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바로 세우기에 앞서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 선생을 기린다(2)
역사 바로 세우기에 앞서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 선생을 기린다(2)
  • 정희철
  • 승인 2019.04.09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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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덕 선생은 1947년, 미군정의 과도입법의원에 참여하여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을 제정하였으나 친일파를 활용하고자 한 미군정이 법률을 공포하지 않아 사장되고 말았다. 그리고 1948년 5·10총선에 고령 지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제헌헌법기초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헌법에 반민족행위 처벌 조항을 넣는 데 이바지하였다. 

이에 따라 국회는 1948년 9월 22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고 9월 29일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하였다. 국회는 10월 13일 국회의원 10명으로 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김상덕 선생은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선생은 12월 22일 반민특위 직제를 마련하고 27일부터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러자 반민법을 제정하기 전부터 신변의 위협을 느낀 친일파들은 반민특위를 해코지하는 데 뭉치기 시작하였다. 먼저 11월 17일 서울시경 수사과장 최난수는 최고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 홍택희와 함께 영주 선생 암살을 모의하였다. 우익 테러리스트 백민태를 사주하여 영주 선생을 비롯한 반민특위 주요 인사들은 물론 김두한, 신익희, 유진산, 심지어 대법원장 김병로 등 이승만의 정적이라고 생각되는 인사들을 납치 살해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백민태는 평소 자기가 존경하던 인사들이 많아서 고민 끝에 한민당 국회의원인 조헌영과 김준연에게 고백함으로써 이 사실을 만천하에 폭로하였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처벌받은 자는 아무도 없다.

이승만 대통령과 친일경찰들의 악착같은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단호하게 친일파 처단에 임하여 1949년 벽두부터 친일반역자들을 체포하였다. 이승만은 선생을 경무대로 불러 회유·협박하기도 하고 심지어 야심한 시간에 직접 영주 선생의 숙소를 찾아와 거듭 회유하기도 하였으나 선생은 요지부동이었다. 1월 5일 선생은 반민특위 위원장으로서 공식 기자회견을 하고 정권의 방해와 친일파의 준동에 대해 엄중히 항의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 박흥식을 체포한 것을 시발로 악질 밀정 출신 이종형과 최린, 악질 형사 노덕술 등을 차례차례 구속하였다. 

그러자 5월 21일 국회 프락치 사건을 필두로 이승만 정권의 대공세(이른바 6월 공세)가 시작되었다. 친일경찰 최운하의 구속을 기화로 내무부 차관 장경근, 시경국장 김태선의 비호 아래 중부서장 윤기병, 종로서장 윤명운, 치안국 보안과장 이계가 지휘하는 친일경찰 40명이 반민특위 본부를 습격하였다(6.6사태). 반민특위 특경대원과 직원 등 35명이 끌려가서 고문과 폭행을 당하고 반민특위가 수집한 친일파 조사 자료들은 모조리 빼앗겼다. 이승만은 다음 날 바로 자기가 지시한 일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 범죄에 가담한 자들 역시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다만 국회에서 내각 총사퇴 결의안을 통과시키자 이승만 정권은 최운하와 조응선을 석방하는 대신 반민특위 직원들을 돌려주는 것으로 마무리하자고 하였다. 

 

반민특위 343일 실적

취급 건수 682건, 영장 발부 408건, 기소 221건, 판결 40건, 체형 12명(집행유예5, 실형 7)

“1950년 3월까지 전원 석방”

선생은 이에 항의하여 위원장을 사퇴하였다. 그리고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국회는 반민법을 개정하여 공소시효를 8월 31일까지로 단축하였다. 이로써 사실상 반민특위의 활동은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나아가 10월 4일에는 아예 반민법 자체를 폐기하도록 하였다. 결국, 재판에 넘겨진 친일파들 가운데 실형을 선고받은 자는 12명에 불과하였으며 그나마 한국전쟁이 끝나기 전에 다 석방되었다. 

반면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 처벌은 어떠했는가 하면 우리와는 하늘과 땅 차이로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40년간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받은 것에 비해 그들은 불과 ‘4년’ 동안 나치의 지배를 받았는데도 말이다. 2001년 MBC가 방송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제32회) - “반민특위, 승자와 패자”>라는 프로그램에서 필자가 녹취한 부분을 소개한다.



환희와 약동의 거리 상드리제. 50여 년 전 프랑스의 상황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1944년 8월, 4년여 동안의 나치 점령기가 끝났고 파리는 해방을 맞았다. 레지스탕스의 무장투쟁으로 파리를 해방시킨 프랑스인들은 곧바로 나치 협력자 숙청에 들어갔다. 전쟁의 열기가 사그라지지 않은 그 시점에 즉결처분한 숫자만 1만여 명이 넘는다. 보복적 처단은 여성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나치에 협력한 여성의 머리를 삭발해 조리돌림하며 구경거리를 만든 다음 투옥했다. 이러한 즉결처분은 해방 후 일 년 동안 계속되었다.

앙리 아모르 : 1943년 9, 10월부터 시작되어 1944년 8월까지 비공식적인 숙청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주로 레지스탕스가 주도했고, 주로 동남·서남 지역에서 행해졌습니다. 그래서 재판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대독협력자나 협력하려고 했던 자들을 처벌하는 일이었으니까요. 이러한 비공식적인 숙청은 드골이 합법적인 숙청을 행하기 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많은 희생자를 냈습니다. 역사상 가 장 큰 대규모 숙청이었죠.

(해설) 드골은 이러한 숙청 작업에 질서를 부여했다. 그는 국가만이 정의의 이름으로 숙청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드골은 훈령을 통해 나치에 협력했던 부역자들을 숙청하는데 적절히 통제하고 이끌었다.

(자막)

1944년 6월 26일 : 나치 협력자 처리 전담재판소를 전국적으로 설치하라.

1944년 8월 26일 : 시민 법정과 함께 비국민제도를 창설하라.

전담재판소와 비국민제도 창설을 골자로 하는 이 훈령은 나치 협력자 처단의 법적 근거가 됐다.

마르크 페로, 레지스탕스 출신 사학자 : 숙청재판소는 나치 협력자들 즉, 대체적으로 프랑스 파시스트들과, 레지스탕스에 적대한 정치인들이 재판을 받았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드골 장군이 이와 같은 특별재판부를 창설하여 나치 협력자들이 심판을 받도록 한 것입니다. 프랑스에서는 이를 통해 잘못했던 사람들은 벌을 받고, 결국 이전에 지배하던 비시정부가 완전히 무너져서 드골 정부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해설) 비시정부의 패탱은 독일에게 항복했다. 그는 프랑스를 구하기 위한 명분으로 휴전협상에 조인했으나 그로부터 프랑스는 패전의 수모를 겪어야 했다. 나치 점령기 동안 패탱 정부는 나치와의 협력을 강조했다. 그러나 프랑스 국민을 노예 상태로 전락시켰다. 유대인 차별정책을 유도했고, 그 결과로 수많은 유대인들을 죽음에 내몰았다. 언론은 히틀러 전체주의를 위한 선전·선동의 도구가 되어 중요 전쟁의 성과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점령 동안 신문을 발행한 것은 물론, 독일 정부의 지원금을 받아 나치의 하수인을 자처했다.

(방송 보도) “파리 법원에서 정의의 칼이 내려질 것이다. 판사와 검사, 배심원들 앞에서 그는 꼼짝도 못했다.”

최고재판소는 먼저 비시 내각의 세 요인을 법정에 내세웠다. 피에르 라발 총리와 조세프 다르낭, 그리고 페르난도 브리농은 모두 사형되었다.

(방송 보도) “프랑스 국민은 그를 사형에 처할 것이다. 죗값을 치러야 할 때가 되었다. 이 의자 위에서 프랑스 국민이 기다리던 사형 판결을 내릴 것이다.”

언론계도 대숙청이 이루어졌다. 브라지야크, 조르쥬 쉬아레스 등 일부 언론인과 지식인들이 사형되었고, 여론을 기만하고 왜곡했던 신문들은 폐간되었다. 살아남은 것은 오직 저항 언론지 뿐.

(자막)

 

[프랑스의 나치 협력자 처벌] - 자료: 1996년 연감 QUID

사형 선고 6,763건 - 사형 집행 767건(즉결처분 포함시 12,000여 명)

종신 강제노동 2,072건, 유기 강제노동 10,637건

유기 징역 22,883건, 공민권 박탈 3,578건, 부역죄 선고 46,145건

 

[나치 협력 공직자 행정처분]

군장교 42,000여 명, 경찰 간부 170명, 정부 관료 28,750명

판검사 334명, 철도원 7.039명, 전기·가스 공사 5,000여 명

총 12만 명에게 시민권 박탈, 파면, 조기 퇴직 조치.

 

[각국의 나치 협력자 처벌(징역형)] 인구 10만 명당 비율

프랑스 94, 덴마크 374, 네덜란드 419, 벨기에 596, 노르웨이 633, 한국 0.00.....1

 

현직 대통령을 비롯하여 많은 역사학자와 중·고등학교 역사교사들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뼈아픈 장면으로 반민특위의 좌절을 들고 있다. 해방 이후 우리 역사가 파행적으로 전개된 결정적인 요소가 바로 친일파의 득세였다는 말이다. 친일파는 부활 정도가 아니라 일본 강점기 때보다 더 높은 자리와 권력을 차지하고 더 많은 재산을 굴리면서 아예 대놓고 악행(학살 만행)을 저질렀다. 그 결과 국민을 저들 말대로 ‘개돼지’로 만들고도 모자라 아예 ‘들쥐’로 유전자조작 해버렸다. 

다음은 필자가 2019년 3월 14일, 오마이뉴스 김종훈 기자와 인터뷰할 때 한 말이다. 

 

“김상덕 위원장이 활동했던 당시 반민특위도 '국론분열' 같은 말들이 이어지다 해체된 것이다. 당시 반민특위가 제대로 활동할 수 있었다면 지금 우리가 (나경원 의원처럼 발언할 수 있는) 이런 상황에 빠졌겠느냐? 

나경원 대표의 발언은 당시 친일파들의 주장과 같다. 광복 70년이 넘었는데 친일파를 언급하면 '국론분열'이라는 이상한 말을 한다. 그때 제대로 역사의 걸음을 밟아나갔다면 이런 발언을 할 수 있었겠느냐.

지금 나경원 대표의 발언을 보면 해방 후 잠시 숨죽였던 친일파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을 거치며 다시 득세한 것과 다르지 않다. 독립운동의 1세대가 사라지고 이제 2세대도 얼마 남지 않았다. 역사를 간접적으로 체험한 3세대의 시대가 오고 있는데 과연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을지 걱정이다.”

 

2006년 10월 1일, 선생의 아들 김정륙씨는 누님(김길성)과 함께 처음으로 평양 룡궁동 소재 재북인사 묘소를 참배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회장 김자동, 김가진 선생의 손자이며 김의한 선생과 정정화 선생의 아들) 유가족 28명이 함께 묘역을 참배한 행사였다. 김상덕 선생의 묘지명에는 ‘나신 곳은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면’이며 ‘돌아가신 날짜는 1956년 4월 28일’이라고 적혀 있다. 

<김상덕선생기념사업회>의 목적 사업 가운데 하나는 이북에 있는 묘소를 남쪽으로 모시는 것이다. 성사된다면 장소는 유족의 뜻대로 하겠지만, 효창공원이나 고령 두 곳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전에 우리는 선생의 고향 마을에 생가터 표지석도 세우고, 도로명도 ‘김상덕로’라고 이름 짓기를 원한다. 나아가 고령에 독립운동가 현창 공원을 조성하는 것도 추진할 과제이다. 

다가오는 4월 28일, 선생의 예순세 번째 기일에는 몇 안 되는 회원들이나마 선생의 사적비 앞에서 헌화 분향하고 추모식을 가지면서 우리의 소원을 빌어볼 참이다. 

 

 

글 _ 정희철 김상덕선생기념사업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