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로 친환경적인 괴수물’

 

 

0_ 느닷없이 ‘괴수 영화’?

모두가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논할 때 뜬금없이 ‘괴수 영화’에 관한 글을 기고합니다. 5월 29일 개봉한 <고질라 : 킹 오브 몬스터>입니다. 전형적인 장르의 법칙에 충실한, 괴수가 등장해 도시를 파괴하는 영화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이전 작품이자 국내에선 최고 흥행작이었던 <괴물>도 괴수물이지요. 괴수물이라는 장르는 참 특이합니다. 상업성을 극대화하면서 동시에 다양한 사회적 배경이 녹아들기도 합니다. 한 장르에서 동상이몽을 하게 만들죠. 수많은 일본영화의 거장과 괴작들의 인큐베이터가 되기도 했던 ‘핑크 영화’처럼 말입니다.
※ ‘핑크영화’란, 1970~80년대 닛카츠 영화사를 필두로 한 에로영화의 흐름이다. 일정 분량ㆍ시간 이상의 노출과 베드씬만 들어가면 영화의 나머지 시간은 감독 재량에 맡겼다. 제작비가 저렴한 한편, 신인 감독과 스태프에게 데뷔 기회와 안정적 일자리가 제공되는 기획으로 한때 일본영화시장의 40%를 차지했었다. 에로영화와는 차별화되는 지점이 많아 연구주제로도 많이 활용되고 있다.

△ 1954년 作 영화 <고질라> 포스터 

특히 “고질라”는 첫 영화 등장 이후 60여 년 동안 동서양을 넘나들며 엄청나게 많은 후속작을 낳으며 다양한 소재와 배경이 가미되기도 했습니다. 그 출발을 알린 1954년 작 <고질라>는 원폭에 대한 공포와 밀접하게 연결된 작품으로, 더욱 중층적인 해석이 가능한 시리즈물입니다. 본래는 특별한 의도가 없었지만, 시간과 내용이 쌓이면서 자연스레 하나의 세계관이 생겨나는 ‘장르 영화’이기도 합니다. 스타워즈나 스타트렉 역시 처음부터 대하 서사물로 기획된 게 아니라 ‘흥행성’ 때문에 수명이 계속 연장되면서 다양한 설정이 쌓인 지층을 형성했습니다.

특히 이번 최신판 <고질라 : 킹 오브 몬스터>는 60여 년 전, 첫 작품의 영문 제목을 그대로 쓸 만큼 여러모로 공들인 영화인지라 이야깃거리가 더욱 풍성합니다.

 

1_ ‘괴수물’의 주인공은 괴수라는 평범한 진리

로맨스 영화는 주인공 커플의 연애, 코미디 영화는 (어떤 설정과 배경이건) 빵 터지는 웃음을 주기 위한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괴수 영화는 괴수가 등장해 경이와 공포를 일으키며 시청각적 쾌감을 주는 영화입니다. 주인공이자 중심은 괴수입니다. 제목이 <킹 오브 몬스터>, 즉 ‘괴수들의 왕’은 다른 괴수들과 겨뤄서 무리의 왕이 되는 서사로 흘러갈 것이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너무나 단순합니다. (시나리오 요약판 수준의 스포일러가 유출되기도 했었죠) 다만 우리가 일상에서 볼 수 없는 간접체험을 시청각적으로 선사하고, 그 부분에 공을 엄청나게 많이 들였습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급 대자본이 투입되는 영화 가운데 배우 출연료보다 특수효과 등 기술비용이 더 들어가는 경우는 괴수물이 거의 유일하겠죠. 괴수를 구현하기 위한 여러 가지 기술에도 돈이 무진장 들어갑니다. 상영시간 내내 괴수를 등장시키지 못하는 건 대부분 돈 때문이지요. 그래서 괴수의 등장 시간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영화 속 ‘조연’으로 등장하는 인간들은 고군분투 하지만, 관객들은 ‘나의 괴수를 돌려줘!’라며 주인공을 찾습니다. 이 장르의 규칙이지요.

<고질라 : 킹 오브 몬스터>는 장르영화의 특징이 좋은 면 혹은 나쁜 면으로 극대화된 작품입니다. 132분의 시간 중 괴수들의 결투 장면 20여 분을 보기 위해 나머지 두 시간 동안 할리우드식 가족 드라마를 억지로 보는 기분이지요. 전체 시간을 괴수대격전으로 채워도 어쩌면 견디기 힘들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대부분의 뻔한 장면과 일부 경이로운 장면의 조합이거든요. 많은 괴수물이 그러하지만.

 

 

2_ 장르의 법칙, 게임의 규칙

“고질라” 시리즈는 1954년에 첫 영화가 나오고 무수한 리메이크와 시리즈가 등장한 만큼 방대한 설정과 팬덤이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괴수 고질라가 인간의 무분별한 원자력 실험의 결과로 오랜 잠에서 깨어 등장했다는 설정은 반복됩니다. 

고질라가 핵실험 결과로 바다에서 쫓겨나 일본에 상륙해 도시를 때려 부수는 클라이맥스를 보면서 혹자는 과거의 원폭투하 경험과 연관을 짓습니다. 인간이 강제로 해방한, 원래 존재해선 안 될 금단의 힘과 그로 인한 파괴로 울부짖는 공포를 그보다 잘 구현할 수 없었던 게 1954년 원작 “고질라”인 셈입니다.

이후 수십여 년간 일본은 물론 세계 각국에서, 공식ㆍ해적판을 막론하고 ‘고질라’나 유사한 괴수물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합니다. 당대 특수촬영기술의 집대성인 괴수물들은 어릴 적 그 영화를 봤던 이들에겐 경이와 충격으로 남아 있죠. 아이디어만 있다면 좀 조잡해도 영화를 만들고 팔 기회가 생기니 재기발랄한 젊은 작가들이 다양한 시도를 하면서 발굴되곤 했습니다.(이런 면에서 좀비물과도 유사성이 있네요)

특히, 자연 파괴에 관련된 설정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는 ‘괴수’라는 존재 자체가 인간의 합리성과는 대척점에 있는 자연 혹은 우주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자연을 파괴하며 이를 개발이란 인간 본위의 사고로 합리화하지만 한구석에 숨어 있는 두려움이 ‘괴수’라는 존재에 투영되는 식이지요. 그래서 괴수영화에는 그저 계몽적일지라도 자연 파괴에 대한 경각심이 꼭 양념처럼 들어갑니다.

그러나 괴수에게 감정이입이 너무 깊이 되면 인간혐오에 빠지기 딱 좋으니 인간이 괴수에 협력하거나 혹은 괴수가 알아서 퇴장하는 방식으로 부조화를 이루며, 괴수물에서 인간의 드라마는 시간 배분 상으로는 더 많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이 장르물, 괴수 영화는 만들어져 왔고 이후로도 그렇게 만들어질 것입니다.

 

 

3_ 스크린에 부활한 고대 신들의 재림

괴수물은 말이 안 되는 걸 말이 되는 것처럼 해내야 하는 제약과, 제한된 예산비용이라는 두 족쇄에 묶인 채 출발하는 영화입니다. 그러다 보니 졸작의 비율도 꽤 높지만 그 중에서도 일부의 수작이 등장하고, 흥행 타율이 나쁘지 않기 때문에 꾸준히 만들어집니다. 아이들 성화에 끌려온 가족들의 지갑 털이 이상의 수준을 가진 예외작이 나오기도 합니다.

<고질라 : 킹 오브 몬스터>는 상업영화입니다. 괴수들이 날뛰는 걸로 시각적 체험을 선사하며 수익을 창출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 테마파크 아이맥스 영상과는 차별화되는 ‘이야기’를 넣으려다 보니 어딘가 빈틈이 생깁니다. 할리우드에서 새로운 이야기는 지난 100여 년간의 영화 역사 속에 고갈되어버렸습니다. 마블 코믹스나 그리스 로마 신화까지 영화적 요소로 등장합니다. 마블 코믹스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이하 MCU)로 우주적 세계관이 되어 존재하지요.

<고질라 : 킹 오브 몬스터>는 평작과 수작의 경계에 딱 걸쳐진 작품입니다. 매력적인 것은 고전 괴수물들이 완성한 ‘괴수’라는 존재에 대한 개념을 정말 온전하게 구현해냈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시선에서는 ‘내 부동산 다 때려 부수는’ 당장 쏴 죽여야 할 괴물입니다. 괴수의 입장에 보면 평화롭게 잘 살거나(<킹콩>이 대표적) 조용히 동면하는(<고질라>의 경우), 원래 주어진 운명 대신 괴물로 변이(봉준호의 <괴물>처럼)되어 외부에 의한 일탈이라는 비극적인 운명으로 내동댕이쳐진 셈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인간 본위로는) 파괴를 일삼다가 끝내 퇴치당해 비극적 최후를 맞죠. 인간 중 착한 주인공이 괴수의 시체를 보며 측은해하는 장면으로 끝나곤 합니다. 그게 전형적인 서구식 괴수물의 설정입니다.

한편, 비서구 영화에서 괴수들에 대한 취급은 조금 다릅니다. 고질라는 때로 죽임당하지만 대부분 그냥 알아서 할 일 하고 바다 속으로 사라지곤 합니다. 그리고 다음 시리즈에 다시 등장해 포효합니다. <킹 오브 몬스터>에서 중국인 과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서양에서 용은 악마이지만 동양에서는 신성한 존재’라는 식이지요. 영화 속에는 세계 곳곳에 잠복해 있는 괴수들을 감시하는 기지들이 나옵니다. 비서구권 영화에서는 괴수들이 과거에 활약하던 시절의 인간들이 건설한 신전이나 제단이 늘 주변에 보입니다. 괴수를 신성시하거나 괴수와 공존하려 했다는 점이 드러납니다. 즉, 괴수를 비정상적인 존재로 두려워하고 비하하는 건 흔히 ‘과학적 합리’에 긴박된 서구중심의 사고입니다. 

 

<킹 오브 몬스터>는 이런 비서구적 관점을 기반으로, 서구문명의 근원 중 하나인 그리스 신화를 차용해 괴수를 설명합니다. ‘티탄/타이탄’(Titan)이라는 이름으로 말이죠.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은 전쟁을 두 번 치릅니다. 사실 그리스 신화는 엄청나게 복잡해 보이지만 ‘두 번의 전쟁’으로 시작되고 완성되는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전쟁은 바로 신과 티탄의 전쟁이고, 이 전쟁을 통해 올림푸스 신들의 패권이 확립됩니다. 두 번째 전쟁은 그 패권에 도전하는 티탄의 후예 ‘기간트’들과 올림푸스 신, 그리고 신의 핏줄이 섞인 인간영웅들의 전쟁입니다.

하지만 올림푸스의 신들과 티탄은 친족들입니다. 즉 티탄이라는 신들 사이의 내전에서 승리한 게 올림푸스의 신 분파인거죠. 우리는 티탄을 그저 나쁜 거인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티탄은 본질적으로 신입니다. 올림푸스의 신들이 분업을 위해 각자의 영역을 구분하고, ‘바다의 신’, ‘달의 신’ 하는 식으로 군림하는데 비해 제 영역을 보장받지 못한 것 뿐이죠. 인간들에게 각인되지 못했지만 고유의 역할과 지배영역을 가진 고대 괴수들에게 ‘티탄’이라는 이름을 붙인 건, 이 영화를 만든 이들의 관점을 잘 드러내주는 대목입니다.
※ 마블 코믹스에 기반한 일련의 영화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세계관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라 지칭하는 것처럼, 할리우드에서 근래 리메이크되는 괴수물들의 세계관은 “몬스터버스”라는 이름으로 불려진다. “고질라”(2014), “콩 : 스컬 아일랜드”(2017), “고질라 : 킹 오브 몬스터”(2019), “고질라 VS 콩”(2020 예정) 모두 괴수들이 원래 지구의 주인이었다는 세계관을 발견할 수 있다.

 

신적 존재인 학명에 걸맞게 영화에 등장하는 ‘티탄’들은 극단적인 수단을 쓰지 않는 한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존재입니다. ‘신’이니까요. 인간이 창궐하기 전 지구의 자연 생태계는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초거대 생물을 만들었고, 이 비범한 존재들이 각자 싸우기도 하지만 그 결과조차 지구 생태계 균형에 봉사하는 작용을 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또한, 영화 속에서 사고 치는 것은 늘 인간이며 수습하는 쪽은 늘 괴수들입니다. 괴수물의 왕도를 제대로 구현한 작품인 거죠. 특히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주인공 격 4대 괴수는 그런 각자의 역할이 잘 주어져 있습니다. ‘진짜’ 왕과 ‘가짜’ 왕, 왕의 조력자, 왕위 수여자로 나뉘어 있죠. 영화 속에선 그 외에도 여러 괴수가 더 나옵니다. 제한된 상영시간과 이야기 구조를 위해 그저 스쳐 지나가듯 보일 뿐이라 아쉽기는 합니다만 마무리 엔딩 장면에서는 장엄한 광경을 선사해줍니다. 각자의 지배권을 가진 대자연의 군주들이 모여 그중에서도 ‘왕’을 승인하는 자리이니까요.

영화 내내 인간은 무기력하며, 괴수들을 바라만 봐야 하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영화 속에서 괴수에 대한 취급은 정중하며 신화 같은 존재로 대우합니다. 알아서 잘 굴러가는 자연을 자기 멋대로 파괴하고 사고 치는 인간들 때문에 피곤하게 일하는 괴수들의 수난담이 <고질라 : 킹 오브 몬스터>인 거죠.

 

4_ 인간 본위의 사고가 던지는 역설

영화 속에서 사고를 치고 나서 협력하는 이들은 극단적 환경주의자와 그에 조력하는 세력입니다. 사태를 악화시키는 건 정부와 군대 수뇌부입니다. 주인공 가족의 이야기에서 괴수를 조종하거나 세상을 구하려던 계획이 실패한 원인은 결국 인간 본위, 인간 중심의 오만이었음을 영화는 설파합니다. 괴수들은 인간이 존재하기 전부터 알아서 지구의 균형을 유지해왔습니다.  

하지만, 시리즈로 이어지는 영화의 설정에서는 괴수를 이용해 자신들의 부, 혹은 그릇된 욕망을 실현하려는 세력들이 수두룩합니다. (영화 속에서 티탄의 모든 것이 비밀리에 고가로 거래되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구매자는 돈이나 권력이 있는 집단들이죠) 그렇게 ‘어른들의 사정’으로 괴수와 인간은 계속 고통 받을 운명이며, 돈벌이를 위한 영화도 계속 만들어질 것입니다.

<고질라 : 킹 오브 몬스터>는 전형적인 할리우드 괴수물 상업영화입니다. 억지 할리우드 드라마 신파가 난무하고, 미국이 지구방위대 노릇을 하겠다고 헛된 수고를 거듭합니다. 속편을 암시하는 설정이 뜬금없이 출현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괴수물의 전통과 근본원리를 제대로 구현해보려 한 감독과 제작진의 노고 덕분에, 일부의 아름다운 혹은 장엄한 장면들이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뭔가 잘은 모르겠는데 뭉클하거나 저릿한 느낌을 받는다면 그런 부분들은 거의 모두 상업영화 공식보다는 장르적ㆍ문화적 가치를 부여하려 한 제작진의 노고가 빛을 발한 순간들일 것입니다.

숨은그림찾기가 되겠지만 <고질라 : 킹 오브 몬스터> 속에는 60여 년을 이어온 괴수물의 대표 격인 “고질라” 시리즈에 대한 헌사와 오마주가 그득히 들어차 있습니다. 영화 속 장엄함의 배경이 궁금한 분들이라면 검색 몇 번 수고할 가치와 재미가 있는 작품, <고질라 : 킹 오브 몬스터>입니다.

 

 

[ 작품 정보 ]


고질라 : 킹 오브 몬스터 
Godzilla: King of the Monsters

액션ㆍ어드벤처ㆍ판타지ㆍ공포ㆍSF
미국|2019. 5. 29 개봉|132분|12세 이상 관람가
감독 _ 마이클 도허티
주연 _ 밀리 바비 브라운, 베라 파미가, 카일 챈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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