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놈들을 몰아내고 舊疆을 恢復할제 倭風遼雪 三十餘年
氣槪가 壯할시고 祖國光復되었으나 同室操戈 슬프도다
北으로 달린 檻車 한줌 흙이 되단 말가 옛 伽倻父祖靑山
淨土가 無恙하니 魂아 돌아오시어 이곳에 머무소서”

 

1992년 고령의 유지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건립한 <광복지사 令洲 金尙德 선생 사적비>의 마지막 구절이다. 국학의 대가인 이가원 선생이 쓴 사적비의 내용을 네 줄의 시로 압축한 글이다. 요새 쓰는 말로 쉽게 옮기면 이렇다.

 

“왜놈들을 몰아내고 조국을 되찾기 위해 싸우기 30여 년의 기개가 장하도다. 조국은 광복되었으나 슬프게도 동족이 남북으로 나뉘어 서로 싸웠다. 그 와중에 선생은 북으로 납치되었다가 돌아가셨다. 이제 선생의 고향인 대가야 도읍지가 깨끗하고 탈이 없으니 혼령이나마 돌아오소서.” 

 

여기에 살을 붙여 영주 김상덕 선생을 소개하는 이야기를 만들자니 가슴이 답답하고 말이 안 나온다. 죽을 때까지 역사 공부를 멈추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덤빈 일인데도 독립운동사와 해방공간의 역사를 읽다 보면 곤 백번 책장을 덮고 한숨을 쉬거나 손수건으로 눈시울을 비벼야 한다. 하지만 그래도 읽고 써야 한다. 역사를 배우고, 글로 쓰는 것은 또 다른 독립운동이며 역사전쟁이다. 그런 각오로 아픈 가슴을 진정시키며 다시 눈물의 현장으로 들어가기로 하자.

민족문제연구소가 기획한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은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백 년 동안의 역사전쟁을 다루고 있다. 그 ‘백년전쟁’에서 우리는 정부에게 속아서 판판이 졌다. 그러므로 아직도 우리의 역사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이명박이 집권하고 있을 동안에 뉴라이트라는 ‘괴물’이 나타나서 식민지근대화론과 건국절 망령을 소환한 일이나 박근혜 정권이 국정교과서 파동을 일으켜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려 했던 일을 돌이켜보면 영주 김상덕 선생이 이루고자 했던 친일잔재청산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얼마 전에 어떤 정치인이 “해방 후에 반민특위로 인해서 국민이 무척 분열했던 것 모두 기억하실 것이다”라면서 “또다시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잘 해주실 것을 말씀드린다”고 했다. 이처럼 서울대 법대 출신이며 판사까지 지낸 대한민국 최상류층 인사가 아베의 대변인 같은 소리를 하는 것을 보면 친일잔재청산은 아예 시작도 못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제 2019년은 3·1혁명으로부터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고 앞으로 백 년 동안의 ‘역사전쟁’이 시작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1949년 6·6테러 이후 좌절되었던 반민특위의 활동을 다시 잇는 것으로부터 백 년간의 새로운 역사전쟁을 시작해야한다. 헌법기구인 반민특위를 짓밟은 반란자들을 역사법정에서 반민족행위자로 처단하고, 국가폭력의 주범인 국가가 국민들에게 사죄함으로써 역사전쟁의 선전포고를 해야 한다. 

올해 4·3제주도인민항쟁 기념일에 국방부와 경찰청이 사과(?)한 것은 4·3제주도인민항쟁의 역사바로잡기의 시작이다. 같은 맥락에서 올 6월 6일에는 경찰청과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함으로써 민간 주도의 제2차 ‘백년전쟁’을 시작하기를 기대한다. 

가슴이 답답해서 말이 잘 안 나오더니 역설적으로 서론이 너무 길어졌다. 이제 반민특위 위원장 영주 김상덕 선생을 간단하게 소개한다.

영주 선생은 1891년 경북 고령군 고령면 저전동에서 태어났다. 필자와 같은 마을인데 지금은 교회당이 들어선 바로 옆 공터가 생가터로 확인되지만 아무런 표지석도 없다. 고령에 사는 김상덕 선생의 일가친척들은 선생이 6·25때 납북되는 바람에 연좌죄를 입어 아무도 선생의 흔적을 찾지 않았으며, 오히려 흔적을 지우는데 급급했다. 선생의 외아들 김정륙씨도 연좌죄에 얽혀 막노동과 품팔이로 전전하였으며 가로늦게 인연을 맺은 부인 마저도 병마에 시달리다 돌아가셨다.

게다가 선생의 손자도 젊은 나이에 대장암으로 작고함으로써 증손자가 유복자로 태어났다. 선생의 부인이신 강태정 여사는 1939년 충칭에서 영양실조와 풍토병으로 일찌감치 별세하셨다. 이때 선생의 딸인 김길성과 아들 김정륙은 고아원에서 2년간 살기도 했다. 김길성 씨와 김정륙 씨는 해방이 되고도 중국에 남았다가 일 년 후에 귀국하여 부친과 상봉하였다. 그리고 4년 만에 선생이 납북되는 바람에 또다시 이산가족이 되었으며, 남매마저 서로 헤어져 살아야 했다. 

 

“아버지, 막내 영이가 죽자 충격을 받고 저희 남매를 고아원에 맡기셨지요. 고아원 시절, 아침에 모기장을 개지 못해 저는 늘 벌칙을 받고 먼 산을 쳐다보며 아버지를, 손가화원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사변 후 아버지를 잃고 떠돌던 유랑길이었습니다. 한 때 외갓집에 잠시 머물렀지만, 고향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저는 의기소침한 성장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납북자 가족에게 씌워진 연좌제라는 올가미 탓에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기를 펼 수가 없었습니다.” 

- <"100년 편지", 반민특위 위원장 전상서> 김정륙, 민족문제연구소, 2010년 8월 2일

 

부친 못지않게 고생을 많이 하신 김정륙 씨는 노년에 심장병 수술의 후유증으로 아주 힘들어 하면서도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에서 부회장으로 일하고 계신다. 임정기념사업회에 출근하는 것도 독립운동의 연장이다. 전화 통화도 힘들어 하시는 분이 지난 3월 22일, 나경원 의원의 망언을 성토하는 기자회견장(국회 정론관)에 독립유공자 및 그 유족대표들과 함께 나 의원을 꾸짖으러 나오셨다. 이처럼 친일파들은 대대손손 승승장구하는 반면 독립운동가의 집안은 3대가 망한다는 말을 입증하는 사례가 바로 눈앞에 있다.

선생은 21세에 관립 고령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일 년 만에 그만두고 1913년 서울의 <경신중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선생이 살고 있던 중화동에서 이규민 선생이 주도한 <청년계> 회원들이 ‘復國志士’ 장학금을 모아서 같은 마을의 문상직 선생과 함께 경신중학교로 유학시켰다. 많이 배워서 독립운동에 나서라는 뜻이었다. (문상직 선생은 경신중학교를 일 년 만에 중퇴했다. 이후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일찌감치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김상덕 선생은 경신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경제난으로 인해 휴학하던 중에 2·8독립 선언의 주동자로 가담하였다. 일제의 감옥에서 만 일 년간 묶여 있다가 풀려난 후 바로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의정원의 경상북도 의원에 피선되었다. 

1922년에는 모스크바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청년대표의 자격으로 참가하였다. 김규식, 여운형 선생 등 쟁쟁한 독립투사들과 함께 레닌이 주도한 민족해방운동자들의 회의에 참가한 것이다. 이로부터 1945년 임정의 문화부장 자격으로 백범 선생과 함께 귀국할 때까지 쉬지 않고 독립운동의 최전방에서 맹활약하였다. 

다만 스스로 쓴 기록물이 거의 없어서 활동상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국내외에 널려 있는 여러 자료를 가로세로로 촘촘히 엮어서 온전한 연대기를 만들어야 하는데 아직은 연구자도 적고 결과물도 희귀하다. 다만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관장이신 김희곤 선생과 충남대학교 허종 교수가 김상덕 선생에 대해 연구하고 있으며, 김삼웅 선생이 2011년에 <김상덕 평전>을 펴냈다. 

 

▲임정 요인 1진 귀국 당시 사진(1945.11.23)

김상덕 선생의 삶에서 독립혁명에 투신한 부분도 기려야 마땅하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 선생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마디를 이루는 것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서의 활동이다. 

해방 당시 건국강령이나 대중들의 요구사항을 살펴보면 이구동성으로 친일파 청산을 외치고 있었다. 친일파 청산은 토지제도 개혁이나 통일된 민주국가 건설을 위한 선결 조건으로, 대중들은 사활적인 이해관계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친일파들이 토지와 공장 및 적산(敵産)을 점유하고 있었으며, 미군정 하에서 실제로 공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으니 이를 척결하지 않고 남북통일과 민주국가 건설을 외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라는 표현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이었다. 미군정은 친일파들이 일제에 충성한 만큼 미군정을 위해서 충견 노릇을 할 것이라고 정확하게 이해하였다. 이승만은 친일파들의 협력을 얻기 위해 “덮어 놓고 뭉칩시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네다”라며 너스레를 떨다가 대통령이 되자 대놓고 친일파들의 뒷배를 봐주며 그들을 이용했다. 

미군정과 이승만, 그리고 친일파들이 뭉치는 슬로건은 ‘빨갱이 사냥’이었다. 1945년 일본의 패망 이후 미국은 바로 반공주의 노선을 걸어갔으며, 터키와 그리스의 공산반란을 진압한 이후 1947년 트루만독트린을 발표하면서 반공 진영을 단속하였다. 이에 편승한 남한의 친일파들은 반공 전선의 최선봉이 되어 독립운동가들을 빨갱이로 색칠하면서 자기들의 살길을 모색하였다. 친일·친미·반공이 애국으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반대로 독립운동은 공산주의와 동격이라고 소리쳤다. 하도 오랫동안 고함지르는 소리를 듣다 보니 대중들은 독립운동가들은 다 공산당이라고 믿게 되었다. 심지어 백범 선생조차도 빨갱이로 몰릴 지경이었다. 나중에는 이승만에 반대하는 사람은 무조건 빨갱이이며 역적이라고 몰아댔다. 

김상덕 선생도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는 바람에 빨갱이로 낙인이 찍혔다. 이북 정권에게 숙청되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외롭게 살았다. 1956년에 돌아가신 분을 빨갱이로 만들었다가 40년 후인 1990년에 가서야 동서화해정책의 분위기를 타고 마지못해 복권시켰다. 

 

글 _ 정희철 김상덕선생기념사업회 회장

 

(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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