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아르테미시아

 

“그녀들은 재산으로 간주되던 물품이나 항목이었다. 다시 말해 보호받고 또 일정 정도의 보살핌을 받을 가치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녀들은 다른 무엇보다 유용성, 편의성, 가용성에 의해 가치가 매겨졌던 대상이었다. 그녀들의 성은 보호되고 따라서 사용될 수 있는 어떤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의 사용 기간과 조건은 소녀들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니콜라스 터프스트라 지음, 르네상스 뒷골목을 가다, 임병철 옮김, 글항아리, 325쪽)

 

피렌체 여행 시 꼭 들러야 할 곳 중 하나로 꼽히는 곳이 우피치 미술관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관으로 수많은 명작들이 즐비한 곳이다. 그래서 항상 사람들이 붐빈다.

이 우피치 미술관 2층 마지막 방에는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와 그에게 영향을 받은 화가들의 작품들이 모여 있다. 그는 빛을 아주 잘 사용했는데 극단적인 명암으로 미술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바쿠스   카라바조, 1595, 우피치 미술관
▲ 바쿠스  카라바조, 1595, 우피치 미술관
ⓒ 박기철  


카라바조에게는 ‘오라치오 젠틸레스키(Orazio Gentileschi, 1563-1639)’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 역시 화가였는데, 카라바조에게 영향을 받아 그의 화풍을 계승한다. 오라치오는 피사에서 태어나 피렌체와 로마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이탈리아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한 명이라고 하는데, 2016년 1월 그의 작품 ‘다나에(Danae)’가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약 370억 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오라치오에게는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1653)라는 딸이 있었다. 아르테미시아는 아버지를 닮아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당시 여성이 미술을 공부하는 것은 금기시되었다. 미술학교에 입학하고자 했으나, 여자라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하지만 오라치오는 여성도 화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딸에게 직접 그림을 가르쳤다. 그녀 역시 아버지의 친구인 카라바조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여자는 독립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도 없었고, 남자 모델도 쓸 수 없었던 시기였다. 아르테미시아는 이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23세에 피렌체 미술가 길드 겸 대학(Academia di Arte del Disegni)에 여성 최초로 가입했다. 그리고 토스카나 지방을 다스리던 메디치 가문의 대공 코시모 2세(Cosimo II de' Medici, 1590-1621)의 후원을 받았고, 실력을 인정받아 이름을 날리게 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역경과 편견을 이기고 성공한 여성 화가의 모습이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그녀의 삶은 매우 처참했다.

처참했던 그녀의 삶

아르테미시아는 예술적 재능뿐 아니라 아름다운 미모로도 유명했다. 이에 아버지 오라치오는 아르테미시아를 누드모델로 세워 그림을 그렸다. 아버지가 딸의 누드를 그렸다는 점이 사람들의 묘한 상상력을 자극했고, 이는 훌륭한(?) 영업전략이 되었다. 여성의 성과 정조도 재산으로 간주되던 때였다.

그녀가 열일곱 살 무렵, 오라치오는 동료 화가인 아고스티노 타시(Agostino Tassi, 1578-1644)와 로마에 있는 팔라초 팔라비치니(Palazzo Pallavicini) 내부의 프레스코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오라치오는 딸이 타시에게서 그림을 배우도록 했다. 하지만 타시는 동료의 딸이면서 문하생인 아르테미시아를 상습적으로 겁탈한다.

당시 소녀 견습공이 상급자에게 성적 폭행을 당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특히 갈 곳 없는 고아 소녀들은 그런 위험에 더 쉽게 노출되었다. 애초에 그럴 목적을 숨기고 채용하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덜했을 뿐, 부모가 있더라도 안전이 보장되지는 못했다.

그 당시 강간당한 여성은 가문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오히려 쫓겨나기도 했다. 성범죄를 저지른 남자는 법의 심판을 받아야 했지만, 피해자와 결혼하게 되면 벌을 받지 않았다. 피해자의 가족 역시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여자에게 결혼을 강요하기도 했다.

자신의 행위가 발각된 타시는 급한 마음에 오라치오에게 그의 딸과의 결혼을 약속한다. 하지만, 타시는 이미 유부남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타시는 결혼을 거부했고, 결국 오라치오는 타시를 로마 법정에 고발한다. 1612년 3월 16일, 타시는 성폭행이 아니라 ‘처녀성 강탈’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된다. 다시 말해 아르테미시아가 ‘처녀’가 아니라면 타시는 무죄가 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아르테미시아는 타시가 첫 남자였다는 것, 즉 강간을 당하기 전에 자신이 처녀였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수치스러운 부인과 검사를 여러번 받아야 했다.

피해자였지만 조사를 받을 때는 그녀에게 차꼬(stocks, shakles)를 채웠다. 차꼬란 '착고(着庫)'라고도 하는데, 죄수의 손이나 발을 구속하는 족쇄를 이르는 말이다. 조사관은 그녀가 증언할 때마다 묶어 놓고 거짓말하는 거 아니냐며 모질게 추궁했다. ‘손톱 비틀기’라는 고문도 당했다고 한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계속 같은 증언을 한다면 사실로 믿을 수 있다는 당시의 조사방법이었다.

타시는 줄기차게 자신의 범행을 부인했다. 그리고 타시에게 매수된 옆집 여인은 아르테미시아가 먼저 유혹했다고 증언한다. 거기다 아르테미시아가 타시에게 반지를 줬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재판은 아르테미시아가 의도적으로 타시를 유혹했다는 쪽으로 흘러갔다. 모든 것이 아르테미시아에게 불리했다.

그러던 중 반전이 일어났다. 타시가 아르테미시아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위협했다는 증언이 나온 것이다. 거기다 타시가 처제와 불륜을 저질렀으며 아내 살해 계획을 세웠다는 것과 오라치오의 작품을 훔치려 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타시는 이미 과거에 범죄 때문에 노예선을 젓는 ‘노예의 형벌’을 받은 바 있다. 이때의 경험 덕분인지 타시는 배와 바다를 그리는 데 매우 능통했다.

이런 드라마 같은 사건은 로마 대중의 흥미를 끌었다. 그리고 근거 없는 소문이 확대 재생산되어 퍼졌다. 대중들은 아르테미시아의 미모를 보고 그녀의 행실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 단정 지어 버리기도 했다. 과거 그녀의 아버지가 그린 누드화도 화제가 되었다. 이미 사건의 본질은 사라지고 자극적인 내용만 남았다.

재판은 반년 이상 걸렸고, 1612년 11월 27일 선고가 내려졌다. 타시는 5년 형 이상을 받아야 했지만, 여러 방면으로 손을 썼던 것 같다. 토스카나의 위대한 대공(Grand Duke) 코시모 2세 메디치가 중재에 나섰다. 

그 덕분인지 타시는 단 1년 형을 선고받는다. 형기가 짧아진 데에는 아르테미시아의 행실 역시 일부 잘못이 있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하지만 타시는 이 형기마저도 다 채우지 않고 반년 만에 풀려난다. 아르테미시아의 아버지 오라치오가 돈을 받고 타시의 석방에 합의해 버렸기 때문이다.

오라치오는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아르테미시아를 피렌체에서 활동하던 삼류화가 ‘피에란토니오 스티아테시(Pierantonio Stiattesi)’와 서둘러 결혼시킨다. 그녀는 젠틸레스키라는 성을 로미(Lomi)로 바꾸고 피렌체로 이주했다. 하지만 곧 본명이 밝혀지고 잊고 싶은 과거가 드러났다. 로마와 마찬가지로 아르테미시아의 상처는 주변 사람들에게는 흥미있는 가십거리였다.

남편과의 결혼생활 역시 순탄하지 못했다. 남편 스티아테시는 낭비벽이 심하고 빚에 허덕이던 중이었고, 아르테미시아의 결혼 지참금 때문에 결혼했다. 무능한 남편은 아르테미시아의 실력에 열등감과 질투심까지 느꼈다. 결국, 자학과 학대가 반복되었고 어느 날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아르테미시아는 아들 넷과 딸 하나를 혼자서 키워야 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컸지만, 세월이 지나고 1621년 로마로 돌아와 아버지와 재회한다. 그 와중에 네 명의 아들을 모두 병으로 잃고, 딸 프루덴지아만 살아남아 1624년 로마에서의 인구조사에 등록되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아르테미시아는 예술적 재능이 있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안 되는 것이 너무 많았다. 여성이 이렇게 뛰어난 재능을 가질 리가 없다며 마녀나 괴물이라는 얘기를 들어야 했다. 또, 외모 때문에 매춘부나 꽃뱀 취급을 받기도 했다.

이런 일들은 그녀의 마음속에 큰 트라우마로 남아 작품에 표현된다. 그녀의 작품 중 대표적인 것이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딧(Judith Slaying Holofernes)’이다. 이 그림은 아르테미시아가 타시와의 재판 이후 피렌체에 와서 그렸던 작품이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딧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1614-1620, 우피치 미술관
▲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딧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1614-1620, 우피치 미술관
ⓒ 박기철  


유딧은 이스라엘을 침략한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하여 목을 베고 나라를 구한 인물로 여러 작가들이 즐겨 표현하는 주제 중 하나였다. 여러 다른 작품에서 유딧은 칼을 들고 망설이거나 두려워하는 수동적인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아르테미시아의 유딧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 그리고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아 극단적인 명암 대비로 처절함을 더하고 있다. 

선혈이 줄줄 흘러내리는 모습은 섬뜩할 정도다. 아르테미시아는 홀로페르네스에는 타시의 얼굴을, 그리고 유딧에는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고 한다.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분노를 짐작할 만하다. 아르테미시아는 같은 주제의 그림을 57점이나 그렸다. 가해자와 다른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건을 잊었겠지만, 아르테미시아는 평생을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다.

1615년 3월 15일 코시모 2세는 아르테미시아의 화실을 방문해 이 그림을 보고 아버지보다 솜씨가 좋다며 칭찬한다. 코시모 2세가 타시의 재판에 개입한 것을 아르테미시아가 알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버지는 자신의 누드를 그려 돈을 벌었고, 스승은 자신을 강간했다. 피해자였지만 스스로 피해를 증명하기 위해 온갖 고통을 당해야 했다. 주변인들은 거짓 증언을 했고, 대중들에게 자신은 꽃뱀이나 매춘부였다. 

권력자는 자못 점잖은 척 중재를 섰지만, 가해자의 편에 섰다. 아버지는 돈을 받고 가해자의 석방에 합의했고, 집안의 명예를 위해 팔려 가듯이 결혼을 해야 했다. 아르테미시아가 겪어야 할 고통이 어떨지는 상상도 하기 어렵다.

니콜라스 터프스트라 교수는 당시 성과 관련된 여러 추문이 나올 때마다 이를 덮기 위해 사회적으로 세 가지 침묵이 매우 정교하고 유기적으로 작동했다고 본다.

공모의 침묵(silence of conspiracy), 가정의 침묵(silence of assumption), 무관심의 침묵(silence of indifference)이 그것이다.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단속하면서 그럴 수도 있다고 두둔하고(공모의 침묵), 외모와 옷차림을 거론하며 뭔가 있을 거라고 단정 짓고(가정의 침묵), 내 일이 아니라며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연대하지 않는 것은(무관심의 침묵), 추악함을 가리기 위해 인류가 오래전부터 면면히 계승해 온 또다른 유산인 듯하다.

 

 


※ 오마이뉴스에 연재한 내용을 일부 수정하여 재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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