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이 오는 숲. 사진 이현정

                                                       

봄이 온 것이다. 

아침 차가운 꽃샘바람은 살랑살랑 숨바꼭질을 즐긴다. 그러다 정오를 향해 빠르게 달려가는 시간과 온도에 쫓겨 포근하게 느껴지는 공기를 은근슬쩍 툭 던져주고 간다. 덤으로 교태를 부리듯 이리저리 얄궂은 미소를 가슴 터질 듯한 설렘으로 밀어 넣고 있다. 달리는 내내 겨울눈들의 붉은 비늘잎을 벗지 못한 불그레한 먼 산을 응시한다. 여린 연둣빛이 짙은 녹색의 빛으로 가득 찰 숲을 그리며 온몸으로 스며들어오는 찬 공기조차 초록의 그리움으로 감싸버린다. 곧 숲에 도착할 것이다.

역시나 계곡 입구에서부터 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새침한 찬바람이 진을 치고 있다. 하지만 깃털처럼 가벼운 내 발걸음은 오히려 이들의 바람에 올라탄 듯 가파르고 바짝 마른 좁은 숲길을 거뜬하게 오른다. 또한 부드럽게 내리는 햇살은 어린 가지 끝을 데우고 켜켜이 쌓인 숲 땅 위 낙엽들에게 숨을 불어 넣는다. 또한 내 피부 위에 올라앉아 천천히 봄빛의 열기를 전하고 깊은숨을 들이마시게 한다.

계곡 숲길을 오른 지 얼마나 지났을까. 역시 중부지방의 터줏대감과도 같은 귀룽나무의 위용이다. 아직 차가운 바람이 지배하는 숲에서 귀룽나무의 어린줄기들이 이리 흔들 저리 흔들거린다. 짙은 연두색으로 어린잎이 나풀거리는 막 솟은 가는 줄기들은 늠름하기까지 하다. 어리고 여린 잎들은 벌써 짙은 초록으로 변해간다. 다시 한 해를 견디기 위한 무장을 하는 것이다.

 

▲ 귀룽나무의 새잎. 사진 이현정
▲ 꽃을 피운 선괭이눈. 사진 이현정

 

하지만 겨울눈이 한껏 부풀기만 한 채로 숲길가 크고 작은 나무들이 파수꾼처럼 줄줄이 서 있다. 그리고 보려 하지 않아도 크고 작게 파인 세로로 내려간 불규칙한 나무의 골들은 내 동공을 향하게 한다.

마침 계곡물의 힘없이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그들의 힘들었던 과거 기억을 회상해 본다. 숲의 나무들은 오랜 세월 숲에서 일어나는 가뭄과 세찬 바람 그리고 타들어 가듯 뜨거운 빛과 열기, 또한 급변하는 온도들에 의해 자신을 지켜야 했었다. 그렇게 스스로 만들어낸 지혜였던 것이다. 비가 내리면 결을 따라 땅속으로 안내하듯 불러들였다. 그렇게 숲 땅은 저 아래 어둡고 깊은 곳에 내리는 빗물을 저장해 왔다. 이런 나무들의 오랜 수고로움으로 봄빛의 여린 열기이지만 서둘러 숲을 깨워 태초의 생명들에게 물을 이동시킨다.

봄빛으로 촉촉하게 젖은 땅이지만 냉한 습기가 가시지 않는다. 또한 빛은 계곡 숲길을 내내 비추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빛을 향해 한 방향으로 질주하듯 핀 선괭이눈들이 더 애달프게만 보인다. 하늘을 향한 가지 끝에 달린 겨울눈들의 잎들이 펼쳐져 빛을 가리기 전에 꽃을 피워야 함을 숙명으로 알고 있다. 아직 꽃샘바람이 지나가지 않은 숲의 하늘은 온통 물오른 가지들의 겨울눈 비늘이 열릴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아직 메말라 보이는 잔가지들이 하늘을 차지하고 있다.

 

▲ 사진 이현정

 

빛은 잔가지들을 날쌔게 통과해서 숲 땅 위에 쏟아진다. 이렇게 봄빛이 숲 땅 위에 좀 더 머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야 서둘러 작은 풀꽃들이 꽃을 피우리라는 것을 알기에 말이다. 쉴 새 없이 들리는 새들의 지저귐은 적막을 거두게 하고 하늘을 우러러보게 한다. 봄빛이 서두르는 걸 알아 달라고 말이다.

 

글 _  이현정 경주숲연구소장

 

 

관련기사

저작권자 © 뉴스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