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율아 무더위에 잘 지내고 있어?

장마다. 
하늘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는지 비가 많이 오는구나. 천둥소리에, 양철지붕 때리는 빗소리가 더해져 귀가 먹먹하지만 반가운 비다. 여름 무더위에 고생을 좀 했는데 비가 와서 기온도 내려가고 가뭄 해결도 되니 좋다.

삼촌이 어릴 때 방학을 앞두고 이런 장맛비가 많이 내렸어.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걸어가다 보면 골짜기 중간중간 불어난 빗물로 산길을 가로질러 계곡이 생겼어. 이미 젖은 운동화로 계곡물을 퍼 나르며 물싸움을 했지. 빗물에 가방은 물론 온몸이 폭 젖어 하얀 김이 펄펄 났어.

집 앞에는 자갈돌에 시멘트를 부어 만든 작은 다리가 있었는데, 비가 조금만 와도 금세 물에 잠겼어. 운 좋게 겨우 건너가면 다시 나갈 수가 없었어. 그렇게 다리를 오지도 가지도 못하게 되면 동생과 함께 발가벗고 마당을 뛰어다니기 시작해. 안 그래도 인적이 드문 산속 외딴집인데 다리까지 빗물로 잠겼으니 아무도 오지 못하지. 홀딱 벗은 몸으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흙장난에 물장난에 마지막은 온몸에 비누칠. 

장마의 시작은 방학을 알리는 신호였어.

방학이라 삼촌집에 놀러 온다는 소율이에게 이번에는 무슨 자료를 보여 줄까 고민하다가 최근에 발굴한 대구·경북 관련 친일 자료를 소개할게.

일제강점 말기로 갈수록 일제는 전쟁물자를 마련하기 위해 조선인들의 많은 희생을 요구했어.

대표적으로 김관현이 회장으로 있었던 조선국방비행기헌납회에서 주도한 비행기 헌납이 있었는데, 말 그대로 전쟁물자인 비행기 헌납을 종용하는 행위였어. 그 큰 비행기를 헌납하려면 얼마나 많은 돈이 들었겠니. 그래서 일제는 지역별로 비행기헌납회라는 것을 구성해서 모금을 강요하기 시작해. 

오늘 소개하려는 자료도 이런 대구·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마련된 비행기 두 대를 일제에 헌납하고, 비행기에 이름을 붙이는 행사의 식순 알림표와 초청장이야. 비행기헌납회는 육군 전투기를 ‘애국기’로, 해군 전투기는 ‘보국기’로 불렀어. 이것은 해군 전투기인 보국기의 내용이야.

 

                               △ 대구비행장에서 진행된 비행기헌납명명식 초청장(1937. 11. 5)

사진으로 보이는 첫 번째 자료는 우편 형식으로 된 헌납행사 초청장이야. 소화 12년(1937년) 11월 5일 해군 대신 미내광정(요나이 미쓰마사)가 보냈는데, 그는 이후 1940년에 일제의 내각 총리까지 지낸 인물이지.

 

                             △ 대구비행장에서 진행된 비행기헌납명명식 식순알림표 (1937. 11. 13)

그리고 그 아래 두 번째 사진은 식순 알림표인데 1937년 11월 13일 토요일, 지금의 대구국제공항과 K2비행장 자리인 대구비행장에서 진행한 보국기 제137호(제1경북호) 제138호(제2경북호)의 비행기 명명식 차례와 식순 등이 적혀 있어.

그리고 당시 관련 기사를 찾아봤는데 마침 자료가 있어 아래 사진을 보며 한번 읽어줄게.

 

△ 당시 비행기헌납행사를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예천] 경북도민의 열성으로 비행기 2대를 헌납하게 되어 13일 대구에서 그의 명명식을 거행함도 기보한바어니와 군부에서는 감사의 뜻을 표하기의하야 명명식을 거행하기전 두 비행기는 경북 요지를 거쳐 13일 오전 10시 20분 예천 상공에 나타나 아주 저공비행으로 수회를 돌면서 삐라를 뿔이고 유유히 도라갓는데 시민은 총출동하야 열광적 대환영을 하엿다고 한다” (1937년 11월 16일 동아일보)

 

이렇게 지역적으로도 이런 전쟁물자 헌납이 있었지만, 개인별로도 이런 헌납이 있었어. 대표적인 사람이 대구·경북의 유명한 친일파인 일명 “야만기”라 불렸던 문명기야.

얼마나 대단한 친일파냐면 해군에서 마련한 보국기(당시 가격 10만 원)의 헌납 조선인 1호가 문명기였으니, 그 친일행각이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았다 할 수 있지. ‘1930년대 후반 교사 평균 월급이 60원’, ‘쌀 한 가마가 20원’이라는데 10만 원은 어마어마한 금액이지.

 

                       △ 조선국방비행기헌납회 회장 김관현의 감사장(1935. 4. 1)

이런 친일파 문명기가 해방 후 호의호식하다 해산된 반민특위에서 보석으로 풀려났어. 90세까지 천수를 다 누린 건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자손들은 대대손손 국회의원을 하고 의사를 하고 떵떵거리고 살고 있으니 이 얼마나 기가 막히는 일이냐. 

독립운동을 했던 애국지사들의 많은 후손분들이 아직도 영세민을 벗어나지 못해 힘들게 살고 있어. 일본은 과거를 반성하기는커녕, 최근에는 독도 영유권 주장도 모자라 한국 대법원이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것을 두고 수출 규제 등의 경제보복을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이냐.

하루빨리 역사를 바로 세우고, 새로운 한반도 평화 시대가 와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노력해보자꾸나.

더운 여름 물 많이 마시고 건강하게 지내.
또 연락할게.

 

 


글 _ 강철민 대구경북근현대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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