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만에 부활한 “파업전야”를 마중하기 위한 순간

 


1_ “전설의 귀환?” <파업전야> 재개봉까지의 긴 여정

우리는 흔히 현재의 틀로 과거를 재단하곤 한다. 2019년 현재 누구나 스마트폰을 이용해 영상을 촬영하고, 간단한 편집을 거쳐 유튜브에 올릴 수 있다. 하지만 40년 전에는 심지어 VHS(비디오)를 만드는 것도 방송국이나 충무로 영화제작사 외에는 사실상 불가능했었다. 1980년대 이후 경제성장과 함께 비디오 카메라와 VHS 플레이어가 점차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제도권’ 외부에서 영화 비슷한 것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탄생했다. 그러나 요즘처럼 개개인이 DSLR과 액션캠, 맥북을 조금의 수고와 투자로 장만할 수 있고 팟캐스트나 유튜브 1인 방송을 시작할 정도는 아니었다. 웨딩 촬영과 아르바이트, 십시일반 후원을 모아 장비를 장만하고 팀을 꾸리는 ‘집단’의 노력이 필요한 시절이었다.

또한, 현재의 정당정치가 아닌, 군사독재정권의 권력독점 치하에서 진보정당 활동이 공안 탄압에 의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서 반대급부로 사회운동은 ‘비합법’ 조직일 수밖에 없었고 현재는 거의 잊혀가는 ‘재야운동’은 지리멸렬한 야당을 능가하는 사회적 영향력과 상징성을 갖고 있었다. 다양한 사회분야에서 그러했듯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체제에 포섭되어 나팔수 노릇을 하던 문화ㆍ예술권력에 염증을 느끼던 문화예술계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땡전뉴스’라 불릴 정도로 언론 통제가 극심했던 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 하에서 대안 언론-영화 운동이 활성화되었던 것은 위에 서술한 기술혁신도 일정 부분 작용한 결과였다. 

자생적으로 일어나던 개별적 저항은 조직화되기 시작했고, 영화운동에서는 공동창작집단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다큐멘터리 장르에 기반한 ‘푸른영상’과 ‘노동자뉴스제작단’, ‘서울영상집단’ 등이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에 만들어져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한 것도 이 시기였으며, 이런 집단 중 가장 큰 반향을 일으켰던 곳이 바로 <파업전야>를 만든 ‘장산곶매’였다.

장산곶매는 먼저 1980년 광주에 대해 발언한 장편영화 <오 꿈의 나라>를 완성한다. 그 이전만 해도 해외방송을 편집한 방송영상 돌려보기로만 접할 수 있던 5.18 관련 영상자료에 획기적인 혁신이 이뤄진 셈이다. (물론 정권의 탄압으로 영화를 본 이들보다는 상징성과 입소문이 더 크긴 했지만) 80년 광주에 이은 장산곶매의 차기작업이 바로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운동의 폭발기를 형상화한 <파업전야>이다.

장산곶매는 이후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과 참교육 운동의 격동기를 담은 <닫힌 교문을 열며>를 만들고 해소한다. 단 3편의 영화를 남겼지만 각각 1980년 5월 광주(‘오 꿈의 나라’), 1987년 이후 노동운동 고양기(‘파업전야’), 전교조 탄생(‘닫힌 교문을 열며’)이라는 동시대 사회운동의 최정점을 영화로 남겼다. 장산곶매의 위업은 당시 사회운동의 한 극점이라 칭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특히 그중에서도 <파업전야>는 당대 노동운동의 탄생 과정과 함께 당시 사회상의 증언, 그리고 사회전망의 제시에 이르는 ‘자기완결’적 세계관이 확고했던 작품이자, 정부의 탄압으로 인한 상영 당시의 ‘무용담’ 같은 일화들로 “전설”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근 30년이 지나 재개봉을 맞이한다.

 

2_ 지난 30년 동안 <파업전야>에겐 무슨 일이 있었나?

1990년 <파업전야> 개봉 당시를 경험하진 못했다. 다만, 그 경험을 겪은 이들의 온갖 ‘신화’와 ‘전설’을 구술로 접했고, 1996-97 노동법ㆍ안기부법 개악 반대 민주노총 총파업에 동참하면서 어느 구석에 비장 되어 있던 <파업전야> 복사 비디오 시청으로 이 전설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비디오를 몇 번이고 다시 보곤 했다. 1995년 개봉했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과 <파업전야>는 한국 사회에서 노동문제를 고민하던 이들이라면 꼭 보려 했던 두 편의 영화였고, 민주노총 출범 시기에 맞춰 이 영화들을 접한 필자에게는 잊히지 않을 기억의 잔상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검열’이 구시대의 유물로 확정되는 1990년대 후반이 되자 <파업전야>를 복사 비디오로 보는 것 정도는 이제 그렇게 위험하지 않았다. 그러나 보기 위한 스릴(?)이 줄어들수록 보려는 빈도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노동운동이 과거만큼의 영향력을 상실하면서 그 문화적 정수이자 상징이던 이 작품 또한 기억 속에서 잊혀갔다. 하지만 잔불이 남아서인지, 아니면 그 망각에 대항하는 시도인지 오히려 21세기 들어 <파업전야>는 드문드문 공식적인 공간에서 소개되기 시작했다.

가장 파격적인 상황은 2006년 11월 10일자로 공영방송인 KBS 1TV “독립영화관”을 통해 <파업전야>가 공중파로 방영된 것이다. 비록 심야 프로이고 시청률이 높진 않지만 영화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격세지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그리고 2008년 하반기에 당시 제작상황 코멘터리(해설)가 수록된 DVD가 판매되기에 이르렀다. 이제 복사 비디오가 아닌 DVD 화질로 본 작품을 공동체 상영하는 게 가능하게 된 것이다.

2014년 ‘인디포럼’ 영화제에서 포럼기획전으로 초청 상영되었고, 2018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아카이브전 초청 상영이 이뤄지기도 했다. 어느 정도의 발품과 의지만 있다면 <파업전야>를 보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게 된 것이다. 정작 그런 상황이라면 <파업전야>의 30년 만의 재개봉, 사실상 극장 최초개봉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3_ ‘전설’로만 남았던 <파업전야>에 온당한 평가를 위하여

지역에서 노동영화를 소개해달라고 요청받을 때 십여 년간 <파업전야>는 하나의 교범 같은 존재였다. 두 번에 한번은 <파업전야> 같은 작품을 소개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항상 무척 곤혹스러운 상황이었다. ‘노조로 단결해 싸워서 승리하는’ 영화를 찾기 때문이다. 의지를 키우고 용기를 북돋기 위한 영화도 필요하지만, 1980년대 후반의 정서와 시대 배경의 정수를 담아낸 <파업전야>가 온전하게 전달될지에 대한 걱정이 먼저 앞섰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래도 당대 노동문제 현실을 다루는 작품들은 대부분 다큐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데, 이는 제작환경(다큐: 저비용과 개인 혹은 소그룹 VS 극영화: 고비용과 팀 체제)의 차이와 함께, 상영환경(다큐: 공동체상영+극장개봉 VS 극영화: 극장개봉 중심)에 따른 차이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큐의 특성상 승리하는 결말은 실제 상황이 아닌 이상 의도하기 어렵다.

그래서 시기마다 시의성이 높은 현장투쟁 다큐나 보편적 공감대를 담은 해외 극영화들을 대신 소개하곤 했었는데-지극히 예외적인 경우가 부지영 감독의 <카트>나 박광수 감독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정도였다-담당자들은 늘 성에 안 차 하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현실에서 패배하거나 방어하는 싸움을 겪는 이들에게 가상의 승리를 보여주는 게 우선순위가 되는게 맞는지 고민했었다. <파업전야>는 마치 박제 마냥 ‘투쟁 승리’의 상징으로만 기억되는 게 아닐까 하는.

정작 작품은 승리를 보여주는 결말이 아니었다. ‘각성’과 뒤이은 ‘봉기’까지가 <파업전야>가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그때 당시에도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딱 거기까지가 영화로 표상되는 문화예술의 역할이라 봤을 것이다. 영화 한 편이 상영되는데 거품을 물고 반응했던 군사정권의 광폭함과 그에 맞선 저항이 영화의 마침표를 찍는 역할을 했었던 것이 아닐까? 기계적 도식대로 ‘정’(당대 노동 현실을 최초로 반영한 영화)-‘반’(영화와 현실운동 모두에 과민반응하던 독재정권)-‘합’(영화를 보기 위한, 혹은 보여주기 위한 투쟁 과정을 통한 집단적 체험)이 완결되는 구조였기에 <파업전야>가 전설처럼 회자되었지 않을까 넘겨짚어 본다.

 


<파업전야>는 여러 번 위에서 언급했듯이 1990년 당시 사회 운동의 성취와 한계의 압축판에 가까운 작품이다. 물론 현재 상업영화판에서 활약하는 여러 영화인들의 초창기 정수가 담겨 있기도 하고, 실제 파업 현장이던 인천 남동공단의 모 사업장에서 합숙하며 상당부분 마치 다큐멘터리 찍듯 촬영한 동시대성도 탁월한 작품이다.

하지만 영화적 형식으로 보자면,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사회파 액션물 구도를 그대로 주인공만 노동자들로 바꿨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자체로도 당대 한국영화에선 충격적이었던 게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비록 지금은 시련을 겪지만 결국 ‘역사의 주인’으로 승리할 것이라는 미래에 대한 전망과 투쟁의 당위성을 믿던 시절의 작품이니만큼, 자연스러운 결말로 흘러가는 도식성은 지금 현재의 관객들에겐 그저 철 지난 선전ㆍ선동물로 비치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실제로 <파업전야>를 관람한 이들은 작품의 명성에 비해 극소수라는 걸 고려한다면 그런 반응을 제대로 겪어내야 이 작품이 제대로 된 평가로 역사에 남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 한 구석에 자리 잡는다.

 

4_ <파업전야>를 극장에서 보자! 그리고...

재개봉이 다가온다. 하지만 아마 <어벤져스 : 엔드 게임>이 90% 전후의 상영관을 장악한 극장가에서 <파업전야>를 다시 볼 기회는, 예전 열정적으로 복사 비디오를 돌려보던 환경보다 오히려 더 드물지도 모른다. 물론 4K HD로 리마스터링한 <파업전야>를 극장 좌석에서 보는 기회는 생경하고 새로운 체험일 것이지만, 과연 그렇게 보는 <파업전야>가 어떤 감흥으로 다가올지 솔직히 두렵기도 하다. 신화를 벗어나 ‘영화’로 받아들여지기엔 이 작품의 장점은 탈각되고 단점만 부각되어 보이지 않을까 하는, 마치 어릴 적 영웅 같았던 특수촬영물이 지금은 유치찬란해 보이는 그런 실망감 말이다. 그럼에도 <파업전야>의 재개봉은 두근두근하는 사건이기는 하다.

 

아마 이 작품을 어렵게 상영관을 찾아내 관람하는 이들은 두 부류일 것이다. 이미 봤거나, 명성은 알지만 정작 영화는 못 봤거나. 전자는 아마 옛 친구를 만나거나 추억의 일기장을 들춰보듯이 이 영화를 볼 것이다. 후자의 반응은 정말 궁금하다. 그리고 전자나 후자의 권유나 제안에 끌려오듯 함께 극장을 찾은 제3의 관객들의 반응은 어떨지 모르겠다. 그 미지수의 반응이 궁금하니 극장을 한두 번 찾아야겠다. 대구ㆍ경북에서는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이 5월 1일 노동절부터 개봉을 시작한다.

 

[ 작품정보 ]

파업전야 (1990)

드라마|한국|107분|12세관람가

1990.3.28. 개봉2019.5.1. 재개봉

 

감독 _ 이은기, 이재구, 장동홍, 장윤현

주연 _ 홍석연, 왕태언, 신종태, 최경희, 강능원, 조현모, 임영구박종철, 고동업, 엄경환, 황진, 최일순, 황병도

 

 

관련기사

저작권자 © 뉴스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