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관계없는 것들의 관계
[칼럼] 관계없는 것들의 관계
  • 김혜나
  • 승인 2019.01.31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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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집 앞에 있는 초등학교로 향했다. 정문에 들어서 아파트를 끼고 오르막을 오르면 왼편에 학교와 운동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방학 중인 오후의 한산한 운동장에는 남자아이 네 명이 추위도 잊은 채 축구를 하고 있었다. 운동장을 기계적으로 몇 바퀴 도는 동안, 슛, 슈팅과 같은 소리가 들려오기도 하고, '세리머니'라고 외치며 특별한 동작을 취하는 모습도 보였다. 내가 자리를 뜰 때쯤 아이들은 7분 내에 점수가 나지 않으면 승부차기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숱하게 보아 온 운동장이라는 공간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장면들이 문득 낯설게 다가왔다. 그것이 만들어놓은 구획 안에서 정해진 대로 움직이고 행동하는 나의 몸도, 그들의 존재도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며칠 전 난데없는 함성이 굳게 닫힌 밤을 뚫고 들려온 적이 있었다. 이내 그 날 축구경기 일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알고 싶지 않은 정보들일수록 더욱 집요하게 알려주는 매체들 덕이었다. 다음날 아침 라디오에서는 축구경기에 대한 분석과 스포츠계 성폭력 문제가 차례로 다루어졌다. 사안에 따라 능수능란하게 톤을 바꾸고 분위기를 전환하는 진행자의 노련함은 두 사건을 별개로 받아들이게 하기에 충분했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둘의 관계를 질문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의 승리에, 박항서의 '매직'에 환호하면서 동시에 조재범과 전명규에게 분개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모순도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대비되는 두 장면 속에서 우리의 역할은 관람석에 앉은 구경꾼들이다. 한 쪽에서는 영웅이, 다른 쪽에서는 타인의 고통이 소비된다는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이 손쉬운 소모품들은 무료하고 괴로운 일상을 망각하게 하는 스펙터클이 된다. 다이내믹 코리아에서는 고맙게도 각양각색의 아편들이 끊임없이 공급되고, 충성스러운 고객들은 오늘도 드라마에, 영화에, 스포츠에, 신제품에, 뉴스에, 음악에 정신이 팔린다. 이 환각제들은 말하자면 일상의 관광지로서 기능하고 있는 셈이다. 휴일의 관광객 무리들이 증명하는 일상의 견딜 수 없음은,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도피를 넘어 일상의 관광화와 관광의 일상화를 요구한다. 하지만 영원한 관(광)객이 되기 위한 몸부림 뒤에는 변치 않은 일상의 지옥이 귀가자를 기다리고 있다.

멀리서 보면 아름답고 가까이서 보면 추하다는 격언이 귀띔하듯, 관광지와 거주지는 서로 다르지 않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의 이데올로기가 대표하는 스포츠 세계의 논리는 사회의 지향점을 공유한다. 그것은 합리성과 무한한 진보를 향한 근대의 신화를, 공정한 기회 속의 자유 경쟁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미신을 훌륭하게 체현하고 정당화하는 의례다. ‘자신과의 싸움’, ‘한계에의 도전’에 대한 관습적 칭송은 자기 착취를 통해 무한히 갱신되는 기준을 넘어설 것을 강요하는 피로사회의 증상이다. 경쟁 속에서의 페어플레이라는 원칙 또한 비도덕적 환경 속에서 도덕적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의 이중적 윤리를 닮아 있다. (성)폭력을 당하고도 쿨하게 웃어넘기는 것이 ‘정상적인’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 거쳐야 할 통과의례인 것도.

근대 스포츠의 공간들을 포함하여 기하학적으로 구성된 현대 사회의 일상적 공간들은 백인(화된) 남성성을 모델로 하는 위계와 배제의 공간이다. 그것은 인간을 자연과 타인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고 고립시키는 구조를 갖는다. 스타디움과 아파트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식민주의를, 인종주의를, 성차별주의를, 인간중심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무질서’한 몸과 장소를 근대화(당)했던 한국이 이제는 타국에서 서양의 대리인을 자처하고 있는 수치스러운 현실 속에서, 선수의 ‘발전’과 팀의 승리를 이끄는 친절한 코치와 때리고 강간하는 잔인한 코치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먼 것일까. ‘친환경’ 잔디 운동장과 가리왕산을 깎아 만든 콘크리트 경기장 사이의 간극은 또 얼마나 될까.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르게 보이는 두 현상이 실은 같은 지배의 두 얼굴일수도 있음을 직시하는 것이 아닐까. 후자를 ‘예외적’ 현상으로 취급하는 관광객의 호들갑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거주지에서 일어나는 ‘정상적인’ 일상이었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이제는 집 안에 있는 것도, 집을 나서는 것도 좀 더 불편해질 것 같다. 초등학교 운동장에 들어서는 것도, 인조잔디 위의 인조인간이 되어가는 아이들을 마주하는 것도 두려워질 것 같다. 갈 곳 없는 비루한 존재의 비극이 바로 여기서, 이미 늘, 진행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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