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역사 이야기] 황금빛 경산 자인 들녘에서
[근현대 역사 이야기] 황금빛 경산 자인 들녘에서
  • 강철민
  • 승인 2019.10.30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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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으로는 제법 날씨가 쌀쌀해 입에서 하얀 김이 나와. 올 한 해도 두 달밖에 남지 않았다 생각을 하니 마음이 급해져.

소율아 잘 지내고 있지?

 

황금빛으로 물든 농촌 들녘으로 농민들은 추수하느라 여념이 없어. 태풍으로 나락이 넘어간 논들 사이로 부지런히 콤바인이 움직이며 추수를 하고 있어.

콤바인이 벼의 이삭을 떨어내고 논바닥에 볏짚을 남겨놓으면 트랙터가 볏짚을 공룡 알처럼 말아 놓아. 추수가 끝난 논에서 흔히 보았던, 흰 비닐로 감싼 공룡 알처럼 생긴 것이 바로 소여물로 쓰이는 볏짚 뭉치야.

콤바인이나 트랙터가 없던 시절에는 추수가 끝나면 볏짚을 집처럼 크게 쌓아 올렸어. 가장 윗부분은 비가 볏짚 단으로 들어가지 않게 초가집의 지붕처럼 마무리를 지었어.

초가집처럼 쌓아놓은 볏짚 단은 동네 개들이나, 동네 아이들의 신나는 놀이터였어. 개구쟁이 꼬마들은 쌓아놓은 볏짚 단 속에 구멍을 내고 들어가 작은 공간을 만들어 놀곤 했어.

친구들과 꽤 큰 약속을 나눴던 도원결의의 공간도 되었다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시 쉬었다 가는 휴식처가 되기도 했어. 장난이 심한 친구들은 그 안에서 성냥을 그어 볏짚 단을 태운 적도 있었지. 

그 공간은 아늑했어. 틈새로 삐죽이 들어오는 가을 햇빛에 짚 먼지들이 별빛처럼 빛나고 아이들의 땀 냄새, 볏짚 단의 구수한 냄새가 뒤죽박죽 섞여 포근한 보금자리가 마련돼. 강아지를 베개 삼아 누워있으면 한 번도 가진 적 없는 나만의 공간이 되었어.

 

서리도 내리고, 곧 겨울이 오겠다.

지금 가을의 들녘처럼

80여 년 전 가을의 들녘도 황금빛으로 물들었을까?

 

사진 자료 출처 : 대구경북근현대연구소

오늘은 80여 년 전, 일제강점기인 1938년 10월 경산군 자인면에서 발행된 비상시국 통고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할게.

경산군 자인면은 왜적을 물리친 ‘한 장군’에게 해마다 제사를 지내는 국가무형문화재 제44호 자인 단오제로 유명한 곳이야. 삼촌이 살고 있는 지역의 자료라서 특히 더 흥미가 있어.

잠시 1938년 식민지 조선의 상황에 대해 살펴보자.

당시 일제는 제국주의 정책에 따라 원료와 자원 확보를 위한 식민지 확충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어. 중국 대륙을 침략하여 중일전쟁을 일으켰지.

이 전쟁은 1945년 세계 2차대전에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일제는 당시 전시상황을 유리하게 하려고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여 식민지 조선을 가혹하게 수탈했어. 중국 침략을 위해서는 전쟁 물자나 인적 자원이 엄청나게 필요했는데, 본국보다 전선에서 가까운 조선에서 이러한 것들을 동원하기가 유리했기 때문이야.

조선은 사회, 경제, 문화, 정치 등 모든 부문에서 일제의 병참기지로서 가혹한 희생을 강요당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조선 민중들이 보게 되었지.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 시행부터 1945년 9월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놋그릇, 놋수저, 송진, 쌀, 보리, 면화 등 모든 물자에 대한 공출, 징병, 징용, 위안부 동원 등 수많은 희생을 강요당했어. 이 비상시국 통고문의 내용 또한 그러한 시대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아.

 

자인면, 자인 경찰관 주재소 발행 비상시국 통고문 (1938. 10.)


◎ 현재의 비상시국에 있어서 생업 보국의 정신으로 우리 농가에서 금년부터 실시할 다음 사항에서 특히 유의할 점

1. 산미(産米) 개량

(1) 벼 수확 후 건조 : 종전의 부건(敷乾, 깔아서 말림)을 피하고, 소속입건(小束立乾, 적게 단을 묶어세워서 말림)을 엄격히 시행한다.

(2) 수확 건조 조제 개선, 연상(莚上) 탈곡, 연건(莚乾) 실시

2. 맥작(麥作) 개량

(1) 봄에 뿌린 보리 전량 폐기

고랑의 폭 : 밭 콩, 밤 사이짓기 2척 5촌

감자면 4척

(2) 고랑의 폭 개량

논 2척 5촌

(3) 흙넣기, 보리밟기 실시

겨울 2회, 봄 3회

씨뿌리기 폭 : 8촌

3. 도난 방지

(1) 농작물 반입을 특히 도작(벼농사)에 한하여 일몰 후에는 운반 엄금, 물건 무게 경계, 자위단(自圍團) 조직

(2) 도난을 당할 때 지체 없이 당국에 신고할 것

 

위와 같이 통고함

1938년 10월

자인면

자인 경찰관 주재소

 

각 농가

 

통고문을 살펴보면 중일전쟁 초기인 전시상황에서 경산군 자인면 각 농가에서는 생업 보국(生業報國)의 정신으로 농사를 잘 지어 전쟁 물자 중에 가장 중요한 쌀, 보리 등의 식량 증산에 최선을 다하자는 내용이야.

또한, 각 농가에서는 이러한 식량 물자를 일제에 잘 헌납하기 위해 밤에 농작물이나 쌀을 운반하지 못하게 자위단(自衛團)을 조직해 경계하고, 농가에서 가져가지 못하게 일제에 대한 공출을 종용하고 있어.

그리고 독립운동, 무장독립투쟁 단체 혹은 배고픈 농가에 의한 도난이 있을 때 바로 일제 당국에 신고하도록 주의를 시키고 있지.

이 자료는 당시 일제가 총독부에서 말단 면, 경찰관 주재소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체계적으로 식민지 조선에 대한 수탈을 한 것인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자료라 할 수 있을 것 같아.

퇴근하면서 잠시 차를 세워두고 자인 들판 논둑에 앉아 황금빛 들녘을 바라보는데 일제 순사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씁쓸하더라.

 

감기 조심하고 건강해!

 


 * 국가총동원법 : 1938년 4월에 일제가 인적·물적 자원의 총동원을 위해 제정·공포한 전시 통제의 기본법. 국가 총동원이라 함은 전시 또는 전쟁에 준할 사변의 경우에 이른바 국방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국가의 모든 힘을 가장 유효하게 발휘할 수 있도록 인적·물적 자원을 통제, 운용함을 말한다. 이 법은 일체의 인적·물적 자원을 총동원 물자와 총동원 업무로 양분하여 강력한 통제 밑에 있게 하였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사전 발췌, 요약) 


글 _ 강철민 대구경북근현대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