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_1. 2019년 7월 총선 : “시리자” 4년 반 만에 정권을 잃다

 

7월 7일, 그리스 총선 결과가 발표되면서 2015년부터 만 4년 반을 집권했던 “시리자 SYRIZA”(급진좌파연합)가 패배해 정권을 잃었다. 그리스가 ‘유럽의 환자’로 불리며 구제금융 대상국의 대명사가 되다 보니, 국내 언론에서도 이번 선거 결과는 각자의 정치적 입장에 따른 시선으로 단순 외신을 넘어서는 수준의 보도가 이뤄졌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발칸반도의 거의 모든 나라가 구소련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국가로 자리 잡으면서, 그리스는 해당지역에서 유일한 서방세계 국가가 되었다. 2차 대전 당시에는 공산주의 파르티잔 활동이 활발했으나 종전 직후 진행된 동서 냉전 구도 하에서 미국을 위시한 서방 진영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내전을 치른 후 반공 세력이 집권하게 되었다. 이후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처럼 보수우파와 중도좌파 양대 정당을 축으로 정치 판도가 형성되었다.

냉전 이후 유럽연합으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그리스는 자연스레 궤를 따라갔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치루며 겉으로는 통합된 유럽의 일원으로 보였다. 그러나 2008년 미국 발 세계 금융위기가 확산되자 유럽 국가들의 경기침체는 제조업이나 안정된 내수 기반이 없었던 그리스 경제에 치명타로 돌아왔고, 구제금융 치하에서 10년을 보내는 암흑기로 돌입하게 되었다.

경제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기성정당에 대한 불신은 극좌와 극우의 정치권 진입으로 이어졌다. 비단 그리스만이 아니라 이 시기부터 유럽 각국에 포퓰리즘과 극단주의 흐름의 정치세력화가 공통적으로 진행되고 복지국가의 후퇴와 난민ㆍ이민자 문제가 격하게 드러났다. 그리스는 가장 극명하게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국가였고, 네오나치 급의 극우정당 “황금새벽당”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기성 양대 정당은 경제위기에 대처하지도, 국민들을 설득하지도 못하면서 우왕좌왕 행태만 일삼았다. 그 순간 “시리자”가 등장한다.

 

△ "시리자" 심벌
△ “시리자” 심벌

군소 중도ㆍ좌파 세력들의 동맹으로 2004년 출발해 별다른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던 시리자는 2010년부터 구제금융에 굴복한 기성 정치세력을 비판하면서 신좌파적 주장을 펼쳤다. 냉전적 반공정서와 구좌파적 색채 때문에 대안세력으로 부각되지 못한 그리스 공산당을 뛰어넘었고, 극우정당으로 기울 위험이 높던 젊은 세대와 실업자들을 만났다. 2012년 총선에서 제2당으로 등극했고, 2015년 조기총선을 통해 집권정당이 되었다.

채무탕감과 긴축 반대를 외치며 집권한 시리자의 대표 알렉시스 치프라스는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로 불렸고, 구제금융 그룹에 대항한 국민투표는 긴축 반대 여론이 다수임을 입증해 세계적 화두가 되었다. 시장경제 신봉세력들에게는 위험한 포퓰리즘 선동정치 세력으로, 구심을 잃었던 좌파정치세력에게는 신좌파적 대안세력으로 정반대의 평가를 받던 시리자의 위상이 최고점에 달하던 시기가 바로 이 국민투표 직후였다.

하지만 시리자는 내부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긴축을 상당부분 수용하게 되었고, 급진좌파 세력이 주도해 충실하게 채무 변제와 긴축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리고 8년 여만인 2018년에 구제금융 치하를 벗어났다. 여전히 막대한 채무와 실업율에 시달리지만 국가 부도사태 수준은 넘어선 것이다. 역설적으로 (시장경제 친화세력이 망친 경제를) 진보좌파 세력이 집권해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상당부분 수용하는 경로로 극복한 것이다. 그리고 채 1년도 안되어 이번 선거에서 경제위기 당시 집권세력이던 보수정당이 재집권하기에 이르렀다.


1_2. 2019년 7월 총선 결과

 

그리스는 의원내각제를 취하고 있다. 정당득표에 따른 비례대표제 선거에서 다수당이 되면 여당 내에서 총리를 선출하고, 다수당에게 자동으로 50석의 추가의석을 부여해 정치 안정을 추구한다. 이번 선거에서 그리스 우파 진영을 대표하는 ‘신민당’(신민주주의당 ND)이 39.6% 지지율로 108석을 획득했고, 자동 50석을 추가해 158석으로 단독 과반을 달성했다(그리스도 한국과 의원 정수가 300명으로 동일하다). 신민당은 경제위기의 책임을 져야 하는 세력이지만 작년부터 감세와 민영화를 외치며 지지율이 상승해 이미 선거 전부터 집권이 유력했었다.

5년간 집권했던 시리자는 31.6%로 86석을 차지해 제1야당으로 추락했다. ‘급진좌파연합’에서 ‘급진’좌파세력은 이미 상당수 이탈했기에 과거의 중도좌파 양대 정당의 위상으로 돌아간 셈이다. 시리자 대두 이전 신민당과 양대 축을 이루던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PASOK)은 중도좌파ㆍ사회민주주의 세력들과 연대해 ‘변화를 위한 운동’이란 연합으로 8%, 22석을 획득해 여전히 재기하지 못한 상태이다. 그리스 공산당도 5.4%, 15석으로 군소정당으로 현상유지에 머물고 있다. 보수우파에선 신민당에 비해 좀 더 포퓰리즘 정책을 표방하는 ‘그리스 해법’이 3.8%, 10석으로 의석 확보에 성공했다.

추가로 특기할 것은 두 정당의 명암이다. 시리자와 함께 2010년대 그리스 정치에 돌풍을 일으키던 극우정당 ‘황금새벽당’은 한때 제3당 지지도를 얻었지만 이번 선거에선 3% 이하 득표(2.97% 지지율)로 원내진입에 실패했다. 반면에 시리자 내에서도 IMF 양해각서 등 긴축요구에 강경했던 시리자 집권초기 재무장관 야니스 바루파키스가 시리자 내에서 ‘급진’ 좌파 그룹들과 함께 작년 초에 창당한 “MeRA25”(현실적유럽불복종전선)이 3.45% 지지율(9석)로 원내 진입에 성공했다. 시리자는 중도화 혹은 체제내화되었고 급진세력은 별도의 정치세력화를 미약하나마 달성한 셈이다. 경제위기에 책임져야 할 보수우파 세력이 재집권하면서 오히려 극우정당은 몰락했다. 1997년 IMF 금융위기, “국가부도의 날” 영화로 이제는 기억되는 시기 이후 김대중과 노무현의 ‘민주정부’, 그리고 이명박근혜 권위주의 정부의 흐름과 비교해 흥미롭게 살펴볼 부분이 많다.

 

2. 대구사회복지영화제와 함께 한 4편의 관련영화들

대구사회복지영화제는 영화제와 상영회를 통해 2015년, 2016년, 2017년, 2019년 각 1편씩 구제금융 시기의 그리스 상황을 다룬 영화들을 소개했다. 다큐멘터리 3편과 코미디 드라마 1편이었다. 그중 2편은 각각 영화제 개막작과 폐막작으로 선정될 만큼 영화제가 지역사회에 비중 있게 소개될 정도로 공을 들였다. 국내에선, 특히 지역에선 더욱 관련 영화들의 존재가 희귀하기에 간략하게나마 해당 영화들의 존재를 공유해보겠다.

 

2_1. “선 위의 희망”

 

선 위의 희망 Hope On The Line
2013|다큐멘터리|프랑스, 그리스, 영국, 독일|74분
(감독) 알렉산드르 파파니콜라, 에밀 야누쿠


<선 위의 희망>은 2015년 6회 영화제 직전 상영회로 소개한 작품이다. 2012년 시리자가 제1야당으로 올라서는 선거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로 국내에는 2014년 전주국제영화제 때 유일하게 소개된 바 있었다. 국내에 최초로 소개되면서, 2015년 초반에 시사 잡지나 신문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한 시리자에 대해, 궁금해 하던 사람들이 대거 참석하고 관련 전문가 해설까지 덧붙여 지며 작은 반향을 일으켰던 보람이 기억으로 떠오른다.

영화는 시리자의 2012년 선거 투쟁과 준비과정을 중심으로 시리자가 탄생과 성장의 과정을 다룬다. 절망적인 그리스 당시 사회상황에서 대안세력으로 부각되기 위한 기성 정치세력과의 차별화 전략, 선거과정과 투표결과 이후 정치적 판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들을 전달하는 속보 형식으로 당시와 잘 맞아 떨어진 시의적절한 작품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4편 중 가장 시리자를 중심으로 만들어졌고 시리자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 시리자의 대안세력화에 긍정적인 입장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지금 시점에서 본다면 어떤 이들에겐 회한을, 다른 이들에겐 냉소로 다가갈 수도 있을 법하다.

 

2_2. “아고라: 민주주의에서 시장으로”

 

아고라 : 민주주의에서 시장으로 Agora : From Democracy to the Market
2014|다큐멘터리|그리스, 독일, 카타르|120분
(감독) 요르고스 아브게로포울로스

 
<아고라 : 민주주의에서 시장으로> 역시 2015년 EBS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소개 후 거의 유일하게 대구사회복지영화제에서만 추가로 상영된 작품이다. 이 영화는 2016년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폐막작으로 전년도에 상영됐던 <선 위의 희망>의 반향을 이을 기대작이었다. 2015년 시리자 집권 이후 더욱 극명하게 대립하던 구제금융 세력과의 갈등으로 보다 인지도가 높아진 그리스 상황을 잘 전달해준 작품이다.

이 작품은 경제위기 이후 혼란에 빠진 그리스 사회 현실을 골고루 보여준다. 거리에선 극우 네오나치들이 이민자나 반대파를 공격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이에 대항하는 “안티파” 그룹과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충돌이 벌어진다. 평범한 시민들이 실직하고 노숙자가 되거나 가정이 파괴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경제위기가 한 사회에 어떤 파괴적인 영향을 끼치는지, 그리고 황금새벽당의 득세가 유럽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파시즘의 징후로 드러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영화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이 작품은 지난 10년간의 그리스 상황을 압축해서 보려는 이들에겐 여전히 유용한 자료로 남을 것이다. 영화 말미에 시리자의 집권 소식을 전하는 장면은 역시나 많은 생각이 들게 한다.
 

2_3. “파노스와 요르고스 그리고 당나귀”

 

파노스와 요르고스 그리고 당나귀 Highway to Hellas
2015|드라마ㆍ코미디|독일|89분
2016.10.06 개봉|12세이상관람가
(감독) 아론 레만 (주연) 크리스토프 마리아 허브스트

 
< 파노스와 요르고스 그리고 당나귀>는 4편의 영화 중 유일한 극영화이며 심지어 코미디이다! 2015년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된 후 2016년 극장 개봉을 했지만, 곧바로 VOD와 IPTV로 직행해 거의 대부분이 이 영화의 존재 자체를 몰랐으리라. 지역에서는 2017년 대구사회복지영화제가 이 작품을 사실상 최초로 알린 셈이 되었다.

이 작품은 그리스의 정치 상황을 직접적으로 해설하지 않는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그리스 섬에 파견된 이탈리아군들이 목가적인 에게해에서의 생활에 동화되는 과정을 담았던 <지중해>나 <코렐리의 만돌린>의 21세기 판과 흡사하다. 독일의 은행 직원 파노스가 대출 프로젝트의 이행 상태 확인을 위해 팔라디키라는 가상의 섬 주민들을 감시하다가 빠져들게 되는 과정을 담은 유쾌한 코미디이다. 섬의 낙천적 주민 요르고스와 친구가 된 파노스는 주민들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채권자인 은행은 섬의 해변을 인수할 목적이고, 직접적으로 대립 과정을 드러내진 않지만 억지 승리나 해피엔딩을 강요하지 않는 현실적 결말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아마 가장 진입장벽 없이 소화할 수 있는 영화일 것이다.

 

 
2_4. “개를 위한 민주주의”

 

개를 위한 민주주의 Dogs of Democracy
2016|다큐멘터리|오스트레일리아, 그리스|57분
(감독) 메리 저나지


<개를 위한 민주주의> 또한 작품의 가치나 내용에 비해 덜 알려진 작품이다. 2018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후 2019년 대구사회복지영화제에서만 소개된 작품으로 올해 사회복지영화제 개막작이기도 하다. 민주주의가 꽃피워졌던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 광장의 유기견들, 그 개들과 어울리는 노숙자, 실직자, 시위대들의 기막힌 사연들이 소개된다. 영화는 점점 사람과 동물들에서 “유럽의 떠돌이 개” 취급받는 당대 그리스 현실로 이동한다. 최신작인 만큼 그리스 경제위기는 물론, 전 유럽을 들끓게 하는 쟁점인 난민 문제가 접목된다. 그리스는 지중해를 건너 유럽대륙으로 진입을 꿈꾸는 중동과 아프리카 난민들이 가장 먼저 도착하는 땅이다. 경제위기와 사회불안에 허덕이는 그리스에선 그/그녀들에 대한 태도 또한 자연스럽게 경제위기에 대한 해법과 정치적 입장 판단처럼 극명하게 나뉘게 마련이다.

첨예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타임지에도 소개될 만큼, 그리스 민주주의와 경제위기 상황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 되었던 시위견 루카니코스를 비롯한 광장의 개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어려운 처지에도 이들과 동고동락하는 노숙자들과 동물보호 활동가의 일화들은 정치적 입장을 넘어서는 박애와 윤리적 측면을 이끌어낸다. 그리스를 넘어 현재 유럽이 안고 있는 난민 문제까지 담는 종합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3. 4편의 영화들에 대한 기억 : 그리고 다시 2019년 7월

 

극영화인 <파노스와 요르고스 그리고 당나귀>를 제외한 3편에는 재미난 점이 있다. 그리스 경제위기를 둘러싼 정치ㆍ사회적 상황을 다루는 3편의 다큐는 자연스레 그 상황에서 신생정당으로 성장해 집권세력이 되었던 시리자를 비중 있게 등장시켰다. 시리자의 대표이자 총리였던 알렉시스 치프라스, 초대 재무장관이자 나중에 치프라스 등과 대립해 탈당 후 새 정당을 만들어 이번 선거에서 원내 진출에 성공한 경제학자 야니스가 모두 주요하게 등장한다.

경우가 상당히 다르긴 하지만 IMF 구제금융 아래서 1997년 국가부도를 맞았던 한국의 경우에도 처음으로 그해 연말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가 진행되어 ‘민주정부’를 맞이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와 비정규직 확대ㆍ심화가 뒤를 이었다. 10년간의 민주정부 집권 후 다시 구 집권세력이 복귀한다. 어쩌면 진보ㆍ좌파 세력이 집권했기 때문에 그런 긴축과 구조조정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급진적 변화를 추구하던 이들은 분열되고 혼란스러워 했고, 자신들의 실책 때문에 권좌에서 내려와야 했던 보수우파 세력은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에서 파시즘 부활이 염려되던 시기에 시리자를 중심으로 하는 좌파그룹이 존재했음으로 인하여 극우세력의 전횡을 최소한도로 저지하지 않았는가 하는 평가도 충분히 나올 수 있다. 한국보다 적은 인구와 제조업 기반의 부재함 때문에 채권그룹의 압력에 취약할 수 밖에 없다는 지적도 일리가 없진 않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픈 한 가지. 

21세기 이후 한국의 진보ㆍ좌파 세력은 계속 외국에서 대안 모델을 찾는데 진력한다. 룰라가 집권했던 브라질이나 차베스의 21세기 사회주의를 표방한 베네주엘라, 시리자의 그리스도 예외는 아니다. 한때 마치 구세주처럼 화제가 되던 정당이나 국가들이 시들해지면 금세 관심에서 잊히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동아줄을 찾는다. 마치 메시아주의처럼. 오히려 정말 대안으로 기대하거나 믿었다면 그 실패담 또한 정밀하게 분석하고 토론해야 더 나은 진전을 모색할 수 있다. 4편의 영화들을 기억하거나 발굴하는 것은 그런 씁쓸하지만 꼭 수행해야 할 과제의 일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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