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잊고 살기 힘든 핵발전소
[기고] 잊고 살기 힘든 핵발전소
  • 정연주
  • 승인 2019.03.11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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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굽이굽이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해 온 핵발전소’
후쿠시마 핵사고를 기억하며, 경주에 다녀와서
9일 경주에서 열린 '후쿠시마 원전사고 8주기 경주시민행진'
9일 경주에서 열린 '후쿠시마 원전사고 8주기 경주시민행진'

몇 년 전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울진 한수원 연수원에서 열리는 학부모연수에 참여하겠냐고.

 
울진, 하면 핵발전소가 떠오르는 나는 거절했다, 이유도 명확히. 핵발전소가 있어서 가고 싶지 않다, 울진에 가게 된다면 그건 아마 핵발전소를 반대하기 위함일 거라고.
 
이십여 년 전 귀농지를 찾으며 지도를 보고, 맑은 계곡도 많을 것 같고 오지인 듯하여 땅값도 싸지 않을까 싶어 일단 영양으로 갔었다. 하지만 기대에 맞는 땅을 찾기 어려웠는데 교차로에 영덕 창수면에 괜찮아 보이는 땅이 나 있어 가 보았고 맘에 들었으나, 해안도로에서 울진핵발전소가 가까운 걸 보고 포기했었다.
 
이십 대 초 「어느 과민성 사내의 몽상」이란 책을 보고 고준위핵쓰레기를 10만 년 이상 보관해야 하는데 답이 없단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게 되었고 아이를 낳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즈음 「핵전쟁 이후의 세계」라는 영화를 TV에서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태아 상태에서 영향을 받아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황량한 세상을 떠돌다 임신•출산을 하는 순간 태어난 자신의 아이를 보고 비명을 지르며 영화가 끝났는데, 나는 차마 마지막 순간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보지 못한 그 순간은 상상으로만 가끔 떠올랐고.
 
이십 대 초반 명확히 알게 된 핵쓰레기의 진실은 당시 내 우울감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또한, 서울유학 생활 동안 알게 된 너무 아픈 이야기들. 모순으로만 가득한 것 같은 세상에서 느끼는 무력감은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는 정점을 찍었다.
 
이후 귀농을 결심하며 종합선물세트를 받은 아이처럼 기분이 좋아졌고 자신감도 생겼다. 그래,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나 자신뿐이네, 하며 울진핵발전소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 안동 골짜기에 터를 잡고 살며 핵발전소는 잠시 잊었었는데.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영덕핵발전소찬반주민투표, 페이스북, 녹색당 등의 키워드로 잊고 살고 싶었던 핵발전소의 돔을 일 킬로미터 이내에서 보게 되었다. 진짜로 핵발전소를 반대하기 위해 경주 나아리로 울진 부구리로 가게 된 것.
 
어제(9일) 후쿠시마 핵사고 8주기를 맞아 다시 경주에 갔다. 가장 먼 안동에서 왔다고 제일 먼저 무슨 얘기를, 그것도 짧게 하라는데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너무 많은 이야기가 한꺼번에 떠올라 말을 할 수 없었다. 이미 방사성 물질 피해를 보고 있고, 아이들 몸에서까지 삼중수소가 나오게 되어 이주대책을 요구하는, 핵발전소로부터 겨우 3km 바깥으로 이주시켜달라고 삼 년 이상 싸우고 있는 나아리 주민들 앞에서 무슨 얘길 해야 하나.
 
가장 멀리 살아서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경주는 참 살아보고도 싶은 곳이지만 핵발전소가 있어 별로 오고 싶지 않은 곳, 핵발전소에 반대하기 위해서만 오게 되는 곳이라고 경주시민들 앞에서 이야기해야 할까. 나는 오래 살고 싶은데 백이십 살까지 살고 싶은데 핵발전소가 방해요인이 되니 제거하고 싶다고 경주 아닌 곳에선 농담처럼 하던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어쨌든 말을 하진 못했지만 들은 얘기는 좀 있다. 이미 알고 있던 얘기도 있고, 들었지만 잊었던 얘기도, 들어도 들어도 가슴 아픈 이야기도 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미래를 이미 겪고 있는 나아리 주민들 이야기, 중저준위방폐장을 짓게 해 주면 돈도 많이 주고 현재 경주에 있는 고준위핵폐기물 임시시설을 딴 데로 옮겨준다는 사탕발림에 깜빡 속은 경주시민들 이야기, 고준위핵폐기물저장시설을 경주에 추가로 짓겠다는 발표에 후회막급에 억장이 무너진다는 경주시민들…
 
대구에서 오신 분은 ‘미국이 북한은 핵때문에 제재하면서 왜 핵발전소가 스물네 개나 있는 한국은 제재하지 않는가?’라며 ‘미국이여 한국을 제재하라!’라고 구호를 외쳐 ‘웃픈’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가장 기대되는 이야기는 지난해 신고리원전 5•6호기 공론화 이후 많이 힘 빠지고 분열되었던 탈핵 운동을 다시 힘내어 해 보자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핵발전소에 방폐장 문제까지 겹쳐 있는 경주가 탈핵운동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어 탈핵공동행동의 출범식을 오는 6월 15일 경주에서 하기로 했다고 한다.
 
거대한 무덤들이 다정한 뒷동산처럼 봉긋봉긋 솟아 있는 경주 시내를 빠져나오며…
 
참 아름다웠다. 너무 아름다워서 슬펐다. 그리고 속으로 가만히 말했다.
 
'힘내라 경주, 또 올게.'
 
 
 
 
후쿠시마 원전 사고 8주기 경주시민행진

 

글 _ 정연주 안동환경운동연합 사무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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