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배치반대김천촛불 800회 기념 공동체 상영회에서
영화 “김복동”을 보고

 

 “무엇을 어떻게 이 글을 써야만 그대들 가슴에 감동으로 비집고 들어가 나도 김복동이었음을 알아챌까요?”

 

영화는 잔잔한 물 흐름처럼 김복동 할머님의 삶이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할머니의 나이 겨우 14살 일본군 성 노예로 끌려갔던 그 시각부터 아흔넷 죽음에 이르는 그 시각까지 할머니의 삶이, 인생이 바다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나의 의도나 선택에 상관없이 파도처럼 끊임없는 고통이 밀려들어 오는 삶, 바닷가 모래알이 거센 바람에 의해 뺨을 때리는 아픈 기억의 순간순간들을 할머니의 증언과 영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 아픔과 고통, 좌절을 딛고 희망을 위한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고스란히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잔혹했던 일본의 만행을 한 장면도 보여주지 않았지만, ‘일본군 성 노예 피해자’로 낙인 되어 살아온 할머니의 인생이 스크린을 통해 녹아내리고 있었습니다.

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는, 가슴에 박힌 역사. 일제강점기 그 시절 나도 그 꽃다운 나이 열네 살, 열여섯 살이었다면 일본군 성 노예로 끌려갔을지 모릅니다.

 

“나에게 가장 잘해 주었던 김복동 언니가 생각이 안 나, 잊어버리는 약을 먹었나……”

 

마지막 길원옥 할머니의 말씀은 강렬하면서도 냉정하게 긴 여운을 주었습니다.

그 역사는 이제 우리의 몫으로 남아, 우리와 우리의 후대들이 기억하여 다시는 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무엇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 메시지를 던집니다. 할머니는 삶을 통해 그것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 ’김복동 할머니 어록 포스터‘. 출처 엣나인필름.

할머니는 쓰리다 못해 꽉 막혀 터질 것만 같은 그 서글프고도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희망을 잡고 살자, 나는 희망을 잡고 살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좌절이나 고통을 넘어 자신을 일으키는 것에 힘이 되고자 했습니다. 

일본 정부의 공식적 사죄와 반성, 법적인 배상을 요구하고, 역사 교과서에 기록하여 후대가 기억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아흔넷 평안의 세상으로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행동으로 끊임없이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게 피해자 자신을 이겨내고, 스스로 한 껍질 한 껍질 벗겨내며 희망이 되고자 하셨습니다. 

할머니의 작은 움직임이 다른 피해자 할머님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그 작은 움직임은 아시아 여러 나라의 성 노예 피해자 여성들에게도 희망이 되었습니다. 그 작은 움직임은 한 마리 노란 나비의 날갯짓으로 태평양을 건넜고 대서양을 건너 전 세계의 수많은 나라로 날아가 몸소 증거이자 증언을 보여주셨습니다.

할머니는 주위의 아픈 사람을 보듬었고, 특히 젊은 학생들을 좋아하셨습니다. 일본 조선학교 학생들에 대한 애정은 할머니의 말씀처럼 만점이셨습니다. 

일상 속 주변의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고맙다”라고 인사를 잊지 않았고, 언제나 자신을 잘 돌보고자 하셨습니다. 할머니는 강직하면서도 부드러운 분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기억은 더 또렷해져 가는데 역사의 저편으로 기억이 무뎌질까, ‘내가 뭔가 해야겠다, 끝까지 싸워보리라’ 다짐하며 암 수술을 하시고도 길 위에 있으셨습니다.

천만 배 용기 내어 아시아 연대회의에서 증언하면서부터 사람들과의 교감 그리고 연대로의 삶이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자 마음먹었던 그 순간부터 인권운동가이고 평화운동가였습니다. 

 

△ 영화 <김복동> 송원근 감독과의 대화. 김상패 감독 진행.
△영화관을 꽉 메운 시민들.

할머니는 일본 정부에 단호하게 대응하며, 반성과 사죄를 받고자 했습니다.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끝까지 싸우다 갈 거야”라는 말씀의 실천을 이 영화는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송원근 감독은 “일본 아베 정권의 도발과 본질을 꿰뚫어 보는, 현실 문제를 제대로 마주할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김복동 할머니의 희망은 그때 비로소 이루어질 거라는 송 감독의 말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아픈 마음과 함께 내내 눈물이 뒤섞인 영화였지만 행복한 영화였습니다.

아직 이 영화를 보시지 못한 분이 있다면 자녀들과 함께 보기를 매우 바랍니다.

 

 

※ 영화 〈김복동〉은 사드배치반대김천촛불 800회를 기념하여, 김천의 4개 단체(‘사드배치반대김천시민대책위원회, 김천교육너머, YMCA, 수다쟁이김천맘카페’)가 공동으로 주최하여 상영하게 되었습니다. 소성리에 살며 활동하는 ‘미디어로 행동하라’ 김상패 감독님이 애써 주셔서, 영화 김복동을 만든 송원근 감독과의 대화도 마련되었습니다. 97석 규모의 영화관에 100명이 넘는, 사드 배치 반대 김천·소성리 주민들을 비롯하여 김천시민들이 자리를 꽉 채워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 연대회의

( Asian Solidarity Conference for the Issue of 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 )

아시아 연대회의는 한국·대만·필리핀·북한·중국·인도네시아·동티모르 등지의 피해자, 피해국 및 일본 등의 지원 단체와 지지 단체, 개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대회의가 결성되어 안정적으로 출발하는 데는 정대협과 각국 지원 단체 간의 합의, 1991년부터 1993년까지 남북한과 일본의 여성들이 구성하여 4회에 걸쳐 지속되었던 ‘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의 경험이 큰 역할을 하였다.

연대회의 결성 의도는 1992년 8월 10일 정대협이 발표한 취지문과 8월 11일의 결의문에서 잘 드러난다. 결의문의 핵심 내용은 첫째, 일본 정부에 대한 요구로서 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상 규명과 배상, 일본 역사 교과서의 시정 등이다. 둘째, 유엔을 위시한 세계 인권기구에 대해 문제 해결을 위한 협력을 요청하였다. 셋째, 아시아 여성의 인권 신장과 세계 평화를 위한 노력 등을 제시하고, 이를 위해 각국이 실태조사와 아시아 연대 확장에 노력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았다.

아시아 연대회의에서는 1차 대회 때부터 매번 회의 끝나는 날, 결의문을 통해 매 시기의 과제를 합의하고 제시해 왔다.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 국제 법정’도 아시아 연대회의의 합의와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아시아 연대회의는 점차 분쟁 하의 성폭력 문제와 관련된 단체나 그 지원 단체들과도 교류를 확장하여 여성 인권 신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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