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햇살은 머리카락부터 코와 턱선을 넘어 가슴을 데우는 데까지 단 몇 초면 충분하다. 이른 아침, 희뿌연 뭉게구름에 갇혀 허우적거리며 아무리 헤어 나오려 해도 깊은 잠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순간 데워진 마지막 봄볕을 배웅이라도 할 작정이었나? 허공을 휘저으며 버거웠던 눈을 떠 본다.

방사형으로 쏟아지는 빛은 하늘 아래로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직각으로 닿아 눈부시다. 수많은 구름들이 겹쳐진 가장자리를 뚫고 세차게 뻗어 나가는 빛 입자들은 눈동자를 덮고 있는 연약한 살갗에 내려앉아 간지럼을 태우지만,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속도감으로 강하게 파고들었다. 또다시 온몸으로 퍼져 작디작은 구멍 속으로 부드럽고 따뜻하게 스민다. 이제 내 온몸은 달아올라 열기로 가득 찼다. 

그런 나를 데리고 숲으로 간다. 

 

어느덧 방죽 위에 올라 바라보는 숲은 녹색의 컬래버레이션을 이루고 있다.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이 자신의 존재를 초록의 빛깔들로 피력한다. 이내 불어오는 바람에 녹색의 물결이 그려진다. 생동감 넘치는 감상이었다. 봄바람은 뭉글뭉글 뭉쳐져 있는 어린잎들을 자극할 것이다.

어느새 가까워지는 숲을 바라보며 발걸음의 속도가 빨라지고 더 넓은 폭으로 성큼성큼 속도를 낸다. 다양한 초록색으로 바람에 넘실대는 주인공들은 누구일까? 어서 가서 알아봐야 한다. 이미 그림자가 나무 기둥에 닿았다.

나무들의 새순은 어리고 여리지만 날카롭게 뻗어 펼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멀리서 바라본 녹색 뭉치들이 아니다. 졸참나무는 아직 반짝이는 흰 솜털에 의지하며 은녹색을 하늘 가까이 뻗어 놓고, 신갈나무는 밝은 연둣빛으로 큼지막한 잎을 펼치며 여기저기 작은 구멍들로 애처로운 상처가 나 있다. 육백 고도 능선에서조차 신갈나무들은 벌써 많은 나뭇잎이 일찍 깨어난 애벌레에게 먹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래 숲 바닥과 폭이 넓은 숲길에는 칡덩굴이 무엇이든 감아 오르는 검은 마의 손길을 한가운데까지 뻗쳐 놓았고, 노랑제비꽃은 곧 터질 듯 맺혀 있다. 검은 덩굴손을 비웃듯 찬란한 연두 알에서 옅은 황색으로 갈라져 터질 때까지 살랑이며 빛을 내어주었다, 다시 키 큰 나뭇잎들에 숨었다 반복하는 빛의 숨바꼭질을 오히려 즐길 것이다. 

이미 숲은 셀 수조차 없는 층으로 나누어져 서로의 빛 먹이를 차지하기 위해 앞을 다투어 겨우내 두꺼웠던 비늘들을 차례로 떨어뜨렸다. 어떤 아이는 큰키나무가 잎새를 다 펼치기 전에 번식의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5월이 다가온 숲은 참나무들의 결혼식이 끝나가는 시점이다.

높은 고도의 숲에선 좀 더 긴 결혼식이 진행될 것이지만 꽃가루가 다 날아가면 참나무는 필요 없는 세포 뭉치인 수꽃들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숲 땅 위로 떨어뜨린다. 하지만 바람은 더욱 재촉한다. 이제 뜨거운 여름의 빛을 받아드릴 준비를 해야 한다고. 그래서 큰키나무의 나뭇잎들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가장 아래 바닥의 풀꽃들이 지고 떨기나무들과 덩굴, 작은 키 나무들이 차례로 잎을 피우고 있을 때 큰키나무는 무심하게 열려있던 숲의 하늘과 맞닿은 공간에서 번식의 기쁨을 누렸다. 곧 신갈나무의 큰 잎이 황홀하게 흔들릴 것이다. 이 세상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춤을 출 것이다.

높고 깊은 숲에서 바람과 빛의 춤사위를 신갈나무를 통해 바라본다. 

 

글 _  이현정 경주숲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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