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조리 소성리] 미군 숙소로 닿는 오솔길을 걷다
[요리조리 소성리] 미군 숙소로 닿는 오솔길을 걷다
  • 기록노동자 시야
  • 승인 2019.11.29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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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기운을 보낸 초 여름날, 풀이 자라는 속도를 낫이 따라가지 못했다. 

아침마다 진밭의 아침기도회에 참석하고 불법으로 배치된 임시 사드기지 앞에서 평화행동을 했다. 마치고 나면 아침밥 먹을 새도 없이 고추밭으로 향했다. 달마산으로 오르는 길에 넓은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논과 밭이 나란히 줄지어 있다. 나의 고추밭도 그 어디쯤 위치하고 있다. 

초 여름날, 밭에서 김을 매고, 고추 모종의 가지를 친다. 밭고랑의 풀은 순식간에 자랐고, 비닐 구멍을 뚫고 올라오는 풀도 고추 모종 키만큼 자라고 있었다. 아침 8시 30분이 넘어 밭일은 시작되었고, 금방 태양이 열을 뿜어내어 내 온몸은 땀이 묻어났다. 

밭고랑 김매는 낫질을 하는 동안 머리 위로 거대한 시누크헬기가 공포의 소음을 뿌리면서 날아다녔다. 컨테이너를 대롱대롱 매달아서 유유히 사드기지로 들어간다. 한 번은 오른쪽으로 돌고, 한 번은 왼쪽으로 돌고, 어디서 날아오는지, 하늘 도로는 삐뚤삐뚤한 걸까, 한 방향으로 날아다니지 않았다. 갈지자를 그리면서 상공을 누빈다. 

소성리 주민은 누구도 군대 헬기가 마을 상공을 날아다녀도 좋다고 허락한 적 없다. 시누크 헬기는 염치도 없이 소성리 상공을 마음대로 누비고 날아다닌다. 헬기의 소음에 나는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분노해보지만, 고추밭에서 나 홀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목청껏 욕지껄이를 퍼붓는 것 말고는 별 수가 없다. 소리라도 지르고 나면 괜스레 나는 겸연쩍다.

하루는 낫질을 하다가 풀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사드기지 앞 평화행동에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겠다고 고백했다. 새벽 일찍 진밭으로 가지 않고, 고추밭으로 와야 할 거 같다고. 새벽시간대를 놓치면 농사일을 감당할 만큼 내가 끈기 있는 사람도 아니었고, 기후를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결국 여름 동안 아침 일찍 고추밭으로 향했고, 휴가철인 7월 말부터 빨갛게 익은 고추를 따기 시작했다. 8월의 무더위를 고추밭에서 보냈다. 

내가 고추를 따는 동안에도 사드기지로 올라가는 길목인 진밭은 새벽의 정적을 깨우는 목탁소리가 울렸다. 진밭의 평화교당을 지키는 원불교 교무님이 달마산의 정기를 받아 새벽 기도를 드렸다. 아침기도회는 요일마다 색깔이 있었다. 꼬박꼬박 이뤄졌다. 비록 적은 수의 사람일지라도, 아니 어떨 때는 홀로 기도하게 될지라도 아침기도회는 막힘이 없었다. 

사드기지 앞에서 평화행동도 무더운 여름날을 관통했다. 국방부는 더운 여름날에 사드기지는 장병 숙소 리모델링 공사를 강행했다. 정수장 시스템을 교체하고, 배관 공사와 냉난방 시설공사 등 군대 시설을 정비하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주민들의 저항이 부담스러웠던지 육로를 이용하지 않고, 헬기를 이용해서 자재를 실어 날랐다. 헬기가 자주 날아다니는 이유였다. 

소성리 평화지킴이들은 미군에게 항의하는 길을 걸었다. 사드기지는 철조망으로 둘러쳐졌고, 산을 올라 철조망 둘레를 둘러보아야 군대와 직접 마주할 수 있다. 철조망이 쳐진 곳까지 산길을 따라 오르면 클럽 하우스가 보이는데, 바로 미군 숙소다.

미군 숙소 바로 코앞에서 항의 행동을 할 수 있다. 내가 고추밭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소성리 평화지킴이들의 활동 소식은 계속 올라왔고, 나는 미안한 마음을 잠시 주머니 속에 접어 넣었다. 

 

‘그러나 떠날 생각을 하지 못하는 건 떠날 곳이 없기 때문이다’

게으른 초보 농부의 고추농사는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 가을걷이는 끝났다. 가을걷이 끝나면 돌아가겠다는 약속은 좀처럼 지켜지지 않았다. 한동안 몸이 무거웠다. 떨어져 있는 동안 마음도 살짝 사그라들었다. 가슴이 점점 굳어갔다. 

마음을 추스르는 데는 한참이나 시간이 필요했다. 

끝이 보이지 않고, 반복되는 구호는 공허했다. 무기력한 몸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 그러나 떠날 생각을 하지 못하는 건 떠날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문학잡지에서 사드 배치 이후 소성리의 이야기를 글로 써달라는 원고 청탁을 받았다. 거절할까, 쓸까, 쓰고 싶지만 쓰고 싶지 않은 마음이 널뛰듯이 반목했다. 나는 기록을 남기자며 자세를 고쳤다. 고민이 시작되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나는 미군 숙소로 항의하는 길에 따라나서고 싶었다. 한동안 관리하지 않아 근육이 풀릴 대로 풀어져 버린 내 몸은 비대해졌고, 내 두 다리는 나를 지탱해서 잘 걸을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체력을 키워서 걸어야 하나, 망설이는 동안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 어느덧 가을은 깊어졌다. 바람은 거세게 불어댔다. 계절이 나를 몰아쳤다. 겨울을 부르면서 나더러 올라가라고 몰아쳤다. 

‘나도 올라갈래요’

소리는 움츠러들어 아무도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항의하러 미군 숙소로 가는 길은 화요일과 목요일 그리고 금요일 이렇게 일주일에 세 차례 걷는다. 오후 1시 30분 소성리 마을회관에서 출발한다. 

11월 12일 화요일 1시 30분 소성리 마을회관에 도착했다. 소성리 상황실의 김 팀장이 차에 시동을 걸었다. 나는 쭈뼛쭈뼛 따라나섰다. 소성리 마을회관을 출발한 차량은 진밭교를 지나 오른쪽으로 꺾었다. 평화계곡을 지나서 소성리와 김천의 경계지점까지 가서 멈춘다. 사과 과수원을 지나서 대나무 숲이 우거진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낙엽이 소복이 쌓인 땅바닥은 푹신했다. 걷기 딱 좋은 길이었다. 

지금 팔순이 넘은 도금연 할매가 새댁이었을 시절에 산나물을 뜯으러 올랐던 동네 뒷산이다. 시부모 눈을 피해서 잠시라도 쉴 수 있었고, 비슷한 또래의 새댁들이 도시락 싸 들고 올라가 소풍을 즐기던 산이었다. 여럿이서 수건돌리기를 하며 마음껏 웃고 떠들 수 있었던 은밀한 젊은 새댁들의 놀이터였다. 

 

가파른 길은 없었다. 한동안 사람의 발길이 끊긴 탓인지, 태풍이 지나간 흔적인지, 살짝 끊어진 길이 있어서 거칠긴 했지만, 순탄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었다. 낙엽치 뒤덮은 길은 울긋불긋 미끄럽다. 작대기에 의지하면 걷기가 수월했다. 

두 사람이 걷는 길은 호젓했다. 미군 숙소 ‘항의하는 길’에서 가을을 만나다니! 단풍놀이가 어색하다. 진밭의 기도가 천일을 향해 갈 때, 우리는 사드기지 철조망 둘레를 걸어 천일에 다다르고 있었다. 

마지막 가파른 고갯길을 넘으면 왕릉처럼 큰 무덤을 지나서 미군 숙소가 나온다. 철조망 너머로 보이는 건물은 창문이 이를 앙 다문 듯 닫혀있었다. 머리맡에 감시 카메라는 사람의 목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눈알을 굴리면서 움직였다. 철조망을 뚫고 들어갈 수 없지만, 미군 숙소와 우리가 서 있는 거리는 가깝게 느껴졌다. 

한 여름 수풀이 우거졌더라면 형체가 희미했을 테지만, 낙엽이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아 벌거벗은 산이 겨울 문턱에서 미군 숙소를 온전히 다 보여주었다. 

김 팀장의 등에 울러 매진 가방에서 작은 휴대용 앰프와 마이크를 꺼냈다. 미군 숙소 앞 평화행동을 시작했다. 한국어로 할 수 있는 표현을 다 써서 ‘사드 가지고 미국으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아니, 나는 악을 썼다. 

 

미국 군대가 한국 땅에 마음대로 들어와서 군사기지를 만들었다. 전쟁연습을 일삼으면서 무기를 팔아먹고 있다. 그것도 부족해서 미군이 주둔하는 비용을 한국 정부에게 다 전가시켰다. 한국 민중의 등골을 빼먹는 악마들이라고 치를 떨면서 욕해댔다. 훨씬 고상한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가슴에 맺힌 원망을 분출하며 악다구니를 쓰고 나니까, 나는 속이 뻥 뚫리는 듯했다. 내가 평생을 살아가야 할 지역에 미군 기지라니. 사드라니. 

내려올 때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씩씩하게 걸어가다가 스르르 미끄러졌고, 내 뒤를 이어서 김 팀장도 스르르 낙엽 위로 미끄러졌다. 미끄럼틀은 부드러웠다. 

미군 숙소를 향해 가는 길, 나는 함께 간다. 한국 땅에 미국 군대를 더 이상 놔둘 수가 없다. 그런데 어떻게 내보낼 수 있을까. 내 평생의 숙제를 안고 마을로 내려왔다. 

 

 

2019년 1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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