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_ 이상일 감독 略史

 

일본의 대중문화계에는 적지 않은 재일교포들이 활동하고 있다. 특히 일본 내에서 한국식 이름으로 활동하며 고유의 입지를 굳힌 이들로는, 일본영화감독협회장 최양일 감독(대표작 “피와 뼈”)과, 이 글에서 소개하려는 이상일 감독이있다. 이외에도 독립영화나 저예산 예술영화 쪽에서 활약하는 무수한 감독들이 있지만, 주류 상업영화계에서 티켓파워를 인정받은 이들로는 독보적인 위상을 가진다.

이상일 감독은 1999년부터 영화작업을 시작했다. 대중적인 흥행작으로 2004년, 1968년 전공투 시절의 사회적 분위기를 가미한 캠퍼스 청춘물 <69>가 있다. 2006년에는 아오이 유우가 주연한 쇠락한 탄광촌의 훌라댄스 이야기, <훌라걸스>를 완성했다. 

초창기에는 사회적 소재나 배경을 코미디 드라마로 녹여내는 균형을 중시했다면, 2010년대부터는 좀 더 강렬한 사회적 쟁점을 던지는 일련의 대작 상업영화를 꾸준히 만드는 중이다.

앞서 언급한 최양일 감독과는 한 세대 이상 차이가 나다 보니, 일본 이름 대신 한국식 이름을 고수하며 활동하는 공통점 외에는 굳이 교포 정체성을 영화 외적으로 드러내진 않지만, 일본 사회 내 소수자의 시선으로 선이 굵으면서도 예리하게 연출하는 작품세계는 지금도 이상일 감독의 신작을 기대하게 만들고 있다.


2_ 홋카이도 웨스턴으로 본 제국주의 일본의 출발: “용서받지 못한 자”(2013)

속칭 ‘서부영화’, 웨스턴은 미국의 서부개척(정복)시대를 배경으로 카우보이, 보안관, 아메리카 인디언, 무법자들이 어우러지는 활극을 기본으로 한다. 

큰 인기를 얻으면서 다양한 변주가 이뤄지게 되는데 그 과정도 흥미롭다. 미국영화계의 인건비 상승으로 외주위탁을 유럽에 주면서, 속칭 ‘마카로니 웨스턴’, ‘스파게티 웨스턴’으로 불리는 이탈리아 영화인들의 장르가 탄생했다. 

<황야의 무법자>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등의 대작으로 잘 알려진 셀지오 레오네 감독을 필두로 “장고” 시리즈 등 우리에게 익숙한 많은 서부극이 실제로는 이탈리아에서 촬영되거나 서부영화 전통과는 무관한 유럽 영화인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당시 서유럽에서 좌파 정치 활동이 강력했던 이탈리아인지라 이후 ‘수정주의’ 웨스턴이라 불리게 된, ‘기존 백인은 선, 아메리카 인디언은 악’이라는 등식을 해체하는 다양한 시도가 이뤄졌다. 

미국 할리우드 영화는 초강대국 위상과 함께 세계에 진출했고, 각국의 사회와 역사를 배경으로 본격적인 변주가 진행되었다. 심지어 일제 치하 만주를 배경으로 제국주의 열강과 마적, 독립군이 어우러지는 “만주 웨스턴”이 탄생할 정도였다.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통해 1970년대에 전성기를 누렸던 만주 웨스턴의 잔향을 느낄 수 있다.

만주 웨스턴과 유사하게는 ‘홋카이도 웨스턴’을 들 수 있다. 좋든 싫든 필연적으로 일본의 영향을 받은 특성 덕분에 홋카이도 웨스턴이 선후 관계에선 우선이리라. 홋카이도 웨스턴은 서부영화에 등장하는 ‘카우보이와 보안관 vs 아메리카 인디언과 무법자’ 도식을 무사의 후예들과 악당들, 홋카이도 선주민 아이누 종족들의 활극이 난무하는 식으로 설정했다. 홋카이도의 광활한 설원과 야생의 자연은 미국의 황량한 서부 초원이나 사막과 유사하면서도 특색 있는 풍광으로 기묘한 매력을 끌어낸다.

이제 다시 이상일 감독의 작품으로 돌아가 보자.
 

 

 

미국의 명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장대한 출연작 중에서도 <황야의 무법자> 같은 작품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서부극에 남다른 애정을 가진 이스트우드는 나이가 들면서 거장 감독으로도 자리매김하는데, 그 본격적 출발을 알린 작품이 ‘수정주의 웨스턴’의 대표작이라 할 <용서받지 못한 자Unforgiven>(1992)이다(※ 위의 사진 왼쪽). 

이 영화는 과거의 명성(악명)을 뒤로 한 채, 돼지를 키우는 농부로 살아가는 왕년의 총잡이가 현상금을 벌기 위해 선악이 모호한 쟁투에 뛰어드는 과정을 다룬다. 명확하고 도식적인 주인공과 악당 구도는 존재하지 않고, 냉정한 세상은 갱생 같은 희망적인 내용과는 거리가 멀다. 전형적인 웨스턴에서 그저 캐릭터로 소비되던 주변부 등장인물들이 깊이 있게 다뤄지고, 각자의 사연은 애매해진 대립 구도를 보완하는 풍성함과 이채로움을 제공한다.

이상일 감독은 동명의 영화로 서부 웨스턴의 전형성이 아닌, 수정주의 웨스턴의 대표작이라 할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이 영화를 홋카이도 웨스턴으로 변주하는 작업에 나선다(※ 사진 오른쪽). 

일본 사회에서 소수자일 수밖에 없는 재일교포 3세 감독은 첫째, 배경을 미국 서부에서 개척시대 홋카이도로 가져왔다. 둘째, 주인공과 주요 대립 인물들은 카우보이·보안관·온갖 악당들은 정치적 입장이 다양한 쇠락한 무사와 무장경찰, 낭인들로 바뀌었다. 마지막으로 아메리카 인디언은 선주민 아이누족으로 변주한다. 배경은 그렇게 ‘현지화’되었지만, 원작의 기본 설정과 구도는 그대로 가져온다.

눈 덮인 황량한 설원으로 쫓겨난 무사들은 과거의 정치적 입장과는 별개로 추방자의 정서를 공유한다. 서로를 깊게 이해하는 동류이면서도 숙명적 대결로 생사를 주고받는 메이지 유신 전후의 유신지사와 막부무사들은, ‘낙오 무사’라는 동병상련과 동족 혐오의 반복되는 교차 속에서 스러진다. 

 

△ “용서받지 못한 자”(2013) 스틸 이미지

폭력에 노출되고 착취당하지만 거친 자연환경만큼 강인한 여성과 소수민족은, 그저 배경이 아니라 중요한 조연들로 활약한다. 영웅적인 등장과 퇴장은 없다. 대신에 남루한 행색과 비굴한 음모, 초라한 퇴장이 거듭되며 기득권에 편입된 이들은 끄떡없이 건재하다. ‘을’과 ‘을’이 벌이는 암투는 별 실속도 없다. 

일본 근현대사의 결정적 순간에서 낙오된 이들, 근 미래에 일본 제국주의 확장과 함께 도태되거나 흡수당할 자들이 주인공답지 않은 주인공들로 활약하는 홋카이도 ‘수정주의’ 웨스턴이다. 

또한, 와타나베 켄, 사토 코이치, 에모토 아키라 등 기라성 같은 대배우들의 열연으로 원작에 뒤지지 않는 압도적 인상을 제공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대표작 <아무도 모른다>(2004)에서 잊지 못할 인상을 남긴 ‘야기라 유야’는 아이누 혼혈 현상금 사냥꾼으로 출연한다. 마무리 결말에서 표표히 도피하는 와타나베 켄의 어린아이들을 맡게 되는 ‘양자’역이다.

재일교포 3세라는 정체성을 강조하진 않지만, 그런 사회적 입지와 배경이 없다면 연출하기 어려운 대작을 이상일 감독은 완성했다. 그는 재기발랄한 사회파 코미디 드라마를 만들던 소장파 감독에서, 전작인 <악인>(2010)부터 시작된 새로운 작품 경향인 대작 사회물을 감당해내는 중견 감독으로 위상을 확고히 한다.

 

3_ 스릴러와 사회물의 결합으로 일본사회의 그늘을 폭발시키다 : “분노”

이상일 감독의 작가적 욕망은 차기작 <분노>(2016)에서 현대 일본을 담아낸다. 

특별히 원한 살 일 없어 보이는 평범한 부부가 살해되고 현장에는 피해자의 피로 ‘분노’라는 글자가 벽에 휘갈겨져 있다. 사건은 미궁으로 빠지고 영화는 3명의 용의자와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병렬 진행되다 교차하는 등 정교한 연출력을 뽐낸다. 

영화 <분노>에는 메이지유신 이후 잘못 끼워진 단추처럼 거대한 ‘갈라파고스’가 된 현대 일본 사회 이면에 둥지를 튼 불신과 출구 없는 분노가 끓어오르는 가마솥처럼 흘러넘친다. 보는 이에게 강렬한 긴장감과 함께 다 보고 나면 닥치는 극도의 피로감을 동시에 선사하는 문제작이다.

 

<분노>의 세 에피소드는 1) 가족에 대한 사랑과 집착으로 딸의 연인을 의심하는 평범한 아버지의 이야기, 2)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믿으며 동성 연인의 과거와 현재 행적을 불신하는 여피족 청년의 이야기, 3) 미군 기지가 점령하다시피 한 오키나와에 전학 온 소녀와 그녀를 짝사랑하는 소년, 그리고 정체불명 이방인 청년의 기이한 관계를 다룬다.

부모와 자식 간의 단절, 연인 간의 의심, 과도하게 직접적으로까지 그려지는 오키나와 문제와 이를 표현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 이 모든 에피소드의 시작과 끝맺음이 되는 살인사건의 우발적 폭력성까지…. 영화 전체가 느릿느릿하게 전개된다. 서서히 저며 드는 의심암귀(疑心暗鬼, ‘의심하는 마음이 생기면 대수롭지 않은 일까지 두려워 불안해함’)와, 가끔 등장할 때마다 눈을 가리고 싶게 치닫는 직접적인 날것의 폭력으로 그득하다. 그저 예쁘고 조용한 나라로 보이지만, 내면에는 근대 이후 군국주의와 세계대전, 고도성장과 장기불황으로 이어지는 일본 사회의 보기 흉한 상처가 개복 수술하듯 드러난다.

시간 보내기로 영화를 즐기는 이들에게 <분노>는, 화려하지만 먹기엔 불편한 일품요리일 것이다. 전작에 이어 주연으로 출연하는 일본의 국민배우 와타나베 켄, 감독의 전작이자 최근 경향의 출발점인 <악인>에 이어 재회한 톱스타 츠마부키 사토시, 인기와 연기력을 모두 인정받은 미야자키 아오이와 아야노 고, 마츠모토 켄이치, ‘대세’ 배우가 된 히로세 스즈까지 휘황스런 수준의 라인업을 자랑한다. 우정 출연이지만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이케와키 치즈루, 드라마와 영화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인 타카하타 미즈키까지 허투루 배역이 없다. 이런 진용으로 사회적 잔혹극을 마음대로 펼치는 감독의 연출력은 궤도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음을 선언하는 듯 보인다.

 

4_ 재일교포 감독이 영화로 펼치는 ‘경계인의 사색’

 

이상일 감독
△ 이상일 감독

이상일 감독의 신작은 등장할 때마다 국내에서 개봉하거나 최소한 영화제에서 소개되고 있다. 중견 감독이 되고 일정 부분 입지를 확보한 가운데 사회적 발언을 드러내는 감독의 작업은 부정할 수 없이 감독이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던 조건, 경계인이라는 자각과 직접 겪었을 일본 사회 내의 모순이 자양분이 되어왔을 것이다. 감독은 이후 몇 편의 작품을 추가했지만, 대작은 선보이지 않는 중이다. 숨 고르기를 마친 뒤 새로 선보일 신작을 이 독특한 정체성을 가진 감독의 전작들을 돌아보며 기다리면 족할 것이다.

 

 


작품 소개

 

 

 

 

 

69 식스티 나인, 69 Sixty Nine

2004|코미디ㆍ드라마|일본|2005.03.24 개봉|113분|15세이상관람가

감독 이상일

주연 츠마부키 사토시, 안도 마사노부

 

 

훌라 걸스, Hula Girls, フラガール

2006|드라마|일본|2007.03.01 개봉|110분|전체관람가

감독 이상일

주연 아오이 유우, 마츠유키 야스코, 토요카와 에츠시

 

용서받지 못한 자, Unforgiven, 許されざる者

2013|드라마|일본|135분|15세이상관람가

감독 이상일

주연 와타나베 켄, 사토 코이치, 에모토 아키라

70회 베니스국제영화제(2013) 초청

38회 토론토국제영화제(2013) 초청

18회 부산국제영화제(2013) 초청

37회 일본아카데미상(2014) 조명상/촬영상

 

분노, Rage, 怒り

2016|드라마ㆍ스릴러|일본|141분|2017.03.30 개봉|청소년관람불가

감독 이상일

주연 와타나베 켄, 모리야마 미라이, 마츠야마 켄이치, 아야노 고, 히로세 스즈, 미야자키 아오이, 츠마부키 사토시

41회 토론토국제영화제(2016) 초청

64회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2016) 공식경쟁

21회 부산국제영화제(2016) 초청

29회 도쿄국제영화제(2016) 초청

40회 일본아카데미상(2017) 신인배우상, 남우조연상

71회 에든버러국제영화제(2017) 국제장편경쟁

 

 


글 _ 김상목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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