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군 월항면 대신리 성산이씨 집성촌.

“나는 나라가 광복이 되어야 돌아갈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이 나의 시신을 모셔갈 수는 있겠지만 나의 혼(魂)은 돌아가지 않겠다.”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마을은 성산이씨의 집성촌이다. 한개마을의 한개란 예전에 큰 개울 또는 나루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앞으로는 낙동강 지류인 '백천'이 흐르고, 뒤로는 영취산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 안고 있다. 배산임수, 좌청룡 우백호 명당의 조건을 두루 갖추었는데, 이 마을이 생긴 이래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정재계 인물들이 배출되어 영남 최고의 길지 중 한 곳으로 손꼽히고있다.

한개마을은 2007년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현재 영주 무섬마을, 제주 성읍민속마을,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 고성 왕곡마을, 아산 외암마을 총 7개 마을이 이에 포함된다. 마을을 둘러보면 간간히 정비중이거나 현대식으로 신축한 건물도 있으나 대부분의 가옥들이 잘 단장되어 옛 모습을 지키고 있다. 마을 곳곳으로는 토담길이 집안 내부가 보일듯 말듯 감질맛 나는 높이로 이어져있는데, 그 토담길의 곡선을 따라 가다보면 경북도문화재로 지정된 재실, 한주종택(洲宗宅), 북비고택(北扉故宅), 진사댁(進士宅), 하회댁(河回宅), 교리댁(校理宅) 등 고건축물들을 하나씩 만날 수 있다.



한주종택은 마을의 중앙 토담길을 따라 진사댁과 화회댁을 지나서 제일 안쪽이 위치해 있는 고택인데, 현소유자의 조모께서 상주 동곽에서 시집왔다하여 동곽댁(東郭宅)으로도 불린다.

이 종택은 1767년 영조때 이민검(李敏儉)이 창건하고 1866년 한주 이진상(寒洲 李震相)이 중수하였다. 한주종택의 한주는 바로 이진상의 호에서 따온 것이다. 한주 이진상은 조선말 성리학의 대가로 널리 이름을 떨쳤는데, 이는 진사에 오른 아버지 한고 이원호(寒皐 李源祜)와 공조판서에 오른 숙부 응와 이원조(凝窩 李源祚)에게서 일찍이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진상의 아들 한계 이승희(韓溪 李承熙)는 훗날 아버지 못지 않은 성리학자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로써 항일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일제의 조선 침략 야욕이 점차 노골화 되자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펼치는 한편 만국평화회의에 일제의 만행과 조선의 억울함을 글로써 호소하기도 하였다. 1908년에는 환갑이 넘은 고령임에도 부산 동래를 거쳐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해 안중근(安重根), 이상설(李相卨), 유인석(柳麟錫)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측근을 통해서는 조선내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는 한편, 만주 한인 이주민들의 정착지를 물색하고 황무지를 매입・개척하여 그들의 생활을 안정 시켰다. 이뿐만 아니라 한민학교를 세우고 민족교육을 실시하였으며, 독립군의 병제를 제시하는 등 독립군 양성의 기반을 닦았다.



​1910년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는 "국사(國事)가 끝났으니 내가 떠돌아 다니다가 타국에서 죽어 독수리의 밥이 되겠구나!" 탄식하면서 한없이 통곡했다고 한다. 선생은 결국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1916년 2월 27일, 중국 펑톈(현 선양)에서 70세를 일기로 망국의 한을 품은채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나는 나라가 광복이 되어야 돌아갈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이 나의 시신을 모셔갈 수는 있겠지만 나의 혼(魂)은 돌아가지 않겠다.”라고 하셨다 전한다. 선생의 시신은 같은해 3월 28일 고국으로 돌아와 4월 28일 유림장(儒林葬)으로 치러졌다. 이때 애도를 표한 이가 만여 명이었고 만사(輓詞)가 1,087통(通), 제문(祭文)이 167통이나 되었다고하니 그의 학문과 정신을 흠모하고 애도한 이들이 그만큼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승희의 두 아들 ​이기원(李基元),이기인(李基仁) 또한 독립운동에 헌신해 훗날 이들 삼부자는 국가로 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과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조선말기 성리학 대가 집안에서 학자적 소양을 갖춤과 동시에 이학 정신을 몸소 실천하고, 조국의 광복을 위해 혼신을 다한 한주종택 가문이야 말로 진정한 대한민국의 명문가가 아닐 수 없다. 

정처 없이 떠도는 나의 발걸음이여(西登東蹈我今行)
고향 산 돌아가 묻히는 것 쉽지 않으리(歸骨鄕山詎易望)
빠진 이빨 머리털 함께 싸서 보내노니 (爲將落髮偕封去)
선영 옆에 묻어주는 것이 무방하리라 (埋近先阡自不妨)


- 한계 이승희作-

참고 :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



 
등록문화재 제261호로 지정된 한개마을의 아름다운 토담길. 고택의 내부가 보일듯 말듯 감질맛 나는 높이로 이어져 있다.



한주종택은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45호로 안채, 사랑채, 사당, 정자 등 모두 10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크게는 한주정사(寒洲精舍)가 있는 구역과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구역으로 나뉜다. 한개마을 가옥 중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나 현재의 가옥과 배치는 수차례의 증축과 개축이 거친 결과라 하겠다.



지체 높은 양반집에서 볼 수 있는 솟을대문이 아니고 평대문이라 오히려 이채롭다. 원래는 문간채에 초가지붕을 이어서 더 소박했었다고 한다. 겉치레 보다는 내면과 실용을 중요하게 생각한 기품있고 겸손한 양반가의 대문이 아닐 수 없다.



한주종가는 대대로 유학을 숭상해온 집안이었는데, 특히 주희(朱熹)와 이황(李滉)의 이학(理學)을 계승하였다. 사랑채에는 지금도 대대로 이학을 계승해 온 집안임을 밝히는 ‘주리세가(主理世家)’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 가문이 겪은 격동의 세월을 표현하는듯 굽이치며 자라난 노송과 꼬장꼬장한 노선비의 수염을 표현하는듯 늘어진 버드나뭇가지가 한주정사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한주정사는 앞면 4칸·옆면 3칸반 규모의 T자형으로, 화려한 팔작지붕을 하고있다. 가운데 보이는 2칸은 대청이고 양쪽은 방이 있다. 오른쪽 방은 뒤로 1칸 내어 통칸으로 하고, 앞으로 1칸 돌출시켜 누마루를 꾸몄다. 원래 마을의 가장 높은편에 위치한데다 누마루의 기둥이 유난히 높아 온마당과 마을이 시원하게 내려다 보인다. 한주정사의 동편에는 연못이 복원되어 있으나 가뭄으로 인해 메말라있었다.


가운데 대청마루에 걸린 ‘조운헌도재(祖雲憲陶齋)’라는 편액(扁額)은 주자(朱子)를 모시고 퇴계(退溪)를 법으로 삼는다는 뜻으로, 한주의 학통이 주자와 퇴계를 잇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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