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중항쟁 당시 전남도청앞 광장. 사진 518기념재단
▲5ㆍ18민중항쟁 당시 전남도청앞 광장. <사진자료 출처: 518기념재단>

 

5·18 당시 나는 군에서 말년 병장이었다. 12·12 전두환 군사반란에 동원될 뻔했지만, 이듬해 6월 25일 제대할 때까지 아무 사고 없이 지냈다. 당시 고향이 광주인 내무반장 길하사가 15일간의 휴가를 나갔다가 사흘 만에 돌아와서 광주에서 큰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얘기해주었다. TV에서는 광주에서 ‘북괴’의 간첩들이 폭도들을 사주하고 있으며, 김대중을 따르는 일부 불순 세력들에 의한 폭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었다. 폭동이라면 당연히 그 지역에 주둔하는 군대가 출동해서 진압하겠지 하고 남의 나라 이야기인 것처럼 흘려듣고 말았다. 

제대하고 80년 2학기에 복학해 보니 비상계엄은 해제되었고 전두환은 정해진 수순대로 대통령에 올랐다. 80년 봄, 나에게는 ‘서울의 봄’도 없었고 광주 학살의 진상도 알려지지 않았다. 

83년에 고등학교 교사로 교단에 서게 되었다. 대학 때 배우지 못했던 역사를 새롭게 알게 되고 많은 잡지와 신문을 접하면서 진짜 공부다운 공부를 하게 되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뉴스와 진보적인 지식도 접하게 되었다. 문부식과 김현장의 반미투쟁을 통해 5·18의 진실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검찰에서 펴낸 보고서 <좌경 이론의 실제>(서울지방검찰청 공안부. 1987. 12.)를 읽고 점점 더 의식화의 길로 들어섰다. 

86년 12월부터 87년 1월 말까지 경북대 사대에서 1급 정교사 연수를 받을 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졌다. 비록 캠퍼스 안에 한정되었지만, 학생들이 박종철 사건에 항의하는 집회와 시위를 조직하였다. 나는 검은색 한복 두루마기로 정장을 하고 난생처음 시위 현장에 가담하게 되었다. 물론 맨 꽁무니에 따라 다니다 ‘1정연수장’(1급 정교사 연수장-편집자 주)에 들어가곤 했지만 누가 나보고 그만두라는 사람도 없고 칭찬하는 사람도 없었다. 다들 군사정권의 총칼이 어느 순간에 튀어나올지 몰라 경계하는 눈치였다. 나는 단지 졸업 후에 배운 역사의식에 비춰 그때 학생들의 교내 시위에 동참하는 게 역사적 책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해 여름의 6월항쟁 기간 나는 현직교사 신분으로 매일 ‘가투’에 참여하였다. 

광주민중항쟁의 영상과 책도 많이 보았다.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가 쓴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책을 숨죽여 읽으며 충격과 분노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특히 학생들이 기획한 광주사진전을 보면서 통곡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토록 참혹하게 죽어가는데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현실에 얼마나 외롭고 두려웠을까, 상상만 해도 치가 떨렸다.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은 광주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절규하고 있었다. 누군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삶을 가벼이 여겼을 것인가. 

하지만 계엄군의 총칼보다 더 무서운 것은 광주 시민을 폭도로 몰아 고립시키고 그중에서도 도청의 시민군을 따로 제물로 삼으려는 자들의 간악함이다. 나아가서 이런 술책을 모른 척하며 광주를 외면한 대한민국 시민들의 공포심에 한 번 더 전율해야 하는 사실이 진짜 큰 공포였다. 죽음보다 더 참혹한 ‘버려짐’과 버림 끝에 이어진 ‘잊혀짐’이다. 

그러나 아픔과 두려움을 딛고 일어선 열사들과 의인들 덕분에 우리는 다시 광주를 살려냈다. 오늘 5·18민주화운동 39주년 기념식에서 대통령이 광주의 역사적 의의를 복기해주었다. ‘우리는 그동안 광주에 대해서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살아왔으며 아직도 부끄럽고 미안하다’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주었다.

하지만 민주화운동으로 규정된 지 20년이 넘었으며 사법적으로도 판결이 난 정의로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폄하해서 이득을 얻으려는 자들을 제어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화가 난다. 아직도 학살자들이 떵떵거리며 살고 있고 역사의 가해자들이 되레 큰소리치고 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제는 그날의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씻기 위해 우리가 더 이상 참지 말아야 한다. 참지 말고 분노하고 일어나자.
 

글_ 정희철 〈김상덕선생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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