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그들의 헌신

 

중세 유럽에서는 고대 그리스와 이슬람 의학에 근간하여 모든 질병의 근원을 ‘체액의 불균형’으로 보았다. 그래서 치료는 이 균형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었다. 때문에 의대 교육은 대부분 내과에 치중되었고, 의사 중에서도 이론의라고도 불리는 내과의(fisici)가 가장 소수의 상위 집단이었다.

이 외에 도제식으로 양성된 외과의(chirurghi)와 독학과 개인 경험으로 의학을 습득한 임상의(empirici)도 있었다. 임상의는 무면허 의사 취급도 당했지만 골절이나 탈장, 외상 등 특정 분야에 상당한 전문성을 보유한 사람도 있었다.

 

▲  긴 부리가 달린 마스크는 오염된 공기를 차단하는 방독면이었고, 사진에 나오지는 않지만 지팡이는 환자를 직접 접촉하지 않고 진료하기 위한 도구였다.ⓒ unsplash
▲긴 부리가 달린 마스크는 오염된 공기를 차단하는 방독면이었고, 사진에 나오지는 않지만 지팡이는 환자를 직접 접촉하지 않고 진료하기 위한 도구였다. ⓒ unsplash

1348년 3월 초, 흑사병이 터지자 여러 나라에서는 흑사병에 대응하기 위해 의사를 직접 고용했는데 이들을 ‘흑사병 의사’라고 불렀다. 우리가 아는 기괴한 흑사병 의사는 일종의 방호복을 착용한 모습이다. 이 복장도 17세기에서야 프랑스에서 처음 등장했다. 14세기 의사들은 아무 보호 장비도 없이 환자를 돌봐야 했다.

지식과 기술의 수준 차이는 있지만 의료진의 사명감과 헌신은 오늘날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들의 노력에는 직접적인 환자 치료도 있었지만 치료법 개발을 위한 집단 지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런 노력에 힘입어 의학은 신학과 철학을 벗어나 과학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양보다 질을 선택한 피렌체의 의료·제약 길드
  
1338년 피렌체의 의료·제약 길드(상공업자들이 만든 상호 부조적인 동업 조합)에는 내과의와 외과의가 60여 명, 약종상이 100여 명 가입되어 있었다. 하지만 1348년 4월에서 9월 사이에만 인구의 60%가 흑사병으로 사망하는 와중에 상당수의 구성원이 희생되었다.

길드원이 부족해진 다른 길드들은 인원수를 채우려고 가입 조건을 완화했다. 하지만 의료·제약 길드는 이와 반대로 오히려 가입 조건을 더 강화한다. 이런 조치는 길드원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흑사병으로 의료 수요가 폭증한 상황에서 무자격자의 무분별한 진료나 검증되지 않은 약과 치료법의 난립을 막기 위한 것이 더 큰 이유였다.
  
그리고 가입 조건을 강화했지만 의사로서 실력이 검증되었다면 여성도 길드에 가입할 수 있었다. 물론 매우 제한적인 시기(1353-1408)에 그 수도 4명에 불과했지만, 다른 곳과 달리 피렌체에서만 여성 의사를 찾아볼 수 있었다.

 

▲  흑사병 논고에는 흑사병을 이기기 위해 의료인들이 치열하게 노력한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이런 논쟁과 검증을 통해 외과적 치료의 중요성에 눈을 뜨고 해부학적 경험과 지식이 축적되었다. 그리고 14세기 후반에 파리와 볼로냐 대학 등은 해부학과 외과 관련 내용을 주요 교과로 편성했고, 이는 현대 의학의 초석이 되었다.ⓒ pixabay
▲흑사병 논고에는 흑사병을 이기기 위해 의료인들이 치열하게 노력한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이런 논쟁과 검증을 통해 외과적 치료의 중요성에 눈을 뜨고 해부학적 경험과 지식이 축적되었다. 그리고 14세기 후반에 파리와 볼로냐 대학 등은 해부학과 외과 관련 내용을 주요 교과로 편성했고, 이는 현대 의학의 초석이 되었다. ⓒ pixabay


흑사병 논고, 치열한 논쟁과 공유
    
당시 많은 의사가 흑사병 환자를 치료한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다. 독일 의학사가 칼 쥐트호프는 1348년에서 1500년 사이의 기록 281편을 정리해 ‘흑사병 논고(plague tractate, Pestschriften)’를 펴냈다.
  
당연한 얘기지만 현대의 시각으로 봤을 때 흑사병 논고에는 많은 오류가 있다. 1345년 3월 20일에 화성, 목성, 토성이 일렬로 늘어선 것이 관측되었다. 파리대학 의학부는 바로 이때 지구 대기에 치명적인 오염이 발생했고, 이것이 ‘흑사병의 원인’이라고 발표한다. 1348년 10월에 발표된 이 내용은 일부 비판도 있었지만 당시 가장 권위 있는 해석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흑사병 논고에는 흑사병을 이기기 위해 의료인들이 치열하게 노력한 흔적들 역시 곳곳에 남아있다.
  
논고의 기록들은 서신 형태가 많았는데 주로 의사들 간에 오간 질문과 답변들이었다. 의사들은 치료방법에 대한 검증과 반박, 추가 의견들을 주고받았다. 이런 논쟁과 검증을 통해 외과적 치료의 중요성에 눈을 뜨고 해부학적 경험과 지식이 축적되었다. 그리고 14세기 후반에 파리 대학과 볼로냐 대학 등은 해부학과 외과 관련 내용을 주요 교과로 편성했고 이는 현대 의학의 초석이 되었다.
  
의사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적극 공개했는데 자국의 언어나 방언으로 쓰인 것이 많았다. 이는 상류층만 쓰는 라틴어를 모르는 대중들을 위한 배려였다. 1348년 4월 24일 자크메 다그라몬은 흑사병 관련 내용을 카탈루냐어로 쓴 공개편지를 남겼다. 그리고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 용어보다는 최대한 쉬운 말로 풀어썼다. 이 노력들 덕분에 어느 정도 글을 아는 사람이라면 질병 관련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현실적인 예방법, 그보다 앞선 근본 해결책
  

▲ 말 해부도(라우렌치아나 도서관) 교황 클레멘스 6세는 흑사병 치료를 위해 한시적으로 해부를 허용했다. 하지만 매우 제한적이었고 이후에도 인간 해부는 여전히 신성모독이었다. 의사들은 동물 사체를 해부하며 인간 몸 내부를 유추했다.ⓒ 박기철
▲말 해부도(라우렌치아나 도서관) 교황 클레멘스 6세는 흑사병 치료를 위해 한시적으로 해부를 허용했다. 하지만 매우 제한적이었고 이후에도 인간 해부는 여전히 신성모독이었다. 의사들은 동물 사체를 해부하며 인간 몸 내부를 유추했다. ⓒ 박기철

의사들은 이후에도 한참 동안 흑사병의 원인이 ‘오염된 대기’라고 잘못 생각했다. 반면 전염을 막기 위해 환자를 격리하고 접촉을 피해야 하며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서는 안 된다는 합리적인 예방법도 내놨다.

하지만 당시 흑사병은 하느님의 형벌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시대였다. 의사들은 처방에 앞서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을 알려줘야 했다. 그것은 죄를 참회하고 신앙을 굳건히 하라는 내용이었다. 의사에게서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을 들은 사람들은 다시 종교 집회와 행렬로 향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그들의 헌신

세월이 지나면서 흑사병에 대한 대응도 발전했지만 여기에는 수많은 의사의 희생이 필요했다.

 

한편 젠틸레 다 폴리뇨(Gentile da Foligno)와 당대 최고의 의사였던 기 드 숄리악의 사례처럼 적지 않은 의사들은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전염될 정도로 헌신적으로 봉사했으며, 젠틸레는 그 과정에서 목숨까지 잃었다. - 박흥식, 2008. 흑사병 논고. 역사교육 106, 183-210

   
예전에도 의사라는 직업은 일반인들에게 신분 상승과 부의 축적을 위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일부 의사들은 혼란을 틈타 터무니없는 처방에 비싼 치료비를 요구하거나 환자를 버리고 도망치기도 했다.

하지만 흑사병 이후 의사는 언제나 죽음과 맞닿아 있는 직업이 되었다. 그래서 많은 의사들은 자식들에게 의료직을 물려주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도 많은 의료 종사자들은 환자를 위해 목숨을 걸고 헌신했고, 우리는 지금도 그들을 만나고 있다.

 

 

[참고 자료]

박흥식(2016) <흑사병은 도시 피렌체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서양사론 제130호)
박흥식(2008) <흑사병 논고> (역사교육 106, 183-210)
박흥식(2006) <흑사병에 대한 도시들의 대응> (서양중세사연구 제25호)
김병용(2007) <중세 말엽 유럽의 흑사병과 사회적 변화> (대구사학 88, 159-182)
서울대학교 중세르네상스 연구소 <중세의 죽음> (산처럼)
조반니 보카치오 <데카메론> (장지연 옮김, 서해문집)
스티븐 그린블랫 <1417년, 근대의 탄생> (이혜원 옮김, 까치>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되었습니다.

저작권자 © 뉴스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