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것을 처음 볼 때, "숨겨진 이야기는 없겠지만,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 나를 맞아들이는 느낌"이 든다

 
뿌연 하늘을 뒤로 보내며, 경주로 향하고 있다. 동네의 24시간 영업하는 김밥집에서 까만 비닐봉지에 김밥 한 줄을 넣고서.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이 되는 연휴 마지막 날 혼자서 운전대를 잡고 있다. 연휴 전날 ‘전쟁 없는 평화의 한반도’를 위한 뉴스가 베트남에서 들려오길 바랐지만, 멀지 않은 가까운 시기에 평화의 뉴스를 듣게 되길 바라면서.
 
대학 새내기 때 경주 남산에 처음 올랐다. 남산을 소개하며 가이드를 해 주신 분이 ‘마지막 신라인’ 고청(古靑) 윤경열(1916~1999) 선생이다. 담당이 김익수 교수셨는데,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조각가로서 민족의 원형을 보존한 남산에 대한 이해가 기본'이라고 일부 교수들과 학생들의 비난을 들으면서도 답사를 진행하였다. 그때에는 답사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군사독재 정부에 대한 비판과 활동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경찰이 대학 내에 상주하는 시대였고, 학교 밖 단체행동은 경찰에 사전신고를 해야 하는 시기였지만, 지도교수의 열정으로 매년 봄에 경주 남산에 답사하러 가는 것이 정례화되었다. '왜 특정 종교의 예배 대상을 보아야 하나?', '왜 학생들의 자발적인 의견과 상관없이 특정 교수가 주도하는가?', '수업 시 간에 왜 남산에 가느냐?' 등 반대 목소리가 높았다고 한다.
 
신입생인 나는 새롭고 낯선 곳에 가는 것이 좋았다. 88년도 봄을 마지막으로, 재단 이사장의 취임 반대로 불거진 학내민주화와 관련하여 지도교수의 일방적인 수업방법에 대한 반발로 교수님이 앞장선 남산 답사는 중지되었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불티나게 팔릴 때, “나는 그곳에 갔다 왔고, ‘조선의 3대 구라’ 백기완ㆍ방동규황석영을 위협하는 유홍준의 구라는 정말 세다”는 것을 술자리에서 말할 수 있었던 것이 남산 답사를 통해서였고, 문화재 보수를 직업으로 삼은 것의 출발점이었다. 김익수 교수님은 작년 겨울이 시작될 무렵 소천하신,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역임하였던 김윤수 교수의 친동생이다. 대학 졸업 후 처음 뵙는 자리가 장례식장이었지만, 남산 답사로 인하여 제 갈 길을 찾았다고 말씀드리니 참으로 기뻐하신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경주 남산에 처음 오르기 시작한 이래, 금오산을 중심으로 한 배리와 용장골을 주로 다녔다. 여기에 칠불암까지 연결되거나, 불곡이나 탑골의 마애불이 포함되었다. 몇 번밖에 다니지 않은 남산이지만, 30여 년을 무시로 다녔던 것과 전문적인 단어를 몇 개 아는 것으로 남산의 속살을 알고 있는 듯 자만심이 어느 순간 마음속에 담겨,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시작하는 마음으로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열암곡 석불좌상'을 찾아 나선다.
 
경주나들목을 빠져나와 형산강의 지류인 ‘기린천‘과 나란히 달리는 울산 가는 35번 지방도를 달리면 왼쪽으로 아직 봄이 오지 않은 것을 볼 수가 있는 논과 남산자락을 스쳐 간다. 포석정·삼릉골·용장골의 낯익은 계곡을 지나서, 남산을 왼쪽으로 두고 차를 돌리면 경주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낯선 풍경을 마주한다. 경주의 낯익은 모습인 도롯가에 기와로 지붕을 얹은 콘크리트 건물이 아니라, 빨간 벽돌집이나 초가집에 양철지붕을 얹은 건물들이 보인다. 내려올 때 굴뚝에 연기가 보일 것이라 예상했는데. 역시나 그랬다. 식당이나 커피숍도 없다. 남산 자락에도 이런 곳이 있었나? 남산에 내가 모르는 이런 곳이 있었나? 내가 내비게이션 지도를 잘못 읽었나? 의심이 들 때 목적지가 표시된 방향 안내판이 선명하게 보인다. 
 
▲ 열암곡 석불좌상의 복원 후 모습 ⓒ막선생

’열암곡 석불좌상‘

계곡을 따라 차를 몰아가니 정남 쪽에서 정북 쪽을 향한다. 지난 겨울은 매서운 바람도 추위도 없어서인지 갈대와 나무에 매달린 나뭇잎이 흔들리며 서 있다. 자동차 앞 유리에 벌써 하루살이가 날아온다. 계곡을 따라서 몇몇 집이 보이고 논에는 트랙터를 이용한 로터리 작업 흔적이 보인다. 녹슨 함석지붕에 넘어진 기둥 사이로 마당에 누렇게 흔들리는 잡초에 숨어있는 고양이가 깜짝 놀라 튀어나올 것 같은 폐가가 몇 채 보인다. 아스팔트포장도로 끝에 있는 주차장은 남산의 다른 곳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단순하다. 빈터에 자갈로 바닥을 깔아 주차장을 만들고 공원 관리사무소와 화장실인 조립식 컨테이너가 덩그렇게 놓여있다.
 
남산과 이웃한 마석산 사이의 작은 지방도로로 나뉜 위쪽이 남산이다. 남산은 금오봉과 고위봉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길고 동서로 짧은 타원형으로 생겼다. 이곳은 고위봉을 중심으로 보면, 타원형 아랫부분이 벌어져서 가재의 집게발과 비슷하게 생겼다. 가재의 집게 모양으로 감싸고 있는 위치가 노곡리에 해당한다. 집게의 작은 발이 열암곡의 산등성이다. 열암곡의 행정구역은 노곡리이다. 노곡리 좌·우로 서서히 산등성이를 이루며 고위봉에 연결된다. 열암곡은 새갓골로 불린다.
 
흔들리는 억새 사이로 좁은 길이 산으로 이어져 있다. 남산의 반대편 북쪽 삼릉골의 등산로와 달리 인위적으로 탐방로를 만들어 놓지 않아서, 구불구불한 자연스러운 길이다. 화강석 바위가 듬성듬성 널브러져 있고, 아직은 초록색 봄기운이 올라오지 않은 관계로 식물의 활동이 왕성하지 않다. 삼릉과 포석정이 있는 남산 북쪽의 소나무는 높다랗고 하늘을 향에 쭉 뻗은 형태인데, 이곳은 키가 작고 구불구불하며, 촘촘하게 자라고 있다. 키 작은 진달래와 싸리나무가 형제처럼 어우러져 자라고 있다. 산으로 점점 올라갈수록 소나무의 태가 난다. 진달래 꽃봉오리가 연한 녹색과 생기발랄한 분홍빛을 품고 있다.
 
올라가는 왼편에 동글동글한 화강석이 물고기가 떼 지어 헤엄쳐 올라가듯이, 계곡 따라 줄지어 놓여있다. 낮은 쪽에는 작은 바위가 넓게 퍼져있는 모습이지만, 열암곡 석불좌상 앞에는 크고 좁게 연결되어있다. 석공이 사용하려고 일부러 모아놓은 것 같이 보일 정도이다. 아래는 작고 위로 올라갈수록 덩어리가 크다. 이곳으로 물이 흘러 얕은 계곡이 되면서 바위가 나타난 것이다.
 
“짹- 짹”
참새보다 작은 산새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이십 분쯤 올라가면 대나무가 나타난다. 대나무는 산짐승의 출입을 막는 천연의 울타리이다. 지금은 외세의 개입으로 허리가 끊겼지만, 만주에서 태백산맥으로 연결되어 한때 산짐승이 빈번히 출몰하는 곳이었다. 1922년에 경주 대덕산에서 호랑이를 포획한 자료가 있고, 늑대는 1970년대까지도 흔히 보이는 산짐승이었다. 불교에서 대나무숲은, 인도에서 부처님이 최초로 설법하신 기원정사와 함께 불교 최초의 2대 가람인 죽림정사를 상징한다고 여긴다. 불곡마애불을 비롯하여 많은 절터에 대나무가 자라고 있다. 대나무 터널을 지나면, 푸른 소나무가 호위하는 넓고 평평한 빈터에 햇빛을 반사하는 흰색 화강암으로 조성된 열암곡 마애여래좌상이 눈에 들어온다.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소나무 사이로 회색의 화강암 바윗덩어리가 층층이 쌓여있다. 아래쪽에 검은색 천막이 새로 발견된 '마애불'을 보호하고 있다.
 
남산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마애불에 두상이 없는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많다. 불교를 ‘허무의 도’로 헐뜯거나, 부처님의 가피로 외적의 침략에 맞서는 ‘호국불교'의 상징성을 없애거나, 민속신앙에서 부처님의 신체를 훼손하는 일-코를 갈아서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미신-이 많아서 노천에 있는 부처님 두상이 훼손되었다. 이곳 부처님도 두상이 없는 상태에서 마애불의 불신·광배와 받침대가 흩어져 있었다. 윤경렬 선생과 관련이 깊은 ‘경주 남산연구소’의 회원인 임희숙 씨가 2005년에 두상을 발견하였다.
 
▲마애대불, 5cm의 기적 ⓒ막선생

마애여래좌상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주변을 발굴·조사하며 2007년, 엎드린 자세로 있는 ‘마애불’을 발견하였다. ‘마애불’ 발견 당시에 크게 주목받지 못한 것을 프랑스 르몽드지에서 ‘5cm의 기적’으로 대서특필하여 알려지게 된 것이다. 높이가 5m가 넘고 무게가 60t이 넘는 큰 불상으로, 오뚝한 코와 상호가 바닥의 바위와 불과 5c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서 ‘5cm의 기적’으로 불린다. 최근에 넘어진 원인을 연구 분석한 결과와 문헌을 비교하면 1430년에 강도 6.4의 지진으로 넘어진 것으로 보고되었다. 기술적 검토 결과로 넘어지기 이전처럼 똑바로 세울 수 있다고 결론이 났다. 방법에 대한 연구용역 중이다.

두 분의 부처님을 가까이하기 전에 주변을 둘러본다. 새로운 곳에 가면 누구나 그렇듯이 아무 생각 없이 쓱 둘러본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오후 2시가 넘었으니 준비해간 김밥으로 허기를 달래기 위해 적당한 자리를 찾는다. 오른쪽 산등성이의 ‘마애불’ 뒤편을 보니 거대한 화강석이 오밀조밀하게 붙어있다. 낯선 것을 처음 볼 때, "숨겨진 이야기는 없겠지만,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 나를 맞아들이는 느낌”이 든다. 이곳 또한 그렇다. 바위 앞을 남쪽으로 돌아보니, 보이지 않던 바위 아래에 약 30여 명 정도가 준비한 음식을 펼쳐놓고 먹을 수 있는 바위가 펼쳐져 있다.
 
“그럼, 그렇지. 저기 조그마한 바위로 부처님을 모시고 절을 지을 리는 없겠지.”
 
바위에서 살펴보니, 북쪽에서 남쪽으로 바위가 흐르고 있고 남쪽 벼랑에는 키가 작은 소나무가 몸마다 동그란 솔방울을 수백 개씩 달고 휘몰아치는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그 아래에는 작은 햇빛을 찾아 진달래의 작고 상처가 난 검은색 마디가 하늘로 촘촘히 뻗어있다. 주변의 산으로 둘러싸인 아랫마을 노곡리가 보인다. 저 멀리 울산으로 가는 고속도로와 7번 국도를 따라서 동쪽에서 남서쪽으로 산봉우리가 희뿌옇게 줄지어 사라져간다. 바위 아래에는 작은 소나무 사이로 이곳을 향해 또 다른 길이 연결되어있다. 이 길을 통하여 바위 오른쪽으로 돌아서 돌로 만든 축대에 의해 비껴가면서, 건물 사이를 지나 예배 공간으로 들어가게 되어있었다. 아마 '석불좌상'이 모셔진 건물을 마주 보며, '마애불' 측면을 보았을 것이다. 바닥에 흩어진 기왓조각으로 볼 때, 신라에서 조선 초기까지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애여래좌상을 바라본다. 두상은 나발과 육계가 분명하고, 귀가 어깨에 닿을 만큼 커다랗고, 가늘고 얇게 뜬눈으로 선정에 들어간 표정을 나타내며 이마 사이의 백호가 표현되었다. 목에는 삼도의 흔적이 있다. 불신은 굴곡이 뚜렷한 가슴의 윤곽과 곧게 편 당당한 상체에서 석굴암 조각으로 대표되는 신라 전성기 조각의 영향이 느껴진다. 법의法衣는 ‘통견의’로 옷자락을 바로 내리지 않고 가슴의 옷깃 속에 살짝 넣었으며, 왼쪽 가슴 중간에서 한번 접혀 물결처럼 너울거린다. 내의内衣는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로 걸쳐 입었다. 오른손은 복부에 올려놓았고, 왼손은 가부좌한 무릎 밑으로 곧게 내려 촉지인觸地印을 맺었다. 광배는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로서 광배 전체에 불꽃무늬·덩굴무늬·보상화무늬寶相花文·구름무늬·화불化佛로 장식된 흔적이 있다. 두광에는 덩굴무늬-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풀과 구름이 합쳐진 장식문양-에 신광으로 화불이 있었을 것이나 마멸이 심하며 구름형 덩굴무늬가 보인다. 가장자리에는 화염문火焰紋이 새겨져 있다. 상대석은 앙련仰蓮의 단판복엽연화문이고, 하대석은 24개의 연화문이 복련覆蓮으로 되어있다. 당당한 신체 모형화와 안정된 자세로 볼 때 석굴암의 뒤를 잇고 있다. 하지만 세부 조각이 얕고 광배가 화려한 장식성을 띠는 점에서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초로 추정된다. 불상을 복원하면서 이끼와 훼손된 것을 보존 처리하여 밝게 되었다.
 
“건물이든 부처를 조성할 때는 자연적인 요소인 놓이는 위치와 방위가 제일 중요하다”

내가 사무실에서 강조하는 말이다. 설계도서의 배치도 보다는 현장에서 보이는 조건을 파악하라고 한다. 풍수는 안대案對-바라보는 방향-를 포함한다. 사방불의 개념이나 약사불이나 아미타불은 지물이나 서 있는 방위를 보고 판단의 기준을 삼기도 한다. 이 여래좌상은 남향이지만, 정남향은 아니다. 8각 좌대의 꼭짓점 4개가 동·서·남·북을 가리킨다. 즉 8개의 꼭짓점 중에서 4개가 방향을 가리키기에 주인공인 부처는 남향과 남서향을 잇는 2개의 꼭짓점을 연결하는 면과 수평으로 앉혀져 있어 정남향을 어긋나 남서향으로 복원되었다. 전면의 소나무가 없다면 안대가 기준이 있을 것이나, 소나무를 고려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복원 전까지 파편들이 주변에 널려져 있었기에, 원형을 찾을 수 없었으므로 상식적으로 판단했으면 이렇게 옆으로 돌려 앉게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해야 하는 말 못 한 사정이 있었는지? 힘이 없는 기관이어서 예산이 부족한 것인지? 연구원 다수가 비정규직이어서 축척된 성과가 없는 것인지 궁금하다. 또한, 이 부처님이 처음부터 노천에 있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발굴했다면 초석 위치라도 표시해두는 것이 올바르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이렇게 형편없지 않을 것인데. 석불좌상 뒤쪽으로 화강석을 떼어낸 흔적인 쐐기 자국이 남아있다.
 
▲바위 틈새에 핀 진달래꽃 ⓒ막선생

석불좌상을 뒤로하고 산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갑자기 차갑고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낯선 곳을 갈 때면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이다. 두렵거나 피곤하거나 인간관계가 원활하지 않아 혼자일 때 많이 느껴진다. 많은 소나무가 쓰러져있는 모습이 보인다. 계곡이 좁아지면서 서쪽 산등성이가 햇빛을 가려 습기가 많다. 주변에 무덤도 많이 있다. 땅을 보니 겉흙이 거무칙칙하다. 이럴 때는 빨리 지나가야 하는데 약속이나 한 듯이 “후다닥” 갑자기 새가 날아가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새가슴이 된다.

 
어느덧 봉우리를 지나간다. 봉화대의 흔적이 석축과 기와 파편으로 남아있다. 오른쪽에 칠불암이 있고 왼쪽으로는 금오봉과 함께 남산을 대표하는, 제일 높은 봉우리인 고위봉(해발 494.6m)이 있다. 오늘의 목적지는 이 갈림길까지다. 이곳에서부터는 봉화대 능선과 고위 능선이 만나는 곳으로, 계곡을 통해서 차가운 바람 소리에 까마귀가 날아다닌다. 저 멀리 동쪽의 불국사와 석굴암을 품고 있는 토함산이 보이며, 그 사이를 넓은 뜰이 펼쳐져 있다. 흐린 날씨의 무채색이지만, 땅속에서 녹색을 품고 조금씩 머리를 내미는 봄을 며칠 있으면 볼 것 같다. 그때 또 올라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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