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삐딱하게 보기] 흑사병이 종교 권력에 몰고온 파국
[피렌체 삐딱하게 보기] 흑사병이 종교 권력에 몰고온 파국
  • 박기철
  • 승인 2019.06.28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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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시작<2> 종교 권력의 약화

피렌체는 안에서 보는 모습도 아름답지만, 어느 정도 떨어져서 바라보면 색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여행자들이 피렌체 남쪽에 있는 미켈란젤로 언덕에 오른다.

이와는 반대로 북쪽에서 피렌체의 경관을 바라볼 수 있는 곳도 있다. 바로 피에솔레(Fiesole)라는 작은 마을이다. 거리도 꽤 떨어져 있어서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바라보는 것과는 또 다른 감흥을 느낄 수 있다. 버스로 약 20분 정도 가야 하지만 피렌체 시내와는 달리 매우 조용하고 한적하다. 그래서 일정에 크게 쫓기지 않는 여행자들은 일부러 이 동네에 숙소를 정하기도 한다.

기원전 59년, 카이사르(Julius Caesar)는 로마 제국 곳곳에 은퇴한 군인들의 정착지를 마련했다. 20년간 군에서 복무하면 일정 규모의 땅을 빌려주는 일종의 노후 연금제였다. 피렌체도 이를 위해 만들어진 도시 중 하나였다.

로마인들은 피에솔레 언덕에 올라가서 지금의 피렌체가 될 땅을 살펴봤다. 피렌체는 플로렌티아(Florentia)라고 불렸는데, '꽃피는', '번성하는'이라는 뜻이다. 피에솔레 언덕에 올라가서 피렌체를 내려다보면 정말 꽃잎처럼 펼쳐진 모습을 볼 수 있다.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바라본 피렌체 전경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매우 유명하다. 그래서 피렌체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단골 코스이기도 하다.
▲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바라본 피렌체 전경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매우 유명하다. 그래서 피렌체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단골 코스이기도 하다.
ⓒ 박기철

   

 
피에솔레 언던에서 바라본 피렌체   로마인은 이 지형을 꽃잎이 활짝 펼쳐진 모습으로 보았다.
▲ 피에솔레 언던에서 바라본 피렌체  로마인은 이 지형을 꽃잎이 활짝 펼쳐진 모습으로 보았다.
ⓒ 박기철

 

 

<데카메론>의 배경, 피에솔레

이 피에솔레 지역은 예로부터 피렌체에 변고가 닥쳤을 때 중요한 피난처이기도 했다. 특히 흑사병이 돌았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피신했다. 인구밀도가 높아 전염병이 쉽게 퍼지는 피렌체 도심과 꽤 떨어져 있으면서도 말과 수레 등으로 반나절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였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초기 대표적인 작가인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1313-1375)는 <데카메론>(Decameron)이라는 단편 소설집을 남겼다. <데카메론>은 세 명의 남자와 일곱 명의 여자가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서 만나면서 시작한다.

이 열 명의 남녀는 흑사병을 피하기 위해 피렌체 외곽으로 피신하는데 그 장소가 바로 피에솔레이다. 이들은 피에솔레에서 2주 간 머물면서 각자 하루에 하나씩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기로 한다. 일주일 중 하루는 가사일을 위해, 그리고 또 하루는 미사를 위해 제외하고 총 10일 간 100편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런데 현대 소설의 원형으로 꼽히기도 하는 <데카메론>에는 일반인은 물론 정치인과 성직자들의 불륜, 간음 등 온갖 낯뜨거운 이야기들이 가득 실려 있다. 물론 풍자와 해학을 곁들였지만, 아직 중세의 엄격함이 남아 있던 14세기 중반에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쓸 수 있었을까?

 
보카치오의 조각상   단테 전기를 쓰기도 했으며, 인간 본연의 모습을 탐구하는 초기 인문학자였다.
▲ 보카치오의 조각상  단테 전기를 쓰기도 했으며, 인간 본연의 모습을 탐구하는 초기 인문학자였다.
ⓒ 박기철

 


흑사병의 시작

보카치오는 이 작품을 1350년 경에 쓰기 시작해서 1353년에 완성했다. 그리고 작품을 쓰기 2년 전인 1348년은 그 유명한 흑사병이 전 유럽을 휩쓸었던 시기였다.

흑사병(Black Death)이라는 이름은 피부가 검게 변하는 증상 때문에 붙었다. 보카치오는 <데카메론>에서 피렌체에서만 10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썼다. 학자들은 흑사병 때문에 1347년부터 1352년까지 유럽에서만 약 24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정하는데, 유럽 총 인구의 30~60%라고 한다. 이 인구는 17세기가 되어서야 겨우 회복되었다.

흑사병의 전파 경로에는 여러 설이 있다. 몽골 킵차크 칸국의 자니베크 칸은 크림반도를 포위 공격했다. 3년간의 포위 공격 끝에 1347년, 결국 철수하기로 한다. 이때 흑사병으로 죽은 군인들의 시체를 투석기로 성벽 너머에 날려 보냈다. 일종의 생화학 무기인 셈인데, 이것이 유럽 흑사병의 시작이라는 설이 가장 유명하다.

흑사병에 대한 기억은 시대가 흘러도 유럽인들의 의식 속에 깊이 남았다. 1909년, 유명한 심리학자 프로이트와 칼 융이 강연을 위해 배를 타고 뉴욕으로 갔을 때였다. 명성만큼이나 인기가 높던 두 학자를 맞이하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항구에 모여서 환호하고 있었다. 이를 본 프로이트는 융에게 이런 농담을 했다고 한다. "저들은 지금 우리가 흑사병을 가지고 가는 중이라는 걸 알고나 있을까?"
 

죽음은 가까이에 있다

흑사병이 처음 발생했을 때는 이를 '신의 분노'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신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스스로 몸에 채찍질하는 '채찍질 고행단'이 등장한다. 하지만 여러 지역을 떠도는 고행단이 점차 혁명성을 보이고 이들로 인해 흑사병이 더 퍼지게 된다. 결국, 교회는 이들을 탄압하여 사라지게 한다.

흑사병에 대한 공포는 장애인, 나병 환자, 동성애자 등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로 표출되기도 했다. 특히 유대인에 대한 탄압이 가장 컸다. 유대인들이 흑사병을 유행시켰고, 마을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는 유언비어까지 퍼졌다. 유대인 학살이 최고조에 달했던 1348~1349년 사이에 많은 유대인들이 중서부 유럽에서 폴란드 등 동유럽 지역으로 이주하게 된다.

<데카메론>에는 자신이 살기 위해 부모 형제는 물론이고 자식까지도 내다 버리는 사람들이 나온다. 이처럼 흑사병은 윤리관을 비롯해 정치, 경제 등 거의 모든 사회 체계를 흔들어 버린다.

흑사병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당시 가치체계와 다른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 있다는 것이다. 과거 유럽에서 사람은 임종 전 성직자에게 종부성사를 받아야 했다.

침대에 누워 마지막 숨을 헐떡이다 힘겹게 일어나서 무릎을 꿇고 자신의 죄를 마지막으로 고하고 구원을 바라는 의식이다. 신부는 신을 대신해 그의 죄를 사해주고, 천국으로 가거나 연옥에서의 고통이 줄어들기를 기원해준다.

그런데 흑사병은 이런 종부성사를 해 볼 여유도 없이 죽음에 이르게 했다. 심지어 성직자들조차도 제대로 된 종부성사를 못하고 숨을 거두기 일쑤였다.

종교 권력의 약화, 삶을 즐기자

르네상스가 발현하기 위해서는 기존 권력 구조에 균열이 생겨야 했다. 그동안 사회를 통제해 왔던 종교 권력의 핵심은 죽음과 사후 세계였다. 교회는 사후의 구원을 위해 현세의 쾌락을 멀리하고 금욕과 고행을 강요했다. 흑사병은 이 종교 권력에 큰 타격을 입힌다.

속절없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점차 '현재를 즐기자(Carpe Diem)'라는 생각으로 발전한다. 예상도 할 수 없고, 통제도 할 수 없는 죽음에 전전긍긍하지 말고 지금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즐겁게 누리자는 것이다. 데카메론은 이런 변화가 투영된 작품이었다.

흑사병 때문에 인간은 예전처럼 구원을 희망하며 우아하게 죽기도 어려워졌다. 하지만 이제 교회의 협박에서 벗어나 행복한 현재를 즐기다가 맘 편하게 죽을 수 있게 되었다.

그야말로 '죽음의 죽음(la mort de la mort)'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결론적으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교회의 권력은 크게 약해졌다. 이 틈새로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학문인 인문주의(Humanism)가 발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종교 권력에게 흑사병보다 더 큰 위협이 남아 있었다. 바로 에피쿠로스학파의 쾌락주의 철학이었다.

 

< 다음 편에 계속... >
 

성삼위일체(마사초, 1425,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해골이 누워있는 아랫 부분에는 '나의 어제는 그대의 오늘, 나의 오늘은 그대의 내일'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신만이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죽음은 우리 가까이에 있으니 항상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의미이기도 하다.
▲ 성삼위일체(마사초, 1425,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해골이 누워있는 아랫 부분에는 "나의 어제는 그대의 오늘, 나의 오늘은 그대의 내일"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신만이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죽음은 우리 가까이에 있으니 항상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의미이기도 하다.
ⓒ 박기철  

 


[ 참고서적 ]

조반니 보카치오 <데카메론> (장지연 옮김, 서해문집)
​​​​손세관 <피렌체, 시민정신이 세운 르네상스의 성채> (열화당)
리사 맥개리 <이탈리아의 꽃 피렌체> (강혜정 옮김, 중앙북스)
G.F.영 <메디치> (이길상 옮김, 현대지성)
서울대학교 중세르네상스연구소 <중세의 죽음> (산처럼)
에른스트 블로흐 <서양 중세·르네상스 철학 강의> (박설호 옮김, 열린책들)
스티븐 그린블랫 <1417년, 근대의 탄생> (이혜원 옮김, 까치>

 

※ 현재 오마이뉴스에서 연재 중인 '피렌체 삐딱하게 보기'를 뉴스풀에도 함께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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