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긴 싸움의 쉼표
[칼럼] 긴 싸움의 쉼표
  • 지민
  • 승인 2019.06.10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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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 학교법인 한동대학교와 피고 OOO은 공동하여 원고에게 500만 원을 지급하라” 

열 달 동안 진행된 소송의 최종 판결이 이뤄진 시간은 채 5분도 되지 않았다. 미처 내용을 파악할 새도 없이 이뤄진 선고에 어리둥절했지만, 결과는 일부 승소였다. 

사건의 시작은 재작년 12월, 페미니즘 강연을 주최했다는 이유와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한동대는 나를 징계했다. 졸업을 1년 앞둔 무기정학 처분이었다. 교수와 목사들은 집단적으로 나에 대한 비방을 시작했다. 내가 맺는 관계와 사생활을 악의적으로 폭로(아웃팅)하고, 나를 “암세포”와 “곰팡이”, “음란한 마귀”로 묘사하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욕했다.

전 교직원과 교수에게 보내는 교수메일을 통해, 수백여 명의 학생을 앞에 둔 강단 위에서, 또 수천여 명의 학생이 볼 수 있는 인터넷 공간에서 수개월에 걸쳐 마녀사냥이 이어졌다. 얼마 안 가 피고들의 메시지는 전국 교회를 중심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각종 SNS와 블로그, 메신저를 통해 내 실명이 포함된 메시지가 돌아다니면서 더 이상 손 쓸 수 없는 지경이 됐다. 학교에 중단을 요청해도, 교육부에 민원을 넣어도, 국가인권위원회가 차별시정 권고를 해도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끝내 작년 8월, 나는 학교법인 한동대학교와 교수 둘, 목사 한 명에 대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5월 16일, 대구지방법원 포항지원 앞. 판결 선고 후 기자회견
△ 지난 5월 16일, 대구지방법원 포항 지원 앞. 판결 선고 직후 기자회견

길고 긴 소송에 마침표가 찍히는 순간이었다. 판결 선고 후 법원을 나서는 길에는 사람이 붐볐다. 한편에선 검은 정장을 입고 고개를 숙인 피고들이, 한편에선 승리의 환호를 외치고 있는 시민단체가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꼭 잡아주거나 부둥켜안으며 승소를 만끽했다. 몇 시간 뒤 언론 보도를 통해 소식이 전해지자 여기저기서 연락이 왔다. 사건이 시작된 후 조심스레 내게 커밍아웃을 하던 학내 성소수자들, 울먹이는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온 한동대 학생들, 계속 한동대 사건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인권단체 활동가들. 모두 고맙다는 말과 동시에 고생했다는 말을 반복했다. 정성스레 오는 연락들을 보며 마음이 뭉클했다. 지기만 하는 싸움을 하는 건 아닐지 자책할 때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함께 해준 사람들이 있어, 오히려 내가 버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재판 이후, 한동대는 교회를 중심으로 500만 원을 모금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동시에 이 재판이 ‘일부 승소’이고 청구한 금액에 비해 인정된 부분도 크지 않으며 피고 둘은 결국 빠져나갔으니 실질은 진 것이 아니냐는 말도 돈다. 정말 그럴까. 무엇보다, 그런 말을 들으면 판결 직후 피고들과 교인들이 지었던 표정을 보여주고 싶다. 그들이 얼마나 심각한 얼굴로 고개와 어깨를 푹 숙이고 있었는지.

보다 구체적으로, 이번 소송에서 주목할 점은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소송이 시작됨과 동시에 한동대와 보수 교계가 ‘말조심’을 하게 되면서 이 사건과 관련한 혐오 표현의 빈도가 확연히 줄었다는 것이다. 근거 없는 비난과 모욕, 왜곡을 더 이상 참지 않겠다는 경고와 제동의 메시지가 정확히 전달된 결과다.

두 번째는 성소수자에 대한 악의적인 아웃팅과 비난은 “사회적 평가를 침해하는 행위”이자 “불법행위”라는 것이 인정됐다는 점이다. 이는 피고 셋 모두에게 해당한다. 차별금지법이 부재한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 문제는 구제받을 길이 마땅치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피고들의 불법 행위를 인정한 이 재판은 의미를 갖는다. 적어도 소수자에 대한 “악의적 편견”은 민주사회에서 허용될 수 없다는 의미를 판결은 담고 있다.

마지막으로 학교법인 한동대학교 역시 성소수자에 대한 악의적인 아웃팅과 비난에 대해 손해배상 책임을 진다는 점이다. 단순히 배상액, 즉 돈의 문제가 아니다. 차별금지법 반대를 외치고, 이 사건을 일생일대의 종교 재판으로 보던 이들에게 돈은 중요치 않다. 종교적 신념이라며 전력을 다해 재판과 이 사건 전반에 임하던 한동대학교의 패소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동성애가 만연해지고, 이에 따라 출산율이 떨어지고 사회가 문란해지며 결국엔 나라가 망한다고 믿고 있는 이들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준 것이다. 지금 이들이 하고 있는 혐오 표현이 바로 차별이라고.

물론 판결에 아쉬운 부분이 없진 않다. 그럼에도, 완벽히 만족스러운 판결은 아닐지언정 결과는 명백하다. 최소한의 기준으로서 이 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안전망을 또 하나 확인했다. 이러한 판례가 차곡차곡 쌓여 입법이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를 사법의 영역이 조금이나마 메울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판결 이후, 대학ㆍ청년성소수자모임연대 QUV에서는 “환영한다”는 성명서를 냈다. QUV는 지금도 전국적으로 일어나는 대학 내 성소수자 탄압에 꾸준히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성명서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있다.

“사람과 사람이 어떤 양태로 관계하던 그것은 그들이 조율해야 할 문제이다. 문제가 발생한다면 당사자적 경험에 경청할 필요가 있으며 그들을 풍경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 자신의 얕은 지식과 소위 ‘음란한’ 선입견으로 악마를 창작해내고 있는 것은 누구인지 돌아볼 때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구체적이고 생생한 몸과 관계에 대한 이해이지, 무지한 선입견에 의한 공포 조장이 아니다. 폴리아모리를 비롯한 다양한 관계맺음을 응원한다. 앞으로 폴리아모리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만으로 명예훼손이 되지 않는 사회이길, 이와 같은 부당한 명예훼손이 반복되지 않는 사회이길 바란다”

 

글 _ 지민
한동대 부당징계 당사자. 비혼생활공동체에서 반려견과 함께 살아가며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여행자>에서 활동합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