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문화유산 답사기(1)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依舊) 하되 인걸(人傑)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자신이 섬기던 왕조를 잃은 충신의 서러움, 삶의 허망함과 무상함을 이보다 잘 표현한 시조가 있을까? 위 시조는 고려말의 충신, 삼은(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야은 길재 선생의 작품이다.  선생은 고려의 옛 도읍지인 개경을 둘러보며 고려 왕조에 대한 정과 인생무상을 감상적 어조로 노래했다.

구미는  길재선생의 고향(구미시 해평면)으로 그를 기리기 위한 문화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원래는 금오산에 세워졌다가 임란후 선산읍 원리에 다시 세워진 금오서원, 구미시 오태동에 있는 길재의 묘소, 그의 묘소 인근에 세워진 지주중류비 등이 그러하다. 

​길재선생은 고려때 성균박사(成均博士)를 지냈고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임명되었으나 고려의 쇠망을 짐작하고 노모의 봉양을 구실로 사직하였다. 이후 동문수학한 태종이 그의 학식을 높이사 벼슬을 주려 하였으나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충절에서 낙향, 은거하여 금오산 기슭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현재 그곳에는 그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서 1768년(영조44년)에 건립된 채미정이 자리하고있다.

채미정(採薇亭)의 '採薇'란 고사리를 캔다는 의미이다. 중국 은(殷)나라가 망하고 주(周)나라가 들어서자, 백이와 숙제는 새로운 왕조를 섬길 수 없다하여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연명하며 은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고 한다. 채미정이란 이름은 바로 길재 선생의 충절을 백이와 숙제에 비유하여 붙인 이름인것이다.

채미정은 1977년에 전면적인 보수 공사를 한 이후 현재까지 잘 보존되고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기와지붕을 하고있으며, 평면은 중앙 한 칸만 온돌방으로 꾸미고 방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또한 건물의 가운데 위치해 있는 온돌방에는 벽이 없고 들어열개문을 설치하여 문만 열어 올리면 전체가 마루가 되도록 장치하였다. 건물 골격은 5량가에 겹처마집이다.

이와같은 평면구조는 경상도에서 흔치 않은 사례로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채미정은 이채롭게도 관광객들이 마루에 걸터앉아 담소를 나눌 수 있도록 개방해 놓았는데, 그래서 그런지 건물에 온기가 머물러 있고 살아있는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 석교와 흥기문 채미정 앞 석교와 흥기문은 자연과 어우러져 조화를 이뤄 콘크리트 다리와는 전혀 다른 운치를 자아낸다.  





      ▲ 채미정 채미정에는 벽이 없고 들어열개문이 설치되어 문만 열어 올리면 전체가 마루가 되는 개방적인 구조이다.


▲ 구인재 길재 선생 후학들의 강학공간으로 어짐을 구한다는 뜻이 있다. 목재면에 칠을 하지 않고 목재면을 그대로 살렸는데, 꾸밈이 없고 절개있는 선비의 정신을 표현하는것 같았다.

 


​   ▲경모각 경내에서 가장 뒷편에 있는 건물로 숙종이 야은 길재선생의 절의를 찬양하는 오언절구의 어필을 남겼다.

 

 

 

▲ 고려문하주서야은 길선생유허비(高麗門下注書 冶隱 吉先生遺墟碑) 처음 비를 세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694년(숙종30년) 선산도호부사 김만증이 새로 갈아 세운것이 오늘에 이른다.​
 


 

 

 
歸臥烏山下(귀와오산하)     금오산(琴烏山) 아래 돌아와 은거(隱居)하니
淸風比子陵(청풍비자릉)     청아한 기풍은 엄광(嚴光=號:子陵)과 비견(比肩)할 만하네.
聖主成其美(성왕성기비)     성주(聖主)께서 아름다움 이루게 하셔
勸人節義興(권인절의흥)     모든 사람에게 절의(節義)를 일으키려 하심일세.
자릉(엄광)은 후한 광무제의 죽마고우로 그의 배위에 발을 올려놓고 잘 정도로 친했으나 광무제의 권력욕에 실망하여 은거하며 낚시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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