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 삶, 저항의 흔적] 톨게이트 노동자 투쟁 승리와 노동 개악 저지를 위한 순회투쟁 참가기(1)
[노동과 삶, 저항의 흔적] 톨게이트 노동자 투쟁 승리와 노동 개악 저지를 위한 순회투쟁 참가기(1)
  • 기록노동자 시야
  • 승인 2019.11.19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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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힘을 키우는 3박 4일 순회투쟁”

※ 11월 5일부터 11월 8일까지 톨게이트 노동자 투쟁 승리와 노동 개악 저지를 위해 투쟁 현장을 방문하고, 간담회와 선전전 등의 연대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톨게이트직접고용시민대책위와 ‘비정규직 이제 그만’ 공동투쟁 3박 4일의 기록을 2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톨게이트 노동자는 기운이 세다 

투쟁사업장 순회투쟁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나절 고민했다. 내가 따라나서도 되는 자리인지 알 수 없었고, 낯선 사람들과 낯선 공간으로 긴 시간을 떠난다는 것도 내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투쟁사업장을 찾아다닐 좋은 기회인 것만은 확실하다. 단풍놀이하듯 가을 여행 삼아 3박 4일간의 여정을 즐기리라 마음먹고 짐을 쌌다. 잠잘 때 깔고 자는 매트와 담요를 다 싸 들고 따라나섰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농성하는 한국도로공사(이하 ‘공사’라고 함)는 김천에 있다. 내가 사는 성주읍에서 거리가 멀지만, 사드가 배치된 골짜기마을 소성리에서 꾸불꾸불한 산길로 난 도로를 따라 달리면 20여 분이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서울고속도로 캐노피에 올라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찾아가 보지 못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컸었다.

대법원에서 공사가 파견법을 위반했다는 취지로 직접 고용해야 한다는 판결문을 냈고, 공사는 대법원 판결문을 이행할 의지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노조탄압과 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를 묵살하고 말았다. 

마침내 9월 9일 성난 황소같이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기습적으로 공사 김천본사로 쳐들어왔다. 한국도로공사 이강래 사장을 만나기 위해서다. 그날로부터 김천본사 건물 안에서 300여 명의 톨게이트 요금수납원 노동자들이 농성을 시작했다. 건물 바깥으로도 텐트촌이 형성되면서 농성이 시작되었다. 

투쟁사업장 3박 4일 순회투쟁을 시작하는 날, 김천본사에서 발대식을 했다. 공사 정문부터 후문까지 걸어가는 길에 건물을 둘러싼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텐트가 각양각색의 색깔과 모양으로 거리를 장식하고 있다. 마침 순회투쟁을 시작하는 날에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상당수가 서울로 오체투지를 하러 떠났다. 건물의 정원은 빈 텐트촌으로 휑한 감도 있었지만, 순회투쟁을 떠나기 위해 멀리서 연대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발대식에 앞서 몸자보를 나눠 입고, 건물 농성자들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에 대열을 정비했다. 사회자가 인사를 건넬 때마다 톨게이트 농성자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와 환호성에 높디높은 공사 건물이 들썩거렸다. 노동자들의 기세가 대단하다는 걸 단박에 느낄 수 있었다. 정원의 비어있는 텐트촌이 외롭게 느껴진 건 싸늘한 가을 날씨 탓이었나 보다. 

두 달 가까이 김천본사 건물 안에서 농성하느라 갇혀 지낸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는 어디서 자꾸만 솟아나는지 신기하게 바라봤다. 

버스에 탑승할 시간이 다가오자 잘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서도록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응원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보라물결 순회투쟁단

버스에 탑승한 사람들 대부분이 투쟁하는 노동자들이다.

톨게이트 노동자들과 아사히비정규직지회 노동자들, 창원공장에서 올라온 지엠 비정규직 노동자들, 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철도공사 비정규직 노동자 그리고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에서 참여했다. 사회운동하는 활동가들까지 30여 명 정도가 버스에 짐을 싣고 몸을 실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회투쟁단은 모두 보라색 몸자보를 입었다. 보라색 몸자보 가슴에는 ‘비정규직 이제 그만’이 적혀있고, 등판에는 ‘톨게이트 투쟁 승리, 자회사 폐기, 직접 고용 쟁취! 노동 개악 저지’라고 적혀있다. 한 장을 받아서 내 몸에 걸칠 때만 해도 투박스럽게 보였던 몸자보는 사진을 찍을 때면 화사하고 때깔이 좋아 보였다. 화사한 봄날을 맞이한 것처럼 밝고 아름다웠다.

처음 순회 버스가 도착한 곳은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천막농성장이 있는 공장 앞이다. 널찍한 주방과 잠자는 공간을 구분하고 짐을 쌓아둘 수 있는 창고까지 겸비되어 짜임새 있게 잘 만들어진 농성장이다. 천막농성장을 마치 박물관 구경하듯 꼼꼼히 돌아보던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입에서 연신 감탄이 터진다. 

그러나 더 감탄할 일이 있다. 아사히글라스에 근무하는 정규직 800여 명과 비정규직 200여 명 등 1000여 명의 노동자가 일해서 벌어들인 돈이 연간 1조 원이라고 한다. 아사히비정규직 노동자들이 5년째 투쟁하면서 5~6천억으로 줄었다는 소문도 있다. 사내유보금만 9000억 원이라고 남기웅 수석부지회장이 알려줬다. 최근에 8000억 원으로 줄었다고 한다. 

4년을 넘어 5년을 바라보는 투쟁에 희망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 아사히의 불법파견을 검찰이 기소했다. 형사재판이 진행 중이고, 근로자지위확인소송에서는 이미 노조가 이겼다. 그러나 긴 싸움을 이어가기 위해서 필수적인 조건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희생에만 의지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재정사업을 주기적으로 해야 하는 고충이 크다. 당장 다음 달 해고노동자에게 생계비로 지원되는 돈 100만 원이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남기웅 수석은 수줍게 고백한다. 11월 22일 생계비 마련을 위해서 후원주점을 열 계획이라는 깨알 같은 홍보도 잊지 않는다. 

짧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서 떠나기 전에 아사히글라스 공장 정문으로 올라갔다. 보라색 몸자보를 입고 우르르 몰려오는 우리를 본 경비는 당황한 듯이 바쁘게 문을 닫았지만, 우리가 쳐들어갈 기세가 아니란 것을 눈치채고는 다시 문을 열어두었다. 공장 앞에서 전범 기업 아사히를 규탄하고, 단체 사진을 찍었다. 3박 4일간 장소를 바꿔 단체사진을 찍는 여정을 담은 첫 장면이었다. 

 


순회투쟁은 저항의 크기를 키우는 여행

경산시청 앞 천막농성장, 경산환경지회가 늘 천막농성을 했던 자리는 대림택시 노동자들이 차지했다. 140일 넘는 시간 동안 악질 사용자 처벌과 노조 인정을 요구해왔다. 택시 월급제가 뜨거운 감자다. 최저임금이 택시노동자에게 적용되고 나서 그야말로 최저 수준의 월급제를 시행하는 것조차도 사납금 제도가 철폐되지 않는 이상 택시노동자에게 꿈같은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더구나 거대한 자본이 택시사업에 뛰어들었다. 작고 영세한 택시회사는 망하기 일보 직전이다. 택시업계에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려는 조짐이다. 심각한 위기 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경산지역의 택시노동자 투쟁집회에는 늘 함께 하는 지역의 연대가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환경미화 노동자와 장애운동 활동가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예전보다 수가 썩 많이 늘어나지 않아도 택시노동자들은 자신의 몫을 잘하고 있으니, 저항의 크기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버스는 서른 명의 순회투쟁단을 싣고 거제를 향해 달려갔다.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줄여서 거통고로 부름)에서 마중 나와 주셨다. 돼지국밥집에서 따뜻한 국물로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을 만나러 갔다. 

순회투쟁에 나선 톨게이트 노동자 해옥 씨는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게 떨리지만,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투쟁을 알려내기 위해 용기를 냈다. 

“저희 톨게이트 요금수납원은 6500명가량 되었어요. 2013년부터 불법파견 소송이 시작되었어요. 2015년도에 1심과 2심을 다 승소를 했고, 저희가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는데, 도로공사가 자회사를 만들어서 5000여 명이 자회사로 간 거예요. 

저희는 사업장 직원 수가 180명 되는데 하이패스가 들어오면서 사람이 잘렸고, 저희가 그만두기 전까지 86명 정도가 남았는데요. 저희는 사람이 많으니까 괜찮지만, 지방 같은 작은 곳은 사람이 적으니까 일 대 일로 협박하고 윽박질러서 자회사로 보내진 거예요. 

저희가 올해 6월 말로 해고가 되었는데 5월부터 해고 작업이 시작되었어요. 공식적으로 자회사로 가지 않은 1500명은 7월 1일부로 해고를 당했습니다. 투쟁이 뭔지도 모르고 처음 시작을 서울고속도로 캐노피에 오르는 것으로 시작했어요. 캐노피에 올라가서 농성하다가 8월 29일 대법원 승소 판결을 받았어요. 

아 우리가 이겼다. 대법원 승소를 했으니까, 우리는 이제 도로공사의 직고용이 될 거라면서, 대법원 앞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그 비를 흠뻑 맞으면서도 우리가 좋아서 덩실덩실 춤을 춘 거예요. 그 감동은 말로 할 수가 없었어요. 기뻤어요.

그런데 대법원 승소의 기쁨은 잠시였습니다. 9월 9일 도로공사 이강래가 입장 발표를 했습니다. 

대법원 판결 승소자에 한해서만 직접 고용을 받아주겠다고, 그 외에는 각자 법원 판결을 받고 와야지만 직접 고용을 시켜준다고 한 거예요. 대법원 판결 승소자 300여 명이었거든요. 그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9월 9일 김천본사로 250여 명이 점거 농성에 들어간 거예요. 

저희는 사실 한국노총의 소속이었어요. 그런데 한국노총의 협상 내용이 얼토당토않은 거라서 저희는 그 협상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70여 명이 한국노총에서 탈퇴하고 민주노총 소속 민주연합노조로 온 거예요. 

오늘 저희가 순회투쟁에 많이 참여했어야 하는데, 서울에서 6킬로미터 정도 오체투지하는 데 올라가는 바람에 많이 오진 못했어요.

저흰 진짜 이런 걸 잘 몰랐어요. 저만 힘든 줄 알았어요. 막상 처음에 아사히 갔고, 경산에 택시노동자들 천막농성장에 가서 너무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싸우는 걸 보고 많은 생각을 했어요. 

저희도 얼마 안 남은 거 같아요. 직접 고용되더라도 우리는 연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해옥 씨의 이야기를 듣던 조선 하청 노동자 한 분이 “지금은 얼마 남지 않았다고 긍정적으로 말씀하지만, 자회사에 들어가서 일하고 있는 분들 보면 부럽지 않냐?”고 질문을 했다. 

해옥 씨도 처음엔 자회사로 가길 희망한다는 사인을 했었다. 남편도 ‘젊지 않은 나이에 얼마나 다니겠냐’면서 자회사로 가길 원했다. 그러던 해옥 씨는 자회사로 가겠다는 사인을 뒤집기 위해서 한국도로공사로 내용증명을 보내 직접 고용이 되기를 원한다고 알렸다.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했고, 자식이 대를 이어 비정규직화되는 세상이 되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직접 고용을 원했다. 그러다가 한국노총 톨게이트노동조합 위원장이란 사람이 이상한 협상을 하고 말았다. 해옥 씨는 한국노총톨게이트노동조합 조합원이었다. 

대법원 승소 판결과 2심 판결을 받는 사람은 직접 고용하고 1심 대기자는 임시직으로 고용하는 내용으로 협상을 한 거다. 해옥 씨도 1심 재판을 진행 중이지만, 아직 판결을 받지 못해 대기 상태이다. 지금까지 직접 고용을 쟁취하겠다고 활동했는데 임시직이라니 받아들일 수 없는 결론이었다. 무엇보다 해옥 씨가 톨게이트 요금수납원으로 일한 지가 13년이 넘었다. 정규직이 되고도 호봉이 십수 호봉 올라갔을 시간이다. 임시직이라고 하는 순간 분통이 터질 일이다. 

한국노총 톨게이트노동조합에서 답답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정보교환이 없었다. 궁금해서 물어보면 대답을 제대로 해주지 않았고, 물어볼 곳도 없었다. 조합 밴드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올리면 오히려 찍혀서 행동에 제약을 당하기도 한다. 해옥 씨는 탈퇴한 게 아니라 밴드에서 제명을 당하고 말았다. 민주노총으로 옮겨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공동투쟁을 할 때라서 옮겨가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한국노총톨게이트노조 위원장이 을지로위원회가 내놓은 안으로 이강래와 야합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리고 투쟁의 현장을 떠나버렸다. 그러나 직접 고용을 열망했던 70여 명의 조합원은 한국노총을 따라나서지 않고 오히려 탈퇴했다. 김천본사에서 농성하는 동지들을 두고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해옥 씨는 일찍 제명당한 걸 다행으로 여겼다. 바로 민주노총 민주연합노조로 옮겨와서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거통고조선하청노동자들의 현실도 만만치 않았다. 정부에서 초과근로시간을 12시간으로 강제하면서 주 52시간제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서 기본 근로시간을 부르듯 자연스러워졌다. 조선소는 일용직 노동자들이 용접 기술을 가지고 있어서 일당이 셀 거라 기대하지만, 포괄임금 형식으로 받는 일당에는 각종 초과근로와 수당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을 계산해보면 최저임금 수준을 조금 넘는 정도의 박봉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일거리가 있으면 무조건 해야 하고, 시간 외 일과 특근을 마다하지 않는다. 지회 간부는 3박 4일 순회투쟁단과 간담회가 있다고 조합원들에게 알려도 잔업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조선소 일용노동자들의 현실이 답답할 뿐이다. 

거기다 조선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산재 은폐의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사람이 다쳐도 119에 실려 나가지 못하고 트럭에 실려 나가는 비참한 상황을 그들은 날마다 눈으로 보아왔고, 들어왔다. 하루가 멀다고 산재 사고를 당하고 죽음을 가까이서 마주해야 하는 조선소는 산업구조조정이 끝나지 않아 커다란 쓰나미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거제에서 마련해준 잠자리는 청소년문화센터였다. ‘럭셔리’한 건물에서 하룻밤을 편히 묵고 나서 새벽 5시 30분에 기상했다. 6시 30분까지 대우조선소 서문으로 향했다. 선전전을 하기 위해서 서문으로 연결된 다리 위에 섰다. 발밑이 울렁거렸다. 갑자기 현기증이 나는 듯하더니 짜릿한 어지럼증이 올라왔다. 길 건너에 작업복을 입은 대우조선소 노동자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어왔다. 여기저기서 건네주는 선전지를 한 손에 받아들고 출근하기 바쁘다. 현수막을 쥐고 있던 우리는 큰소리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톨게이트 노동자들입니다. 대법원에서 불법파견으로 인정받아서 한국도로공사가 직접 고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도로공사는 법 판결문을 이행하지 않고 오히려 탄압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싸워서 직접 고용을 쟁취할 겁니다. 권리를 되찾을 겁니다. 여러분도 노동조합에 가입하세요. 여러분의 노동권리를 찾으십시오.” 

 

순회버스는 대우조선 노동조합 사무실로 향했다. 대우조선의 경비실을 통과하여 배가 만들어지는 현장을 지나쳐 노조 건물 앞에서 내렸다. 대우조선의 어마어마한 광경을 눈으로 펼쳐 보고 있자니 갑자기 내 입에서 옛날에 불렀던 노래가 흘러나왔다. 


투쟁의 망치로 노동자의 하늘을 보라

마침내 전노협 전선에 우뚝 서다

투쟁은 가슴속에 살아 심장으로 뛰고 

동지는 가슴속에 살아 해방을 노래하네

소나기 퍼붓는 옥포의 조선소에서 

눈보라 날리는 서울 철로 위로 


언제이었던가 소나기 퍼붓던 옥포의 조선소가 바로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대우조선소가 아닌가? 30년도 더 되었을 법한 노래를 이곳에서 부르게 될 줄이야 어찌 알았을까? 그리고 그때 총파업을 본 적은 없지만, 상상해보았다. 저 거대한 크레인 위로 민주노조의 깃발이 세워져 있는 모습을, 그 아래 수만의 노동자들의 팔뚝질과 우렁찬 구호가 세상을 뒤흔드는 소리를. 


어깨를 맞대고 노동자의 꿈과 힘 모아

잡은 손 놓지 못하는 놓지 못하는

노동해방의 약속으로 

전노협 전선으로 


30년 전엔 노동자 총 단결로 총파업으로 노동해방 세상을 건설하자고 외쳤다. 

노동해방 깃발만 서면 가슴이 뜨거웠다. 운동의 전망은 새 세상,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런 세상을 노동해방 세상이라고 불렀다. 분명 꿈같은 이야기였을지라도 결코 꿈이 아니었고, 언젠가는 우리가 건설하고야 말 역사라고 믿어왔다. 

기나긴 여정을 걸어오면서 꿈꾸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어찌 견뎌내면서 걸어올 수 있었을까?

언제가 될지 기약할 수 없으나 옥포의 조선소에서 서울 철로까지 노동해방 깃발 휘날리면서 총파업하는 날에 다시 조선소의 문을 열고 들어설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면서 순회버스는 창원을 향해서 달렸다. 

 

 

-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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