 이윤논리가 스미고, 여기서 차이는 다름이 아닌, 이윤의 효율성이라는 잣대에서 옳고 그름으로 나뉘고, 존재와 비존재로 나뉘어 간다. 그렇게 살아남은 존재들은 다시금 싸우고 다시 또 싸우며, 점점 줄어가는 마지막 의자에 앉는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의자놀이는 계속된다. 마지막에 의자에 앉아 살아 남은 자, 그는 모두를 죽여야 한다는 자신의 존재 목적을 상실하면서 존재를 상실한다. 내 옆에 아무도 남지 않은 삶, 모두가 함께 있지만 모두가 혼자인 세상, 그러한 세상에 승자란 존재할까?

장애니 복지는 노동에 기초한 시민권의 보장이 아니라, 모든 사회적 구성원에게 조건없이 기본 생계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모두가 서로를 죽임으로써 패자일 수밖에 없는 이 사회의 패러다음속에 해답은 없다. 우리 사회 모두의 보편적인 해방을 위해 우리는 서로의 손을 마주 잡아야 한다. 생산이 낳은 부는 개별적 이윤이 아닌 사회적 부로서, 누군가의 ‘이윤’이 아닌 우리모두의 ‘삶’의 해방을 위해 쓰여야 할 것이다. 의자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의자를 하나 더 놓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할 것이다.


[시민기고] 평화캠프 구미지부(준) 준비위원장 김진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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