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당신들, 왜 장애인을 이용해!”
[칼럼] “당신들, 왜 장애인을 이용해!”
  • 지민
  • 승인 2019.04.01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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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목소리가 A를 향했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너 여기가 어딘 줄 알아? 알고 온 거야? 말해봐!” 자신을 A의 가족이라고 밝힌 두 사람은 A의 휠체어를 잡으며 꽥 소리를 질렀다. 이내 그 목소리는 옆에 있는 우리를 향했다. “당신들 뭐야. 왜 장애인을 이용해!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애 데리고 뭐 하는 짓이야? 장애인이 뭘 알고 여기 왔겠어! 니들이 얘 인생 책임질 거야?” 주변 사람들이 그들을 진정시키며 대화를 시도해봤지만, 그들은 기어코 A를 대열에서 이탈시켰다. 

지난 3월 14일, 포항 법원 앞에서 경북 시민단체들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평소 ‘한동대 학생 부당징계 공동대책위원회’ 소속으로 함께 활동하던 포항여성회, 경북노동인권센터, 포항장애인자립생활센터 등의 시민단체가 한자리에 모인 날이었다. 일명 한동대 학생 부당징계 사건의 연장선이다. 작년 초 한동대는 페미니즘 강연을 주최했다는 이유로,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나를 포함한 다섯 명의 학생에게 무기정학, 특별지도 등의 부당징계를 내렸다. 몇 달 전, 국가인권위가 한동대에 차별행위를 시정하라고 권고했지만, 한동대는 권고를 수용하기는커녕 보수교계와 합심하여 인권위를 규탄하고 사건을 왜곡하는 가짜뉴스를 퍼뜨리기 급급했다. 

그날은 한동대 교수들이 징계 과정에서 저지른 명예훼손에 대한 재판 날이기도 했다. 보수교계의 이목이 집중된 사안이니만큼, 법원에는 일찍부터 사람이 붐볐다. 기자회견을 준비할 때부터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사람들은 큰 소리가 나자 기자회견장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마치 흠결 낼 기회를 잡았다는 듯 다가온 그들 역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당신들 왜 장애인을 이용해!” 재판이 끝날 때까지 법정 앞에서 기다리던 그들은 내가 법원 문을 나설 때까지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소리쳤다. “정상인들이 장애인을 그렇게 이용하면 어떡해. 우리 위대한 장애인들을 말이야!”

포항에서 돌아와 며칠 내내 악몽에 시달렸다. 그날의 장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적나라하게 마주한 그들의 적대와는 별개로 그 적대를 위한 수단에 의구심이 들었다. ‘장애인을 이용한다.’ 이용한다는 건 뭘까. 누가 누굴, 어떤 권리로 이용할 수 있다고 판단한 걸까. 

한동대에서 징계 절차가 진행될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당시 나를 포함한 다섯 명의 학생이 징계 대상자로 지목됐다. 우리의 징계사유는 엇비슷했다. 그만큼 당시 각자의 행동은 별반 다를 바가 없었지만, 학교의 태도는 상대에 따라 달라졌다. 나는 듣지 못했던 말을 20대 초반 여학생들은 들어야했다. “너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잖아. 왜 걔네 때문에 너네까지 그래.” 여기서 ‘걔네’는 나와 다른 한 남학생을 가리킨다. 학교를 오래 다닌 남학생과 달리 ‘어린 여학생’은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지 않을 거라는 전제에서 나온 회유였다. 

모순적이게도 이런 시선은 또 다른 상황에서 나에게도 향했다. 한동대 부당징계 사건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을 때, 보수교계로부터 쏟아지는 비난들 속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동성애 옹호하는 배후 세력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다.’ 그들의 눈에 비친 나는 ‘어린 대학생’이었을 것이다. 또는 이름이 ‘지민’이다 보니 여성으로 읽혔을 수도 있다. 어느 이유에서건 그들의 눈에 나는 스스로 결정할 수 없고, 누군가에 의해 조종당하거나 이용당하는 존재였다. 

2008년 촛불집회에서도 같은 말이 반복됐다. 청소년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왔을 때, “촛불은 누구 돈으로 샀냐”며 배후세력을 운운하던 목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MB 정부도, 일부 언론도 청소년의 배후세력을 찾아 헤맸다. 놀라운 건, 이때도 보수 교계가 앞장서서 촛불집회의 배후세력을 마귀로 지적했다는 것이다. 여성들이 미투(MeToo) 운동으로 성폭력을 고발할 때도 다르지 않았다. ‘미투로 다른 사건을 덮으려는 음모다’ ‘정부와 진보 인사들에 대한 정치 공작에 이용될 수 있다’ 현재도 이런 식으로 여성들의 목소리를 폄하하기 위한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이용’이라는 손쉬운 언어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주체를 한순간 타자로 끌어내린다.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없는, 그래서 이용당하기 쉬운, 그렇기 때문에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어른’들이 행동을 제약할 수 있고, 제약해야 하는 존재들로. 이처럼 주체성을 승인받지 못한 존재는 어딘가 부족하다는 낙인으로 인해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시설에 가둬지거나, 투표권을 갖지 못하거나, 유리천장에 가로막히거나, 질병으로 취급되거나, 추방된다. 장애인이니까. 어리니까. 여자니까. 성소수자니까. 이주민이니까. 

문화인류학자 김현경은 <사람, 장소, 환대>에서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 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즉 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며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사람이 되고, 누군가에 의해 사람이 되지 못하는 셈이다. 누가 무엇이라는 이유로 연대의 주체가 아닌 이용당하는 대상이라고 보는 시선 자체가 사회적 성원권을 박탈하는 태도가 아닐까.

기자회견 직후 재판이 진행되는 바람에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기자회견이 끝나고도 그들의 폭력적 행태는 계속 됐다고 한다. 기자회견이 끝난 자리에서 가족이라는 사람들은 끝없이 A를 추궁했다. “여기가 어딘지 알고 왔어? 말해봐. 말해보라고!” 말할 틈을 주지 않던 그들의 고성 속에서 A는 작고 느리지만 명확하게 의사를 표현했다. 여기가 어딘지 알고 왔고, 내 의사로 왔다고, 왜 와서 난리를 부리냐고. 하지만 그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혹은 들을 마음도 없이 허공을 향해 큰소리로 A를 다그치기 바빴다.

 

글 _ 지민
한동대 부당징계 당사자. 비혼생활공동체에서 반려견과 함께 살아가며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여행자>에서 활동합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